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몸인가
“실상 내 몸은 언제나 다른 곳에 있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다른 곳들에 연결되어 있다.
사실대로 말하면 그것은 세계 속에 있는 만큼이나 다른 곳에 있다.
그것 주위로 사물들이 배치되어 있으며,
그것과의 관계 속에서-마치 절대군주와의 관계처럼-
아래, 위, 오른쪽, 왼쪽, 앞, 뒤, 가까운 것, 먼 것이 있기에 그렇다.
몸은 세계의 영도이다.
여러 갈래의 길과 공간들이 서로 교차하는 이 영도에서 몸은 아무 데도 없다.
그것은 세상의 중심에 있다.”
─미셸 푸코, 이상길 역, 『헤테로토피아』, 36~37쪽
푸코라는 시작
정치를 말한다면서 왜 몸인가? 우선 정치학에서 다루는 주제가 신체의 문제와 떨어질 수 없음은 많은 학자가 지적해왔다. 신체와 정치, 생명과 정치의 단초를 열었던 사상가는 단연 푸코라 할 수 있다. 푸코는 전반기의 그의 작업에서 권력이 어떻게 개인의 신체에 영향을 미치는가를 분석한다. 후반기에 들어서면서는 약간 결을 달리해 생명 정치라는 개념을 들고 나온다. ‘통치성(govermentality)’이라는 개념에 주목하며 생명이 권력과 어떻게 연계되는가를 밝히는 후반 작업이 그것이다. 잘 알다시피 생명 정치라는 개념이란 기존의 죽이는 권력에서 살리는 권력으로, 즉 사법 권력 내지 규율권력에서 안전권력으로의 이동을 이야기한 것이었다. ‘죽게 만들고 살게 내버려 두는’ 권력에서 ‘살게 만들고 죽게 내버려 두는’ 권력으로의 변화. 이는 근대의 생명 권력의 특징으로 이제 권력은 개인의 신체에 집중된 기술인 해부 정치(anatomo-politics)에서 생명 전체를 관리하는 생명 정치(biopolitics) 차원으로 변한다.
“규율적이지 않은 이 새로운 권력의 기술이 적용되는 곳은 신체를 겨냥한 규율과는 달리 바로 인간의 생명입니다. 혹은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이 새로운 권력의 기술은 인간-신체가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 살아있는 인간 존재를 겨냥합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인간-종입니다. … 18세기 동안에 수립된 인간 신체에 관한 해부-정치 이후, 19세기 말에는 더 이상 인간 신체의 해부-정치가 아니라 제가 인간종에 대한 ‘생명 정치’라 부르는 것이 등장합니다.”
─미셸 푸코, 김상운 역,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291쪽
이는 ‘인간이라는 종의 근본적으로 생물학적인 요소를 정치, 정치적 전략, 그리고 권력의 일반 전략 내부로 끌어들이는 메커니즘의 총체’를 규명하고자 하는 시도였다. 그러나 푸코는 생명 정치라는 주제에 대해 더 이상 구체적으로 논의를 전개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그에게 생명과 권력의 문제가 모호하게 남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푸코가 생명과 정치를 두 개의 다른 항으로서 각각을 따로따로 전제하고, 그런 연후에 양자를 외재적으로 결부시켜 버리는 데서 발생한다. 이 때문에 푸코의 생명 정치는 삶에 대한 주권의 과잉적인 행사로 여겨지거나(아감벤), 그렇지 않으면 주권에 대한 생의 과잉적인 잠재력으로 여겨지거나(네그리) 정반대의 방향으로 분열되게 된다. 바꿔 말하자면 생명 정치는 삶에 대한 절대적인 권력 위에 해소되어 버리든가, 그렇지 않다면 생의 절대적인 힘에 흡수되어 버리든가 한쪽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푸코가 미해결인 채로 남긴 아포리아였다.
쌍생아 아감벤과 네그리
이처럼 현대 정치철학에서 푸코의 생명과 권력의 논의를 이어받아 전개하고 있는 논의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뉘어 전개되었다. 묵시록적 논의로 빠진 아감벤과 긍정적 논의에 서 있는 네그리가 이들이다. 아감벤은 단순히 살아있는 생명으로서 조에(zoē)와 특수한 삶의 형태를 가리키는 생명으로서 비오스(bíos)를 구별한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적 도식 하에서 ‘벌거벗은 생명(homo sacer)’인 조에는 언제나 주권의 예외상태(ex-ceptio)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가 보는 주권이란 결국 생살여탈권에 노출되어 있는 생명을 배제-포함하는 장치였다. 이는 20세기 포로수용소나 나치 국가로 이어지는 생명을 다루는 권력의 양상을 보여준다. 아감벤에 의하면 전체주의는 단지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주권의 ‘본질’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수용소란 역사적 장소나 한정된 공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벌거벗은 생명이 생산되는 모든 공간을 일컫는다. 아감벤은 이처럼 생명에 주권이 개입하는 방식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죽음의 가능성을 매개로 주권 앞에 생명 자체가 놓임으로써만 생명은 정치화된다.
또 다른 흐름으로 네그리의 논의가 있다. 그의 정치철학은 들뢰즈, 보다 기원적으로는 스피노자의 정치철학에 기대고 있다. 그는 “다중은 하나가 명령하고 나머지들이 복종하는 정치적 신체라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을 지배하는 살아있는 ‘살(flesh)’”이라고 파악하며 무정형의 다중들의 힘을 강조한다. 주권 논리가 기반하는 명령하는 머리와 복종하는 사지라는 위계적 신체정치에 대한 안티테제로 그는 ‘다중(multitude)’에 주목한다. 이 다중들이 구성하는 것이 기존의 국가(Commonwealth)를 넘어서는 공통된 신체로서의 ‘공통체(common-wealth)’이다. 이는 결국 참수 모델처럼 단순히 기존의 머리를 제거한다고 해서 새로운 정치체를 구성할 수 없다는 생각과 관련된다. 새로운 정치체란 그런 점에서 머리를 구성하는 것이 아닌 개체들의 꼬뮨으로서의 신체, 살의 모델이 된다. 이처럼 스피노자-들뢰즈-네그리의 흐름은 어떤 신체적 강도 하에서, 어떻게 결합하느냐에 따라 국가적인 것을 넘어서 탈주권적 정치체를 구성할 수 있다고 파악한다.
이 둘의 논의는 분명 푸코에게서 보이는 생명과 신체라는 논의의 연장선에서 각각의 해방의 기획 속에서 문제의식을 끌어와 이 둘을 연결시켜 사유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 현대 정치 철학적 논의들이 갖는 실천론적 함의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 정치적인 것으로서 신체 그 자체의 의미에 대한 역사적 접근은 결여되어 있다. 아감벤류의 묵시록적 논의에서 생명 정치는 죽음 정치(thanatopolitic)로 전개될 수밖에 없으며, 신체는 주권의 대상으로서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채로밖에 존재하지 못한다. 반면 네그리류의 낙관론적 논의에서 신체정치는 가능성/잠재성이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 논의에 머물러 있다. 신체들이 공통적인 것을 구성함으로써 탈주권적 정치신체를 구축할 수 있다는 논의를 인정하더라도 이것이 왜 현실에서는 항상 잠재적인 것으로 머무를 수밖에 없는가.
신학(神學) 정치에서 신학(身學) 정치로
결국 이는 이론적 논의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실제 정치적인 것을 사유해왔던 신체정치의 역사 속에서 이야기되어야 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신체로서의 정치적인 것이 어떻게 구성되었고, 그것이 만들어지는 배치와 효과는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이는 어떤 신체적 사유에 기반을 두고 있는가와 함께. 결국 아감벤과 네그리, 그리고 푸코조차도 놓치고 있는 것은 신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일지 모른다.
슈미트가 신학 정치의 모델에서 주권을 예외상태를 결정하는 힘으로서 정의한 것을 원용한다면 신체정치 모델에서 주권이란 이 집합적 신체를 구성하는/움직이는 힘으로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때 신체로서 은유된 정치체란 단순히 예외상태로서의 주권이나, 다중의 살아있는 신체만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주권의 다양한 존재 방식들을 보여주는 재현/표상이자, 공동체라는 신체 안에 내재한 힘들이 다투는 장이다. 그런 점에서 슈미트가 근대적 주권이란 모두 신학(神學) 개념에서 나왔다고 주장한 것을 패러디해 또 다른 신학 정치라는 틀도 가능할 것이다. ‘신학(身學)-정치’. 이제 의학사를 정치적으로 살펴보기, 정치사상사를 의학적 시선으로 다시 보기, ‘의학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사이’를 가로질러 살펴보는 작업을 시작해 보자.
글_김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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