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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장자』, 마이너리티의 향연

장자, 경계 없는 사유 : 만물은 모두 똑 같다[萬物齊同] ①

by 북드라망 2017. 6. 1.

경계 없는 사유 : 만물은 모두 똑 같다[萬物齊同] ①

- 인간, 나는 어떤 존재인가?

 

 

존재는 정말 변해야 하는가?

 

장자는 삶을 혁명하라고 말했다. 우리는, 삶의 혁명은 정치 시스템이나 사회 구조를 바꿀 때 찾아오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장자는 달랐다. 제도나 정치를 믿지 않았다. 그런 것들로 삶이 바뀌거나 구원되지 않는다. 구원은 우리 스스로 하는 것이다. 진정 생명을 구원하고자 한다면 존재가 바뀌어야 한다. 삶의 혁명은 존재를 탈바꿈할 때 도래한다. 그래서 장자는 고착되고 익숙한 지반으로부터 떠나기를, 새로운 존재로 계속해서 변신하기를 제안했다.

 

장자의 변신 이야기를 자꾸 듣다 보니, 뭔가 그럴듯한데 그래도 뭔가? 슬금슬금 의구심이 일어난다. 9만 리를 날아 남명의 천지로 가려는 대붕을 비웃던 비둘기나 메추라기처럼 고개가 갸우뚱, 도대체 ‘납득이’ 안 되는 것이다. 혜시처럼 장자의 말은 거대하지만 쓸모없는 게 아닐까 은근슬쩍 회의가 밀려오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무조건 변해야 하는가? 버리고 탈주하는 것만이 살길인가? 정말 변하지 않으면 이 생명체를 구제할 길이 없는가? 왜? 어째서?  

장자는 그런 우리의 마음을 꿰뚫었는지, 존재가 변신해야 하는 이유를 알려준다. 결론부터 말하면 변화는 존재의 본질이란다. 존재가 변화하는 게 아니라, 변화가 존재를 존재하게 한다는 것이다.(윤세진, 『재현이란 무엇인가』, 그린비, 2009)

 

 

변화는 존재의 본질이다.


 

그리하여, 도통 신심이라고는 없는 우리를 이해시키기 위해 장자는 존재의 원리를 탐사한다. 천지 만물이 어떻게 생성되고 운행되는지, 그 이치를 안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방향을 감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존재의 원리를 탐구하는 일은 형이상학적 관념을 이해하는 수준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고차원적이고 추상적인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 아니라 이 세계 속에서 삶을 제대로 잘 살아내기 위한 탐색이자 실천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나를 나를 버렸다!

 

장자에게는 존재를 탐사하는 작업 자체가 일종의 수행이다. 이 세상이 어떻게 생성되었는지, 어떻게 움직이는지 편견 없이 접근하려면, 선행 작업이 필요하다. 이름하여 나를 비우기. 무언가와 접속하기 전에 고착되어 있는 선지식을 버리는 일은 필수이다. 그래야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

 

장자 철학의 핵심 테제가 되는 「제물론」을 이끄는 주체는 남곽자기라는 스승이다. 남쪽 성밖에 사는 자기라는 이름의 주인공. 성밖에 사는 거로 보아 지위도 높지 않고 부유하지도 않은 촌스런 사람임이 틀림없다. 성안 생활에 포획되지 않은 자유분방한 인물. 따라서 얽매이지 않고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자. 이것이 장자가 남곽자기라는 인물을 내세운 이유일 것이다. 그 촌사람이 안성자유라는 제자와 대화하며, 우리를 우주 만물의 시원으로 안내한다. 제자 안성자유도 뭔가 연상되지 않는가? 공자의 제자인 안회와 자유. 공자 문하에 드는 존재들이다. 이 두 사람을 합성한 듯한 제자 안성자유는 스승의 모습을 보고 놀란다. 스승이 마치 명상을 하는 듯, 혹은 삼매 상태에 들은 듯, 조금 전의 모습과 완전히 달라져서이다.

 

남곽에 사는 자기라는 사람이 책상에 기대 앉아서 하늘을 쳐다보며 깊이 숨을 내쉬었습니다. 멍하니 앉아 있는 모습이 마치 자기 몸과 마음을 다 잃어버린 것 같았습니다. 그 앞에 모시고 있던 제자 안성자유가 물었습니다. "어찌 된 일입니까? 몸이 이렇게 마른 나무 같아지고 마음이 이렇게 죽은 재와 같아질 수 있습니까? 지금 책상에 기대앉아 계신 분은 이전에 이 책상에 기대앉아 계시던 그분이 아니십니다." 자기가 말했다. "언아, 참 잘 보았구나. 지금 나는 나를 잃어버렸다. 그런데 네가 그 뜻을 알 수 있을까?“

 

안성자유는 스승의 몸이 마른나무(枯木)와 같고 마음이 죽은 재(死灰)처럼 느껴지는 데 놀라서 질문했던 것이다. 몸과 마음의 잉여를 몽땅 밀어낸 듯한 모습. 앙상하고 희미하게 몸과 마음이라는 흔적만 남은 것 같은 경지. 이 경지는 어떤 상태인지? 스승 남곽자기는 놀라는 제자에게 나는 나를 잃었다(吾喪我)!, 라고 대답한다. 스승은 세계를 느끼기 위해 자신이 구축한 바의 나라는 것을 버린다. 결국 나를 버린다는 것은 내 몸과 마음에 축적된 감각과 지식을 비운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무런 생각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게 아니다. 나를 구성한다고 착각하는 단단한 퇴적물들을 씻어내는 작업이다. 그리하여 모든 전제를 내려놓는 상태에 이르는 것. 이제까지 알았던 바대로 세상을 보는 오류를 막기 위한 전초 작업이다.

 

그래서 고목사회(枯木死灰)의 상태는 비유적인 표현이라기보다는 숨을 발뒤꿈치까지 깊이 들이쉬며 내쉬는 수련의 결과로 보인다. 세계를 향해 심신을 열고 자신을 해체하는 훈련을 통해 도달하는 단계! 남곽자기는 자신을 해체한 뒤에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애 대해 이야기를 시작한다.

 

 

몸과 마음의 성주괴멸!

 

「제물론」에 묘사된 인간은 애잔하기 짝이 없다. 몸과 마음을 받고 이 땅에 뚝 떨어진 인간이란 존재의 삶은 참으로 변화무쌍하고 버라이어티하다. 몸과 마음은 한시도 가만히 있은 적이 없다. 이리저리 부대끼며 전쟁을 치른다.

 

크게 지혜로운 이는 대강대강 하고, 조금 지혜로운 이는 꼼꼼하고 자세하게 한다. 큰 말은 담담하고, 작은 말은 시시콜콜 따진다. 잠들었을 때는 혼들이 뒤섞여 꿈을 꾸고, 깨어있을 때는 몸의 감각이 열려 사물과 접촉한다. 사물과 접촉하여 다투고, 날마다 마음속으로 전쟁을 치른다. 너그럽게 마음을 쓰고, 심각하게 마음을 쓰고, 세밀하게 마음을 쓴다. 작은 두려움엔 안절부절못하지만, 큰 두려움이 닥치면 기절을 한다.

 

시비를 가릴 때는 물매나 화살이 날아가듯 날쌔다. 끝내 이기겠다는 것을 보면 하늘에 두고 한 맹세 지키듯 끈덕지다. 날로 쇠하는 것을 보면 가을․겨울에 풀과 나무가 말라 가는 것과 같고 하는 일에 빠져들면 헤어날 길이 없다. 끈으로 꽁꽁 묶듯이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그는 것은 늙어 욕심이 넘쳐남을 말한다. 죽음에 가까워진 그 마음은 다시 소생시킬 수가 없다.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그다​

 

 

마음도 세월에 따라 변한다. 시비를 가르고, 이기려는 마음의 전쟁을 치르면서 마음도 늙고 병들고 죽는다. 가을, 겨울의 풀과 나무처럼 쇠락할 뿐만 아니라 고집스럽고 욕심으로 꽉 차서 마음은 닫힌다. 그리고는 소생 불가능의 상태에 이른다.

 

기쁨과 노여움, 슬픔과 즐거움, 염려와 후회, 변덕과 고집, 아첨과 방자, 터놓음과 꾸밈, 이것들이 모두 빈 데서 나오는 노래요, 습한 데서 나오는 버섯이다. 우리 안에 밤낮으로 번갈아 나타나지만, 어디서 나오는지 알 수가 없지. 이렇게 아침․저녁으로 나타나기에 우리가 삶을 유지하는 것. 이런 것들이 없으면 내가 있을 수 없고 내가 없으면 이런 것들이 나타날 턱이 없지. 이야말로 진실에 가까운 것이나 이런 변화가 나타나게 하는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구나.

 

마음이 왜 이렇게 들쭉날쭉, 기상변화만큼이나 변덕스러운지. 그 원인을 알 수가 없다. 왜 순간순간 기분 나쁜지, 노여운지, 질투가 일어나는지 나도 모른다. 내 마음 나도 모르게 온갖 감정들이 갈마들고, 그 감정들이 나를 휘두른다. 어디서 오는지 몰라서 괴롭고, 감정에 휘둘려서 힘에 겹다. 그러나 이것이 동시에 살아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내가 있어서 겪는 변화이니 어쩔 수 없다. 고통스럽지만 견뎌야 한다.

 

우리는 태어나서 받은 마음을 완전한 마음이요, 이루어진 마음[成心]이라 여긴다. 완성된 마음이라 여길 때, 우리가 갖는 태도는 너무나 뻔하다. 변화는 완성된 것을 쇠락하게 하고 파멸시킨다. 장자는 마음도 생로병사의 변화를 겪는다고 한다. 미묘하게 갈마드는 감정들의 생로병사가 반복될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마음 그 자체도 성주괴멸(成住壞滅)한다. 원래 그 상태, 이루어진 마음이라는 그 상태는 영원하지 않다. 그래서 인생은 고해다. 마음만 그러는 게 아니다. 몸도 마찬가지로 전쟁이다.

 

일단 완성된 몸[成形]을 받으면, 일부러 망치지 않더라도, 저절로 쇠잔해져 간다. 사물들과 부딪쳐 서로 깎고 닳는 동안에 우리의 삶은 달리는 말처럼 걷잡을 수 없이 지나가나 그만둘 수 없으니, 이 또한 슬픈 일이 아니냐? 죽을 때까지 악착같이 수고하면서도 그 성공은 기약하지 못하고, 고달프게 고생하면서도 돌아가 쉴 곳을 알지 못하니, 또한 애처롭지 아니한가? 그래도 죽지는 않았다고 자위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뭐 그리 대수냐? 어차피 육체가 변하면 그 마음도 육체와 더불어 그렇게 될 것이니 큰 슬픔이라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람의 삶이라는 것이 본래 이처럼 엉망진창인 것인가? 아니면 나만 홀로 이런 것인가? 사람 중엔 이렇게 엉망진창이 아닌 이들도 있는 것인가?

 

우리는 완성된 몸[成形]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마음이 성주괴멸하듯 몸도 성주괴멸의 과정을 벗어날 수 없다. 몸을 악착같이 혹사하는 와중에 시간은 말처럼 달리며 지나간다. 죽을 때까지 깎고 닳도록 고생했으나 성공을 기약할 수 없고, 고달프게 움직였으나 쉴 곳을 알지 못한다. 늙고 병들고 마침내는 소멸하는 육체.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큰 슬픔이 찾아온다.

 

 

인간의 참주재자는? 

 

인간이 살아가는 현주소는 이렇다. 삶이 이렇게 엉망진창인 것인지 묻는다. 혹여 나만 엉망진창인지 안 그런 인간도 있는지, 아니면 모든 인간이 다 이렇게 엉망진창인지? 존재의 숙명이라면 고통을 감내할 수밖에 없는가? 현상적 존재들은 완성된 몸과 마음을 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변화를 두려워하며 고통스러워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인간은 고통의 원인 즉 변화를 야기하는 근원을 알고자 한다. 그래서 인간들은 질문한다. 나의 마음을 변덕스럽게 만들고 나의 몸을 쇠락하게 만드는 어떤 주재자가 있는가? 인간을 변화의 고통 속에서 살게 하는 참주재자[眞宰]가 따로 있는가?

 

유학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유학은 마음이 천 리, 혹은 천성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기로 이루어진 몸과 기에 의해 탁해진 마음을 다스릴 수 있다고 한다. 본래의 마음을 기르면 몸의 혼탁함과 외부 사물로 야기된 어지러움을 씻어낼 수 있다. 몸의 주인은 마음이다.

 

그러나 장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장자는 우리의 몸이 참주재자인지, 마음이 참주재자인지 한참을 따져 묻는다. 마음이 군주이고 몸이 신하인가? 마음이 군주가 아니라면 몸의 여러 기관 중에 누가 군주이고 누가 신하인가? 혹시 몸과 마음의 여러 기관이 돌아가면서 군주가 되고 신하가 되는가? 이리 따져보고 저리 따져본다. 확실한 건, 마음이 인간의 주재자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루어진 마음은 스승이 될 수 없다.

 

이루어진 마음[成心]을 따라 그것을 스승으로 삼으면 누군들 스승이 없겠는가? 어찌 반드시 생사변화를 알아서 마음에 스스로 깨닫는 자라야만 이것이 있겠는가? 어리석은 사람도 모두 이것을 가지고 있다.

 

 

 

장자는 아직 답을 주지 않는다. 마음이 아니라면 몸도 스승이 될 수 없다. 알쏭달쏭. 어찌 보면 몸과 마음의 여러 기관 전부가 주재자일 듯도 하고 아닌 듯도 하다. 일단 확인할 수 있는 바는, 몸과 마음도 여러 생명기관의 공동체라는 것. 그 공동체들이 서로 접속하고 또 이들이 외부 사물과 부딪친다는 것. 현상 속에서 장자가 분명하게 알려준 바는 이것뿐이다.

 

헷갈리는 김에 좀 더 나가보자. 장자는 인간을 주재하는 자는 인간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물론 인간이 아니라고도 말하지 않았지만. 만약 인간이 아니라면 누구일까? 우리는 쉽게 우리 몸과 마음을 지배하는 초월적 주체를 찾는다. 변화를 고통으로 여기는 인간은 이 세상을 형벌이자 죄의 대가를 치르는 곳으로 여긴다. 그래서 초월자에게 매달린다. 변화하는 가운데 변하지 않는 것, 운동을 주재하는 '움직이지 않으면서 움직이게 하는 자(不動의 動者)'를 찾아 현실 저 밖의 이데아의 세계를 찾아 헤매게 된다. 우리 삶의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영원한 진리, 초월적 주재자에게 실존의 무게를 맡긴다. 따라서 “실존은 허무, 실존은 유죄라는 견해를 받아들이는 한 영원불변한 본질을 추구하려는 욕망은 인간의 역사 속에 끊임없이 출현하고 재생산된다. 인간 존재의 피할 수 없는 조건인 변화와 사멸성에 짓눌려 인간은 영원성을, 현상계에 대립하는 이데아의 세계를, 차안을 넘어선 피안을, 자연현상 배후의 법칙을 추구하는 욕망을 갖게 된다.”(진은영, 『니체-영원회귀와 차이의 철학』, 그린비)


그런데 놀랍게도 기원전 4세기의 장자는 초월자에게 매달리지 않았다. 변화를 부정하고 영원성을 갈구하지도 않았다. 결론을 먼저 말하자면 장자는 존재 외부[저 위]에서 존재를 주재하는 참주재자를 찾지 않는다. 장자는 현상계 그 자체를 사유하고 현상계 그 자체의 흐름에서 삶의 원리를 찾은 철학자이다. 그런 그에게 영원불변함은 궁극의 이상향이 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장자가 발견한 우주 만물의 참주재자는 누구일까?


길진숙(남산 강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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