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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장자』, 마이너리티의 향연

장인들이 알려주는 양생의 방법

by 북드라망 2017. 8. 17.

장인들이 알려주는 양생의 방법

 

 

1. 양생, 자연의 결을 따르기

 

장자가 인위를 부정하지만, 『장자』에서 기술과 윤리 자체가 불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인위는 근본적으로 자연을 해친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자연을 해치지 않는 인위는 없다. 그렇지만 인위적인 행위가 없을 수는 없다. 인간이 지구 상에 떨어진 이상 자연에 대한 인간적 변용이 한 치도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건 상상조차 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생존 원리상 자연 상호 간에, 인간 상호 간에, 자연과 인간 상호 간의 이용과 변용은 불가피하다. 그러니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나를 살게 해주는 존재들에 대한 외경과 감사요, 나를 살게 해주는 대상과 나와의 관계성이다. 인위가 지나치면 이들을 기계적으로 대상화한다. 인위에 대한 성찰이 없으면 우리만 잘살겠다고 자연을 무차별적으로 이용하고 무차별적으로 자연을 학살하는 사태가 만연한다. 장자의 인위에 대한 부정은 바로 이 지점에서 일어난다.

 

장자는 그렇게 원시적, 극단적 순수주의자는 아니다. 표면만 읽으면 장자는 인위 자체를 부정한 원시주의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포정의 소를 해체하는 기술(庖丁解牛), 귀신처럼 수레를 잘 만드는 목수의 기술에서 익히 알듯, 기술을 인정한다. 물론 그림쇠나 곱자, 혹은 칼과 같은 도구에만 의지하는 기술이 아니라, 온몸으로 터득하여 내면화된 기술을 인정한다. 진정한 달인. 이럴 때 기술은 기예가 아니라 하나의 도다.


 


 

포정은 소를 해체할 때 소를 보지 않는다. 눈으로 보고 소를 자르는 게 아니라 ‘神’(감각과 지각 이상의 신체 능력)으로 소의 결과 틈새(天理)를 감지한다. 소를 해체하는 건, 칼이라는 도구와 포정의 힘이 아니다. 소를 해체하는 데 필요한 기술은,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결과 결 사이, 뼈와 살, 힘줄과 살 사이의 틈새를 잡아내는 신기(神氣)이다. 포정은 진정 소를 아는 자요, 소의 결 그 자체가 된 자다.

 

틈새를 감지하기에 칼을 써도 쓰지 않는 것 같고, 힘도 들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포정이 소를 해체하는 데 사용하는 칼은 19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방금 숯 돌에서 갈려나온 것처럼 예리하다. 뼈나 근육을 자르지 않고 틈새를 가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도구나 힘보다 우선하는 것은 생명의 흐름이요 결이다. 우리도 19년쯤 연마하면 천연의 결을 감지하여 칼 너머에서 칼을 쓰는 장인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포정이라는 훌륭한 요리사가 문혜군을 위하여 소를 잡았다. 손을 갖다 대고 어깨를 기울이고 발을 디디고 무릎을 굽히고 그 소리는 설컹설컹, 칼 쓰는대로 설뚝설뚝. 완벽한 음률. 무곡인 '뽕나무숲'에 맞춰 춤추는 것 같고, 악장 '다스리는 우두머리'에 맞춰 율동하는 것 같았다.

 

문혜군이 "참 훌륭하도다. 기술이 어찌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있을까?" 

요리사가 칼을 내려놓고 대답했다. "제가 귀히 여기는 것은 도입니다. 기술을 넘어선 것입니다. 제가 처음 소를 잡을 때는 눈에 보이는 것이 온통 소뿐이었습니다. 삼년이 지나자 통째인 소가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神으로 대할 뿐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감각 기관은 쉬고, 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입니다. 하늘이 낸 결을 따라 큰 틈바귀에 칼을 밀어 넣고, 큰 구멍에 칼을 댑니다. 이렇게 정말 본래의 모습을 따를 뿐, 아직 인대나 건을 베어 본 일이 없습니다. 큰 뼈야 말할 나위도 없지 않겠습니까?

 

휼륭한 요리사는 해마다 칼을 바꿉니다. 살을 가르기 때문입니다. 보통의 요리사는 달마다 칼을 바꿉니다. 뼈를 자르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19년 동안 이 칼로 수천 마리나 잡았습니다. 그러나 이 칼날은 이제 막 숫돌에 갈려 나온 것 같습니다. 소의 뼈마디에는 틈이 있고 이 칼날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 없는 칼날이 틈이 있는 뼈마디로 들어가니 텅 빈 것처럼 넓어, 칼이 마음대로 놀 수 있는 여지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19년이 지났는데도 칼날이 이제 막 숫돌에서 갈려 나온 것 같은 것입니다."

─양생주

 

장자는 죽은 소를 해체하는 포정에게서 역설적으로 삶의 기술을 이끌어낸다. 문혜군이라는 가장 귀한 신분의 군주가 가장 천한 신분의 백정에게 삶의 도를 배우는 장면 자체가 가치의 전도다. 삶의 도는 인간 저 너머에, 혹은 높은 곳에 있지 않다. 모든 존재가 부대끼는, 피 튀기는,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이곳에 있다. 이런 곳에서 생명을 사유하고 생성되게 해야 한다. 따라서 장자는 한 개체의 생명 유지만이 아니라, 여러 생명의 공생을 문제 삼는다.

 

문혜군은 포정을 통해서 ‘천리’(생명의 결)를 감지하는 도를 터득한다. 생명체들은 저마다의 결을 지니고 있다. 이 결에 따르는 것이 양생이다. 군주는 백성의 양생을 위해서 일할 뿐이다. 즉 백성의 결을 감지하고 그 결대로 살도록 하는 것이 진정 군주의 임무다. 군주가 자기 위주로, 자신의 법으로 백성에게 군림한다면 이는 칼과 힘으로 백성을 베는 행위와 다르지 않은 셈이다. 양생의 도를 터득하여, 법이 있되 법을 쓰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양생의 도가 무엇인지 평범한 사람들의 처지에서 살펴보자. 자공과 한 노인의 대화를 보면, 장자가 인위적 기술이나 기예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자공이 남쪽의 초나라에 여행하고 진나라로 돌아오려고 한수 남쪽을 지나다가 한 노인이 마침 밭일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굴을 뚫고 우물에 들어가 항아리를 안아 내다가는 밭에 물을 주고 있었다. 애를 써서 수고가 많은데 그 효과는 아주 적었다. 자공이 말했다. 여기에 기계가 있으면 하루에 백이랑도 물을 줄 수가 있습니다. 조금만 수고해도 효과가 큽니다. 댁께선 그렇게 해보실 생각이 없습니까? 밭일을 하던 노인은 고개를 들고 그를 보자 말했다. "어떻게 하는 거요." 말하기를 "나무에 구멍을 뚫어 기계를 만들고 뒤쪽은 무겁게 앞쪽은 가볍게 합니다. 흐르듯이 물을 떠내는데 콸콸 넘치도록 빠릅니다. 그 기계 이름을 두레박이라고 합니다."했다. 밭일을 하던 노인은 불끈 낯빛을 붉혔다가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내 스승에게 들었소만 기계를 갖는다면 기계에 의한 일이 반드시 생겨나고 그런 일이 생기면 반드시 기계에 사로잡히는 마음이 생겨나오. 그런 마음이 가슴속에 있게 되면 곧 순진 결백한 것이 없어지게 되고, 그것이 없어지면 정신이나 본성의 작용이 안정되지 않게 되오. 정신과 본성이 안정되지 않은 자에겐 도가 깃들지 않소. 내가 모르는 게 아니오. 부끄러워 쓰지 않을 뿐이오." 자공은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며 고개를 숙인 채 잠자코 있었다.

─천지

 

장자는 인위가 불필요하다고 말하지 않고, 인위적 기술, 제도에 사로잡히지 말라고 한다. 공자의 뛰어난 제자 자공! 공자 문파의 재정담당이자 오늘날로 보자면 펀드매니저였던 자공이 한 노인에게 공력은 적게, 효과는 배가 되는 두레박을 알려준다. 노인은 두레박이라는 도구를 몰라서 사용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두레박에 사로잡혀 몸의 능력을, 자연과 공명하는 정신을 잃어버릴까 봐 두레박을 일부러 거부한 것이다. 땅과 물과 내 몸이 교감하는 노동의 현장을 놓칠까 봐 두레박의 사용을 일부러 피하는 것이다.

 

유종원의 「종수곽탁타전(種樹郭槖駝傳)」에서 곽탁타는 나무를 잘 가꾸었는데 나무의 천성을 잘 따르고 본성을 다하게 했기에 가능했다. "영혼에는 영적 능력이 없다. 영혼이 육체에서 벗어나 허공을 배회하고 있는데 어떻게 영적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겠는가. 영적 능력은 신체적 능력을 통과하지 않고는 결코 표현될 수 없다. 영적인 부분이 물리적인 부분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태도야말로 영적인 태도가 아니다." (고미숙, 나비와 전사. 376쪽) 양생의 도를 위해 도구를 제한적으로 사용할 것. 그리고 몸과 마음을 쓸 것!

 

 

2. 양생의 기예, 무위(無爲) 그리고 잊기!

 

칼을 쓰되 쓰지 않는 포정, 두레박을 알지만 두레박을 쓰지 않는 노인. 이 두 사람의 행위가 바로 무위(無爲)이다. 무위는 나를 기르고 타자를 살게 하는 양생의 기예이다. 무위는 작위적인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다. 말하자면 포정처럼 의도적으로, 억지로 무엇을 쓰지 않기가 무위이다. 또 한편으로는 노인처럼 무엇에 얽매이지 않기, 사로잡히지 않기가 무위인 것이다. 삶의 결대로 살게 하려면, 폭력이나 제도나 도구나 진리를 앞세워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장자는 무위를 한 차원 더 끌어올린다. 장자는 무위의 최고 상태를 ‘서로 잊기’라고 표현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기에서 더 나아가 잊어버리기, 혹은 의식하지 않기! 잊어버린다는 혹은 의식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심함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행동이 아니다. 존재의 생명의지를 믿기 때문에 생기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송나라의 태재 탕이 장자에게 인에 대해 물었다. 장자는 "호랑이나 이리가 인입니다."하고 대답했다. 묻기를 "무슨 뜻입니까?" 하니까 장자가 대답했다. "부자가 서로 친합니다. 어찌 인이 아니라 하겠습니까?" 묻기를 "부디 지극한 인을 말씀해 주십시오." 하니까 장자는 대답했다. "지극한 인에는 친하다는 것이 없습니다." 태재가 말했다. "나는 이렇게 들었습니다. 친하다는 것이 없으면 사랑함이 없고 사랑함이 없으면 불효하다는 겁니다. 지극한 인은 불효해도 된다는 뜻입니까?" 장자는 대답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대저 지극한 인이란 훨씬 높은 것입니다." 효도 따위는 물론 이에 비해 말할 것이 못 됩니다. 이러한 의견은 효도를 넘어선 말이 아니라 효도에 미치지 못하는 말입니다. 저 남쪽으로 여행한 자가 초나라의 서울인 영에 가서 북쪽을 돌아보아도 명산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왜냐하면 멀리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존경으로 효도를 다하기는 쉽지만, 사랑으로 효도를 다하기는 어렵다. 사랑으로 효도를 다하기는 쉽지만, 어버이를 잊기는 어렵다. 어버이를 잊기는 쉽지만, 어버이가 나를 잊게 하기는 어렵다. 어버이가 나를 잊게 하기는 쉽지만, 천하가 한결같이 나를 잊게 하기는 어렵다. 천하를 함께 잊기는 쉽지만 천하가   한결같이 나를 잊게 하기는 어렵다고 말입니다. 대저 요순 이상으로 남아도는 덕이 있어도 새삼스러운 짓을 하지 않습니다. 은혜가 만대에 미쳐도 천하는 알지 못합니다. 어째서 일부러 한숨을 내쉬며 인이니 효니 하고 말하겠습니까? 저 효도와 형제애, 박애와 정의, 충성과 신의, 지조와 염직 따위는 모두가 스스로 무리해서 그 덕을 사용하는 것이니 존중할 일이 못 됩니다.

─천도

샘물이 말라 물고기가 땅 위에 모여 서로 물기를 끼얹고 서로 물거품으로 적셔 줌은 드넓은 강이나 호수에서 서로 잊고 있는 것만 못하다. 요임금을 칭찬하고 걸 왕을 헐뜯기보다는 양쪽을 다 잊고 도와 하나가 되느니만 못하다.

─대종사

 

장자는 효도, 형제애, 박애와 정의, 충성과 신의, 지조와 염직 등의 당위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도덕명제에 얽매이지 말라고 한다. 이것은 세상이 나에게 지시하고 명령한 것이다. 효도 혹은 인이라는 규정된 가치에 따르는 게 진짜 부모를 사랑하는 것일까? 부모에 대한 자연스러운 사랑은 인이라는 매뉴얼에, 혹은 효도라는 매뉴얼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용례에, 정의에, 어떤 원칙이나 규례에 매이면 진정한 인 혹은 효가 될 수 없다. 이건 부모나 사람들과 소통하고 나누는 게 아니라 내가 그 용법에 휘둘리는 것이다. 인을 위해 인을 지키는 행위에 불과하다.

 

장자는 정말 공감하고 나누는 일은 차라리 잊는 일이라고 말한다. 내가 부모를 잊고, 부모도 나를 잊으며, 내가 천하를 잊고 천하도 나를 잊는 경지. 이것이야말로 서로의 생을 길러주는 최고의 길이라고 한다. 어째서 그러한가?

 

샘물의 물고기 비유를 통해 구체적인 이해를 돕는다. 헐벗은 물고기에게 잠깐의 자비를 베푸는 것보다는 물이 풍부한 강이나 호수에서 서로를 잊는 게 낫다고 한다. 요임금은 칭찬하고 걸 임금은 비난하는 행위보다는 양쪽을 다 잊는 게 낫다고 한다. 잊는다는 것은 진짜 나를 둘러싼 주변의 존재들을 진짜 잊는다는 말인가? 동정이나 사랑이라는 행위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모두 힘써야 할 것은 나와 타자가 살고 있는 이 공간을 살 만한 곳으로 만드는 일이다. 각자 열심히 그런 시공을 만들기 위해 애쓰면 된다. 그런데 우리는 내 삶과 내 시공을 돌보지 않고 다른 이의 삶을 간섭하며 사랑이니 인이니 하는 여러 가지 의무와 책임을 앞세운다. “신발이 발에 꼭 맞으면 신발을 잊고. 허리띠가 허리에 꼭 맞으면 허리띠를 잊는” 것처럼 서로의 생명을 기르는 데 꼭 맞는 활동을 알아서 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장자는 제안한다.

 

어버이도 나도, 통치자도 백성도 각자 살기에 좋은 환경을 만들기 위해 애쓰면 굳이 상대에 대한 의도적이고 강제적인 가치를 행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 어떤 존재도 의식하지 않은 채 살 수 있는 힘, 이것이 무위의 요체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않은 채,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살기.

 


하늘은 누구만을 특별히 사랑하지 않는다. 누구만을 특별하게 미워하지도 않는다. 특별히 사랑하고 특별히 미워하는 건, 개체들의 삶이다. 모든 것을 보살피면서 보살피는 줄도 모르게 하는 것, 그것이 하늘이다. 자연의 힘이다. 이것을 무위(無爲)라고 한다.


덕이 지극했던 세상에서는 현자라고 우러르지 않고 재능이 있다고 쓰지 않으며 위에 있는 사람도 높은 나뭇가지처럼 있을 뿐이고 백성은 들판의 사슴처럼 자유로웠지. 단정하게 해도 그것을 의롭다 여기지 않고 서로 사랑해도 그것을 어질다 생각지 않으며 성실해도 그것을 정성(忠)이라 여기지 않고 일이 꼭 들어맞아도 그것을 미덥다 생각지 않으며 꿈지럭거리고 움직여 남을 위해 일해도 그것을 은혜라 여기지 않았지. 그러니까 무엇을 실행해도 그 자취가 없고 일이 있어도 전해지지 않았던 거야.

─천지

노담이 대답했다. “훌륭한 왕의 정치란 그 공적이 온 세상에 미치면서도 자기 때문이 아닌 것처럼 하고, 만물에 교화를 베풀지만, 백성은 의식하지 않는다.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들이 그 이름을 들먹이지 않는 것은 그들이 스스로 한 것으로 알고 기뻐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짐작도 할 수 없는 경지에 서 있고, 무의 세계에 노니는 자다.”

─응제왕

 

무위는 일을 전혀 하지 않는 상태를 말하는 게 아니다. 임금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능력 있는 신하를 적재적소에 쓰는 황로의 정치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작용하되 작용한 흔적이 없고, 편안하게 살게 하되 각자 스스로 한 일처럼 여기게 하는 것이 무위이다. 천하의 밖에서 천하를 다스리고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천하의 하나로서 사는 것이 무위이다. 우리는 공기가 있어야 산다. 그러나 우리는 공기 때문에 산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숨을 쉬니까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공기는 스스로 맑은 공기를 천지에 가득 채우고, 존재들은 열심히 그 공기로 숨을 쉬며 공기를 잊는다. 무위는 바로 이런 것이다. 서로에게 필요한 일을 하는데도 서로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 그래서 서로를 공기처럼 여겨 있어도 있는지 잊어버리는 경지. 작용하면서도 작용하는지 의식되지 않는 것. 공존의 윤리를 지켜가면서도, 그 윤리 때문에 부자연스러운 게 아니라 그 윤리가 있는지조차 의식하지 않으면서 지키는 삶의 형태.

 

굳이 누구를 위해 산다고 의식하지 않을 수 있다면, 최고의 삶을 누리고 있는 게 아닐까? 장자가 말하는 이러한 경지를 이루려면, 그냥 되는 것은 아닐 터. 분명 포정처럼 19년 이상의 훈련이 필요하다. 물론 이것은 누가 전수해줄 수 없는 것이다. 각자의 몸과 마음으로 연마하여 삶의 장인이 되어야 한다. 나와 타자들이 편안히 숨 쉬며 각자의 삶을 기르는 일에 충실할 수 있는 그 환경, 혹은 그 조건을 만들기 위해 공기처럼 활동하기. 이런 유위의 세상에서 이러한 무위는 그냥 오기 어렵다. 장자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세상을 잊어버린 방기자가 아니다. 자연스러운 삶을 모색하기 위해 그 누구보다 세상에 관심이 많았던 철학자였다.


글_길진숙(남산 강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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