만물-되기[物化]의 윤리학
꿈도 꿈, 현실도 꿈!
선악 시비와 같은 분별을 넘어서기, 이것이 도의 활동이다. 나의 입장에서 타자를 분별하지 말고, 타자를 있는 그대로 보라는 뜻일 터. 부단한 마주침으로 살아가는 존재들에게 가장 중요한 삶의 미션이 분별 넘어서기가 아닌가? 조삼모사의 고사에서도 분별을 넘어서서 두 길을 가는 경우를 말했지만, 그래도 아리송하다.
그래서일까? 장자는 분별 넘어서기의 또 다른 버전을 제시한다. 「제물론」의 끝에서 난데없이 던진 꿈에 관한 이야기! 장자는 여기서 분별의 궁극, 현실과 꿈의 경계조차 해체해버린다. 꿈과 현실 중 어떤 게 진짜일까? 어디까지 꿈이고 어디까지 현실일까? 꿈속의 나는 진짜인가 허상인가? 혹은 현실 속의 나는 진짜일까 허상일까? 장자가 내세운 구작자와 장오자라는 인물의 대화는 우리에게 꿈과 현실의 경계가 확실한 것인지 의심하게 만든다.
모호한 꿈과 현실의 경계
구작자는 공자에게 성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장오자에게 묻는다. “성인은 안달복달하지 않고, 도를 추구하는 걸 즐거워하지도 않고, 특별히 도를 따르려 하지도 않는답니다. 말하지 않고도 말을 한 것과 같고, 말을 하고도 말하지 않은 것과 같아서 세상 밖에서 노닌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공자는 이것을 허무맹랑하다고 하지만, 저는 이것이 신묘한 도를 실천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공자가 이해하지 못한 성인을 구작자는 다소 이해한 듯하다. 나름의 얕은 상식으로 성인을 이해하자면 이렇다. 세상의 도에 매이지도 않고, 자신의 도를 내세우지도 않는 자. 말하지 않고도 그 뜻을 드러내며, 말을 했어도 그 말을 진리라 여기지 않는 자.
그러나 장오자는 구작자에게 우물에서 숭늉을 찾고, 시위를 떠난 화살을 보고 참새구이를 찾듯 성급한 것이라고 말한다. 구작자가 이런 성인을 이해하기엔 아직 한참 멀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장오자는 구작자에게 다시 성인에 대해 말해준다. “천지 만물과 하나 되어, 혼돈의 상태 그냥 둔 채, 귀천의 구별이 없고”, “만년 세월 하나로 섞어, 만물이 스스로 그러한 채로 서로 감싸게 하는” 존재가 성인이라고. 성인은 차별 없이 만물을 있는 그대로 볼 뿐, 만물을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하지 않는다. 귀천의 차별, 선악시비의 판단으로 만물을 재단하지 않는 자.
이런 성인에게는 좋고 나쁨이 없다. 실제 삶은 어떤가? 죽을 자리인 줄 알았더니 더없이 즐거운 삶이 이어지고, 나쁠 줄 알았더니 일이 좋게 풀리는 경우가 있다. 과연 좋다 나쁘다를 단정할 수 있는가? 장오자는 또 말한다. 꿈속에서 즐겁게 술 마시던 자는 아침에 일어나 목 놓아 울고, 꿈속에서 통곡한 자는 아침에 일어나 즐겁게 사냥을 나간다. 한 존재의 꿈과 현실 또는 무의식과 의식이라는 그 미묘한 경계에서 좋은 일은 나쁜 일이 되고, 나쁜 일은 좋은 일로 나타난다. 한 존재 안에서 좋다와 나쁘다는 경계가 불분명하다. 좋은 게 나쁜 것이고 나쁜 게 좋은 것이다. 이는 분열된 자아를 말하는 게 아니다. 내 안에서도 이렇게 경계가 무너지는데 타자와 나와의 사이에서 무엇을 좋다고 단정 지으며, 무엇을 나쁘다고 단정 지을 수 있겠는가?
장오자는 더 나아가서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까지 해체한다. 꿈을 꿀 때는 꿈인지도 모르며, 꿈속에서 꿈을 해몽한다. 물론 꿈에서 깨어나면 이 또한 꿈이었음을 안다. 그렇다면 깨어 있다고 확신하는 현실 또한 한바탕 꿈일지도 모른다. 꿈속에서 꿈인지 모르는 것처럼, 현실이 꿈일지 누가 알겠는가? 이것을 다시 역으로 생각해보면 꿈이라고 확신하는 그것이 현실일 수도 있고, 현실이라고 확신하는 그것이 꿈일 수 있다. 어디까지 꿈이고 어디까지 현실인가?
현실과 꿈의 경계조차 불분명한데 “현명한 척, 똑똑한 척하며 왕이니 목동이니 구별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그리하여 장오자는 말한다. 공자의 말도, 구작자의 말도 꿈이고, 공자와 구작자를 꿈꾼다고 하는 나의 말도 꿈이라고. 모든 것은 꿈처럼 있었지만 없었던 것과 같다. 있는 듯하지만 없고, 잡을 수 있을 것 같지만 잡히지 않는 것. 혹은 없는 것 같지만 있고, 잡을 수 없을 것 같지만 잡히는 것. 불교식으로 하면 찰라멸! 생기고 사라짐은 동시적이다. 있는가 하면 없다. 이것이 세상의 삶이다. 그러니 무엇이 확고한 것이겠는가? 무엇을 옳다고 할 수 있겠는가? 무엇을 믿을 것인가? 지금 이 순간 마주하는 것을 믿을 뿐 그 이상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마주하는 존재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감싸 안는 것 이외에 더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장주의 나비-되기, 나비의 장주-되기!
현실조차 꿈이라면, 내가 말한 것조차 한낱 신기루에 불과하다. 장자가 바라본 세상에서는 불변의 진리나 절대 보편의 도덕이 자리할 공간이 없다. 내가 한 말조차 말한 그 순간에만 효력을 발할 뿐, 그 이상의 지배력을 가지지 못한다. 분별심은 세상을 바라보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존재를 왜곡할 뿐이다.
모든 경계가 해체된 그 자리에서 존재를 마주하기. 이것이 장자의 윤리이다. 의식과 무의식, 꿈과 현실의 경계조차 지워버린 그 자리에서 그 어떤 전제도 없는 존재들의 만남. 장자는 이것이 진정 생명의 윤리라고 생각했다.
만물이 공존할 수 있는 가장 고결한 윤리를 보여주는 것으로 장자는 「제물론」을 마무리한다. 그 유명한 호접몽(胡蝶夢) 이야기.
昔者 莊周夢爲胡蝶. 栩栩然胡蝶也 自喩適志與 不知周也. 俄然覺則蘧蘧然周也. 不知周之夢爲胡蝶與 胡蝶之夢爲周與. 周與胡蝶 則必有分矣. 此之謂物化.
옛날에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었다. 팔랑팔랑 경쾌하게 잘도 날아다니는 나비였는데 스스로 유쾌하고 뜻에 만족스러웠는지라 자기가 장주인 것을 알지 못했다. 얼마 있다가 화들짝 하고 꿈에서 깨어보니 갑자기 장주가 되어 있었다. 알지 못하겠다. 장주의 꿈에 장주가 나비가 되었던가 나비의 꿈에 나비가 장주가 된 것인가? 장주와 나비는 분명한 구별이 있으니 이것을 물의 변화[物化]라고 한다.
장주는 꿈에서 나비가 되어 팔랑팔랑 기분 좋게 날았다. 나비가 된 순간 장주라는 의식은 아예 사라지고 없다. 그러나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 더는 나비가 아니라 장주가 되어 있었다. 꿈속에서 꿈인지 현실인지를 구분하지 않았을 때 장주는 완벽하게 나비로 날았다. 그러나 꿈과 현실의 경계가 분명해진 순간, 장주는 장주이고 나비는 나비로 구별된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장오자의 말처럼 꿈이 현실이고 현실이 꿈이라면, 혹은 꿈과 현실이라는 구분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라면 나는 장주인가 나비인가? 장자는 깨어나서 의심한다. 장주의 꿈에 장주가 나비가 된 것인가? 나비의 꿈에 나비가 장주가 된 것인가? 모든 경계가 완전히 지워진 자리에서 존재들은 구분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장주의 꿈은 나비의 현실이고, 장주의 현실은 나비의 꿈일 수 있는 것이다.
꿈인 듯 현실인 듯 찰나에 장주는 나비가 되고, 나비는 장주가 된다. 존재들의 공명(共鳴)을 장자는 이렇게 환상적으로 표현했다. 현실과 꿈의 경계가 지워지고, 나비와 장주의 경계가 지워진 자리에서 나와 타자라는 분별심은 사라지고, 자연스럽게 나비-되기와 장주-되기가 일어난 것이다. 물론 장주는 장주이고, 나비는 나비이다. 둘 사이는 분명히 구분이 있지만 나비가 장주가 되고, 장주가 나비가 되는 그 만물-되기[物化]는 꿈처럼 일어났다 사라진다. 분명히 또 다른 마주침에서 장주와 나비는 각기 다른 만물-되기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장자의 <호접몽> 이야기는 그야말로 몽환적으로 만물-되기를 보여준다. 만물-되기는 조금의 자의식도 내세우지 말아야 가능하다. 나비는 나비의 자의식을, 장주는 장주의 자의식을 조금도 개입시키지 않아야 장주의 나비화, 나비의 장주화가 가능하다. 이것이 ‘하지 않으면서 하지 않는 것이 없는 상태[無爲而無不爲]’, 즉 무위이다. 만물-되기는 억지로 해서는 가능하지 않다. 억지로 할 때는 자의식이 개입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계산 없이 타자가 되는 것. 그것이 진정 도덕이라는 당위나 의무 없이 현재의 타자와 공존하는 방법이다. 너무 환상적이라면 이것을 현실적으로 풀어보자.
나를 지킬 견고하고 불변하는 진리들을 쌓는 일은 나를 강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멈춰 서게 하는 길이다. 나만 멈추면 되는데, 존재들의 자연스러운 리듬과 흐름을 방해하게 된다. 다른 존재들과 감응하지 못하고, 독단과 독선으로 서로의 생명을 파괴한다. 다른 존재를 파괴하면 나도 파괴된다. 세계는 전쟁터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적극적으로 변화에 몸담고 외물과 마주쳐야 한다. 장자는 그러기 위해 물화(物化)하라고 말한다.
나를 버린다는 것은 나를 비움이다.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아무런 생각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게 아니다. 나를 구성한다고 착각하는 단단한 퇴적물들을 씻어내는 작업이다. 고착되고 굳어 있는, 그러나 결별하기 어려운 익숙한 습관, 관념들을 버리는 일이다. 옛 습관을 새로운 습관으로 대치하는 것이 바로 마음을 비우는 일이다. 단단하게 고착된 아집을 버려야 외부 사물과 끊임없이 공명할 수 있다.
이 공명은 몸과 마음으로 하는 게 아니다. 나를 생성한 '기'로 하는 것이다. 그 기는 존재 전부를 말한다. 존재를 다 던져서 타자와 감응할 때 나는 나라는 각질을 벗겨 낼 수 있다. 꿈속에서 장주는 나비였다. 장주라는 자의식을 버리고 장주로 사는 법을 버려야 나비가 될 수 있다. 어떤 조건도 달지 않고 나비의 기운 장으로 전이해야 타자와의 간격이 사라진다. 장주라는 존재는 완전히 사라지고 나비의 신체와 마음으로 나비의 리듬을 타는 것. 그것이 물화다. 나비가 장주인지, 장주가 나비인지 구분조차 일어나지 않는, 어떤 틈새도 없이 물 그 자체가 되는 것. 이것이 물화다. 물과 물이 완벽하게 소통하는 상태여야 물화가 일어난다. 나를 버리지 않으면 물화 되지 않고, 물화 되지 않으면 생성의 흐름에 동참할 수 없다. 형체는 그대로지만 온몸과 마음이 나비의 기로 전이되는 순간이 바로 물화다. 나비는 나비고 장주는 장주지만, 다른 존재의 생명의 흐름에 완벽하게 동참해서 나비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되고, 나비의 쭈뼛거림이 나의 쭈뼛거림이 되는 것. 이렇게 되면 어떤 존재와 마주치든, 자연스럽게 서로의 모자람을 채워주고 넘치는 것을 덜어줄 수 있다. 환대할 수 있을 정도의 이방인만 환대하는 것이 아니라. 환대할 수 없는 이방인조차 환대할 수 있는 공존의 윤리.
나를 비우고, 타자가 되는 것. 이것이 생성과 변화라는 존재성에 능동적으로 뛰어드는 행위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만물을 같게 보고, 도의 관점에서 만물을 밝게 관해야 한다. 그래서 제물론(齊物論)은 지식이 아니라 존재 방식이자 세계에 대한 윤리적 태도다.
길진숙(남산 강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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