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이란 무엇인가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새뮤엘 스마일즈, 『자조론』
‘생명’이라는 말의 등장
몸, 신체란 무엇인가에 대한 사유방식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늘 변하기 마련이다. 앞서 살펴보았던 해체 신서와 양생훈의 차이는 이를 보여준다. 외부의 영향 속에서 자유로운 신체, 관계에서 떨어져 나온 독립된 신체, 그럼으로써 탄생하는 지켜야 할 몸이라는 관념. 이처럼 우리가 사유하는 몸이란 하나의 고정되고 객관화된 실체가 아니라 세계관에 따라 늘 끊임없이 변화하고 구성되는 산물이다.
생명이란 개념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가 흔히 쓰고 있는 생명이라는 말은 근대 들어와서 번역과정을 통해 새롭게 등장한 말이다. 물론 이전에 생명이란 말 자체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생명(生命)이라는 말은 원래 하늘로부터 받았던 명(命), 즉 ‘수명(壽命)’을 의미하는 한자어였다. 이는 고대로부터 사용되어왔던 ‘성명(性命)’과 거의 동의어로 쓰였다. 그러다가 생명이라는 말이 본격적으로 널리 쓰이기 시작한 것은 메이지 시기로, ‘life’의 번역어로서 등장한다. 그렇다면 이때 번역어로서 생명이 등장하면서 이 말이 어떻게 쓰였는지 살펴보는 것은 의미 있는 작업일 것이다.
‘생명’이란 말이 번역어로서 언제 처음 등장했는가는 분명하지 않지만, 이 시기 많이 읽혔던 책인 『자조론』 중에 생명이라는 말이 등장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제1권에서 “인민의 ‘생명’을 보호하고, 인민 자주의 권을 보호”한다는 대목이다. 이때 생명이라는 말은 ‘life’의 번역어다. 요즘은 ‘생활’로 번역하는 편이 일반적이지만, 신으로부터 동등하게 받은 ‘생명’이기에 인간은 평등하다는 그리스도교의 생명관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 생명이라는 번역이 타당한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생명이란 무엇인가? 이 책은 새뮤엘 스마일즈(Samuel Smiles)의 『Self Help』(1859)를 나카무라 마사나오(中村正直)가 『서국입지편 원명 자조론(西國立志編 原名 自助論)』(1871)이라는 제목으로 번역한 것이었다. 당시 스마일즈의 『Self Help』는 영국에서 첫해 2만 부가 팔리고 도합 30만 부가 팔릴 정도로 엄청난 베스트셀러였다. 일본에서도 이 번역본은 백만 부 이상이 팔릴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또한 다이쇼 시기에도 새로운 번역본들이 줄을 이었고 현대에도 판을 거듭하여 새로이 번역되고 있다. 이러한 일본에서의 『자조론』의 인기가 중국과 조선에서도 분 것은 물론이다. 이른바 ‘자조’의 시대가 된 것이다.
“Heaven helps those who help themselves”라는 유명한 격언이 말해주듯이 이 책은 자조야말로 새로운 시대의 정신임을 밝힌 것이었다. 즉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말은 이제 하늘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이 열심히 노력하라, 그러면 하늘이 도와줄 것이라는 의미다. 여기서 하늘은 물론 신을 의미한다. 이것이 하늘, 즉 천(天)의 원리로 받아들여진 것이 동아시아에서도 히트를 치게 된 하나의 원인일지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자조의 정신 속에서 보이는 바이다. 이제 우주적 신체에서 개인은 하나의 독립된 단위로서 구별된다. 아니 되어야 했다. 무엇보다 자신이 스스로 노력해야 하늘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발상 자체는 앞서 본 양생훈에서 시작을 “사람의 몸은 부모를 근원으로 하고 천지를 시작으로 한다. 천지와 부모의 은혜를 받아 태어났고 또 길러진 몸이니 자신만의 소유물이 아니다. 천지로부터 받은 것, 부모가 남겨준 몸이므로 삼가 잘 기르고 상처 입지 않도록 하여 천수를 길게 유지해야 한다”라는 전통적인 세계관과 이질적이다. 이제 생명이란 자조, 자유, 독립과 떨어질 수 없는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 근대라는 새로운 시기 새로운 신체관과 새로운 정치사상은 하나로 결합해 등장하게 된다.
‘자조’의 정신
물론 이것만으로 개인의 self-help 개념을 설파하는 스마일즈의 저서가 동아시아에서도 그토록 유행했다는 사실이 언뜻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 책은 오히려 자본주의적 가치를 체화한 개인의 자구 노력에 강조점이 있기 때문이다. 아직 ‘개체적’인 것에 익숙지 않았던 일본에서 자조론이 당시에 그토록 유행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 열쇠는 역자 서문에서 발견된다.
“이 책을 번역함에, 지나가는 손님 중 물어보는 자가 있었다. 당신은 어째서 병서를 번역하지 않느냐고. 내가 대답하기를 당신은 병이 강하면 즉 나라에 의지할 수 있고 치안이 이루어진다고 하겠는가. 서국의 강함은 병에 있다고 하겠는가. 그렇지 않다. 서국의 강함은 인민이 돈독히 천도(天道)를 믿기 때문이다. 인민에게 자주(自主)의 권이 있기 때문이다. 정치가 관대하고 법이 공평하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은 싸움을 논하며 말하길, 덕행의 힘은 신체의 힘에 열 배라고 하였으며, 스마일즈가 말하길 나라의 강약은 인민의 품행에 관계한다고 했다.”
─나카무라 마사나오 역, 『서국입지편』(1981), 39쪽
나카무라는 『서국입지편』 서문에서 왜 병서를 번역하지 않느냐는 물음에 병(兵)이 강하다고 치안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답한다. 그는 서국의 강함이 진정 병에 의한 것이냐고 되물으면서 일반적으로 그렇게 생각하기 쉽지만 서국의 강함은 인민이 돈독히 천도(天道)를 믿는 것에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덕을 통한 정치인 ‘왕도(王道)’와 힘을 통한 정치인 ‘패도(覇道)’를 대비하는 맹자식의 논의와 유사한 면을 보인다. 나카무라가 ‘인자무적(仁者無敵)’과 같은 고사를 인용하며 위와 같은 논리를 뒷받침하고 있는 것은 분명 그가 유학적 세계관 속에서 이를 해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나카무라는 이어서 서국의 강함의 핵심은 ‘인민’에게 ‘자주의 권’이 있기 때문이라 말한다. 나폴레옹과 스마일즈의 말을 빌려 덕행과 인민의 품행이야말로 진정한 강함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어떤 논리적 비약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가 강함을 덕성과 관련해 설명한 것은 전통적인 사상에 비춰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카무라는 나라의 강함을 인민 개개인의 자주권과 연결시켜 설명한다. 지금 우리들의 생각으로는, 그리고 나카무라 본인의 논리 속에서는 완결적이라고 생각할 수는 있으나, 이는 중간에 어떤 논리적 연결고리가 없다면 당시에는 당연한 추론이라 보기 힘들다. 맹자가 진정한 강함과 덕이 연결된다고 말할 때 그것은 패도로 인한 지배가 인(仁)을 거짓으로 빌려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진심으로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힘이 없어 복종한 것이기 때문에 오래 지속될 수 없다. 따라서 진정한 강함이란 인의(仁義)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카무라는 이러한 관점이 아니라 인민의 자주를 나라의 강함의 조건과 연결짓는다. 인민들 개개인이 자주, 즉 자조의 정신을 지니고 독립했을 때만이 국가가 강해질 수 있다는 논리는 당시로서는 특이한 사유였음이 분명하다. 무엇이 이러한 사유를 낳았을까. 나카무라가 영국 유학을 중간에 마치고 돌아올 때 그와 절친했던 험프리 프리랜드로부터 선물로 받아 배 안에서 읽으며 절반을 외울 정도로 빠져들었던 책이 바로 스마일즈의 『Self Help』였다. 번역서의 제목이 말해주고 있듯이 서양은 어떻게 뜻을 세웠는가[西國立志]라는 물음, 이는 당대 사람들에게 서양은 어떻게 그토록 강한가라는 물음이었을 것이다. 나카무라의 머릿속에서는 이 둘의 가치, 즉 현실에서의 서양의 강함과 서양 인민들이 뜻하는바 ‘self-help’라는 가치를 연결지어 사유하고 있다.
메이지유신이 성공했지만 구체적인 삶의 방침이 아직 명확하지 않았던 일본인들에게 자조론은 유교를 대신할 수 있는 도덕이라고 평가되었다. 단지 권위 앞에서 복종하는 인민만을 대했던 전통 시대의 윤리와 달리, 새로운 가르침이 필요했다. 이는 독립된 개체들이 스스로 프로그램을 만들어 하나의 주체로서 서게 될 때 가능했다. 이 과정에서 개체들은 자조, 자유, 독립이라는 덕목 속에서 낱낱으로 분리되어야 했다.
자주 자립하는 개체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속담은 확연히 경험에 맞는 격언이다. 이 한 마디가 널리 인사의 성패 여부를 포장(包藏)하고 있다. 스스로 돕는다는 것은 능히 자주자립(自主自立)해 타인의 힘에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 스스로 돕는 정신은 무릇 사람된 자의 재지(才智)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바의 근원이다. 이를 미뤄 말한다면 스스로 돕는 인민이 많다면 그 방국(邦國)도 반드시 ‘원기충실(元氣充實)’하고, ‘정신강성(精神强盛)’하게 된다. 타인으로부터 도움을 받아 성취한 것은 그 후 반드시 쇠하게 된다. 그런데 스스로 도와 이룬 바의 것은 반드시 생장해 막힘이 없다. 만약 내가 타인을 위해 도움을 많이 베푼다면 반드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가 노력하는 마음을 감소시키게 된다. 이 때문에 사부가 엄한 것은 그 자제의 자립의 뜻을 방해하는 것으로서, 정법의 군하를 억압하는 것은 인민으로 하여금 부조를 잃어 세력을 결핍하게 만든다.”
─中村正直(1981), 55∼56쪽
여기서 나카무라는 원문의 ‘self-help’를 ‘능히 자주 자립해 타인의 힘에 의지하지 않는 것’으로 풀고 있다. 이때 ‘스스로 돕는 정신’이야말로 무릇 사람된 자의 근원이 된다. 즉 나카무라에게 개체적인 것이란 자신의 능력을 바탕으로 자주 자립하고, 타인의 힘에 의지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한발 더 나아가 타인을 위해 도움을 많이 베푸는 것 역시 타인의 자립 뜻을 방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금지된다. 스승이 엄하면 제자의 자립을 방해하게 되고, 정치에서 억압이 심하면 인민이 부조를 잃어 세력을 결핍하게 만든다.
여기서 나카무라는 맹자식의 ‘조장(助長)’ 개념을 떠올렸을지 모른다. 맹자에는 다음과 같은 고사가 전해진다. 송(宋)나라 어느 농부가 논에 심은 벼의 모가 빨리 자라지 않자 안타까워하다가 결국 자라게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하고 논에 나가 모를 하나씩 잡아서 살짝 들어 올려 키를 높여주었다. 다음날 보니 논의 모는 모두 말라 죽었다는 이야기다. ‘스스로 도와 이룬 바의 것은 반드시 생장해 막힘이 없다’는 식으로 스마일즈의 ‘self-help’를 이해한 나카무라에게서 맹자식의 발상이 엿보인다.
그러나 여기서 타인과의 관계성이 부정되고 개체성이 강조되는 것으로서 자조 개념이 강조됨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결국 ‘자조’란 ‘자유’를 구가할 수 있는 조건이었고, 이것이 나라의 부강을 만들어내는 조건이었다. 또한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 모든 일을 해나간다는 의미에서 ‘자주’와 연관되며, ‘독립’해야만 하는 주체를 만드는 작업이었다. 후쿠자와 유키치 역시 『서양사정』(1866)에서 서구 정치의 핵심 6가지를 들면서 그 첫 번째로 자유를 들고 있다. 그는 자유에 관해 설명하며, 각인이 자기의 천부의 ‘재력’을 방해받는 일 없이 ‘펼치는’ 것이라 말한다.
“하늘이 사람에게 생(生)을 주었다면 또 따라서 그 생을 보호해야 할 재력(才力)을 주었다. 그런데 만약 사람이 그 천부의 재력을 활용하는 데 신체의 자유를 얻지 못한다면 재력 또한 쓸 수가 없다. 그러므로 세계 어떤 나라인지, 어떤 인종인지를 불문하고 사람이 스스로 그 신체를 자유로이 하는 것은 천도의 법칙이다. 즉 사람은 그 사람의 사람으로서 마치 천하는 천하의 천하라는 것과 같다. .. 하늘로부터 부여된 자주자유(自主自由)의 통의(通義)는 팔 수도 살 수도 없는 것이다.”
─후쿠자와 유키치, 『서양사정(西洋事情)』, 392쪽
여기서 생이라 번역한 것 역시 life의 번역어였다. 하늘이 사람에게 생명을 주었다면 그 생명을 보호해야 할 능력 역시 주었을 것이다. 그 능력에 따라 사람은 신체의 자유를 통해 생명을 유지해 나간다. 이제 사람이 ‘스스로’ 신체를 자유로이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사람됨을 이루기 위한 조건인 것이다. 각자가 신으로 부여받은 ‘capacity(才力)’ 내지 ‘power(氣力)’가 생명을 사유하는 핵심이었다. ‘자조’가 ‘자유’로 이어지는 것이다. 후쿠자와는 이후 『학문의 권장』에서 본격적으로 ‘일신의 자유’에 대해 논한다.
“미국의 웨일랜드라는 사람이 쓴 『모럴 사이언스』라는 책에서 사람의 신심의 자유를 논한 바 있다. 그 논의의 대의는 사람의 일신은 타인과 서로 분리[相離]되어 하나[一人前]의 전체를 이루고, 스스로 그 몸을 다스리고, 스스로 그 마음을 쓰고, 스스로 ‘일인(一人)’을 지배하여 할 일을 해나가는 것이다. 따라서 첫째 사람에게는 각자 신체가 있다. 신체로서 외부의 사물에 접하고, 그 사물을 취함으로써 자신이 바라는 바를 달성한다. 비유하면 씨를 뿌려 쌀을 거두고 면화를 따 의복을 만드는 것과 같다.”
─후쿠자와 유키치, 『학문의 권장』, 73쪽
이는 웨일란드의 “모든 인류는 체질상 분리되고, 별개인 완벽한 시스템으로, 자치의 목적에 적합하며 그의 힘들을 사용하는 방법 역시 완전히 신에게 책임이 있다. 따라서 모든 개인은 몸을 소유한다.(Every human being is, by his constitution, a separate, and distinct, and complete system, adapated to all the purposes of self-government, and responsible, separately, to God, for the manner in which his powers are employed. Thus every individual possesses a body)”라는 말을 번역한 것이었다. 이제 개인은 타인과 서로 분리되어 스스로 지배하는 주체로서 상정된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individual에 해당하는 것을 사람[一人]으로 번역하며 개인, 개체적인 것의 의미를 담아내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타인과의 분리, 하나[一人前]의 전체, 스스로 그 몸을 다스려 일인을 지배한다는 말에 있다. 이제 생명은 하나의 분리된 개인의 차원으로 재조정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글_김태진
'몸과 정치1 > 몸과정치2'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상생(相生)’하는 신체 (0) | 2018.01.04 |
---|---|
사회라는 몸 (0) | 2017.12.07 |
면역체로서의 몸 (2) | 2017.11.09 |
자연으로서의 몸 (0) | 2017.08.24 |
몸, 내부를 말하다 (0) | 2017.08.10 |
[몸과 정치] 왜 몸인가 (0) | 2017.07.1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