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중심은 어디인가?
몸의 중심은
생각하는 뇌가 아니다
숨 쉬는 폐가 아니다
피 끓는 심장이 아니다
아픈 곳!
...
그곳으로
온몸이 움직인다
-정세훈, 「몸의 중심」
질문으로 시작해보자. 내 몸은 무엇인가? 내 몸은 어떻게 움직이고 느끼는가? 내 몸은 마음 혹은 영혼이 지배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이때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뇌에 있는가, 심장에 있는가? 아니면 온몸에 있는가? 그것도 아니라면 몸은 그저 알아서 움직이는가? 이 질문, 이른바 mind-body problem은 과거로부터 반복해서 물어져 왔다. 그런데 이러한 질문은 단지 신체에 대한 문제로 한정되지 않는다. 결국 이 몸의 ‘주인’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국가에 ‘주권’은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과 이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국가 역시 하나의 몸으로 생각한다면, 국가라는 신체에서 주권은 어디에 있는가? 대통령에게 있는가? 의회에 있는가? 아니면 헌법재판소에 있는가? 그것도 아니면 광장에 있는가?
국가를 몸이라고 하니 좀 이상한가? 하지만 신체로서 국가나 공동체를 사유하는 것은 일반적인 사유방식이었다. 조화로운 신체로서의 공동체를 상정한 플라톤으로부터 시작해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공동체를 사유한 중세의 정치사상, 군주를 중심으로 기능적·위계적으로 구성된 중세 정치사상의 기관론적 공동체, 각자의 자연권을 바탕으로 계약을 맺어 구성하는 기계적·자동적인 계약론적 사회, 이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등장한 자연적·역사적 유기체 국가, 자유로운 개체들의 집합으로서의 다중의 살로 은유 되는 탈근대적 정치사상까지. 이처럼 인간은 언제나 신체로서 공동체를 사유해왔다. 그래서 정치학에서는 이러한 신체로서의 공동체를 개인의 자연적 신체(body natural)와 구별해 바디 폴리틱(body politic)이란 말로 사용한다. 일반적으로 정치체라고 번역하지만 정치적인 몸 혹은 집합적인 신체로 바꿔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몸? 신체란 무엇일까?
아직까지도 우리가 쓰는 많은 어휘에서 이런 신체와 관련된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다. 정치체(body politic)라는 말 이외에도 조직(organization), 조합(corporation), 조합주의(corporatism), 시민적 덕성(civic virtue), 체제(regime), 헌법(constitution), 수장(head of state), 공동체 성원(member of community), 군대(armed forces), 사회 질병(social disease), 경제성장(economic growth),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 등등 많은 용어가 그렇다. 신체 은유는 단순히 죽은 은유가 아니라 현재에도 여전히 강력한 힘으로서 작동하며 정치적 담론을 규정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글을 꼼꼼히 읽은 사람이라면 여기서 질문할지도 모르겠다. 다른 건 대충 손(hand)이나 기관(organ)이나 몸(corp)과 관련된 말이란 걸 알겠는데 헌법까지? 그러나 원래 헌법을 의미하는 constitution은 말은 법체계를 의미하는 것 이외에 체질, 건강상태를 의미하는 말이기도 했다.
헌법이란 한 주어진 시기에 형성된 가시적 법의 총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또 왕이나 군주와 그 신하들 사이에 맺어져 시간 속으로, 원 시간 속으로 깊이 아로새겨진 법률적 기본법도 아니다. 역사적 상황과 견고성을 가진 어떤 것을 찾아내야 하는데, 그것은 법의 질서나 힘의 질서가 아니고, 문자의 질서나 균형의 질서도 아니다. 헌법(constitution은 체격, 체질이라는 뜻도 있다)이지만 의사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뜻, 다시 말해서 힘의 관계나 비례의 작용과 균형, 안정적인 비대칭성, 그리고 서로 부합되는 불규칙성을 의미한다. 이것이야말로 18세기의 의사들이 ‘체질(constitution)’이라는 단어를 환기할 때 쓰던 말들이었다.
─미셸 푸코, 김상운 역, 박정자 역,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224쪽
그런 점에서 네그리와 하트가 ‘constitution’을 ‘헌법’이라는 뜻으로서만이 아니라 새로운 정치적 신체의 창출을 의미하는 ‘구성’이라는 뜻으로 사용하는 점 역시 헌법의 신체성을 말해준다. 즉 정치체를 구성하는 것은 하나의 신체를 이루는 작업이며, 이 속에서 힘의 관계와 균형이 헌법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정치체를 이루는 것은 하나의 신체를 이루는 작업
따라서 정치체의 문제는 신체의 문제와 떨어질 수 없다. 앞서 본 정치사상의 변화가 의학에서 신체를 보는 관점과 시기적으로 정확히 겹쳐진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묘하게 닮아있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즉 앞서 정치사상의 변화와 의학사에서 히포크라테스의 전일적 신체와 갈레노스의 신체, 베살리우스와 데카르트로 이어지는 기계론적 신체, 하비의 심장 중심의 순환론적 신체, 피르호의 세포 국가론과 생기론에서의 생명에 대한 관점, 면역이론과 뇌과학 등의 현대 의학으로의 변화는 떨어져 생각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떤 정치체를 상상하는가의 문제는 어떤 신체를 모델로 하는가와 관련된다. 역으로 어떤 신체를 모델로 하느냐는 어떤 정치체를 상상하는가와 관련된다. 그런 점에서 ‘사유’의 대상으로서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le politique)과 ‘과학’의 대상으로서 정치(politics/la politique)를 구별한 르포르(Claude Lefort)가 참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정치’가 객관적 실재에 대한 경험적, 규범적 연구라고 한다면 이와 달리 ‘정치적인 것’에 대한 사유는 사회적 공간을 형태화(mise-en-forme)하는 원칙들을 드러내는 상징적인 것이라 말한다. 정치적인 것이란 어떤 사회가 집합적 단일체로 표현, 연출되는 방식(mise-en-scène)과 그것이 정당성을 얻기 위한 의미 부여(mise-en-sens)라는 상징적 과정 자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르포르의 말을 빌려 말하자면 결국 집합적 신체를 어떻게 상징, 구상하는가의 문제는 인간들이 그들 스스로 그리고 세계와 맺는 관계들의 원칙인 ‘존재론적’ 조건을 결정짓는 문제로, 현실정치가 작동하기 위한 조건 혹은 전제를 다루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집합적 신체를 꿈꾸는가. 지금의 우리들의 신체는 어떤 상태인가야말로 가장 정치적인 질문이다. 하지만 이에 대답하기에 앞서 우선 우리의 바디 폴리틱이 어떻게 역사적으로 구성되었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지금의 우리를 만든 과거의 우리를 보지 않고서는 이에 대한 실마리를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앞으로 연재할 글은 북드라망에 연재했던 <몸과 정치>(http://bookdramang.com)의 ‘근대 동아시아’ 버전이라 할 수 있다. 근대 동아시아에서 몸을 통해 정치를 사유했던 과정의 역사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조금은 딱딱한 이야기가 될 수도, 조금은 지루한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신체를 바꾸는 것이 정치체를 바꾼다는 발상의 전환이야말로 아무런 정치적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대에 새로운 출발점이 될지 모른다. 그리고 이것이 어떻게 역사적으로 구성되어 왔는지를 보는 것은 그 첫걸음일 것이다.
우리는 어떤 집합적 신체를 꿈꾸는가
글_김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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