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네스코 『외로운 남자』
인생에 필요한 것은 약간의 용기
나이 서른다섯이면 인생 경주에서 물러나야 한다. 인생이 경주라면 말이다. 직장 일이라면 나는 신물이 났다.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였으니 이른 편도 아니었다. 예기치 못했던 유산을 물려받지 않았더라면 난 권태와 우울증으로 죽고야 말았으리라.
- 외젠 이오네스코 지음, 이재룡 옮김 『외로운 남자』, 7쪽
이른바 평균수명 100세 시대다.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는 무의식적인 착각 중 하나가 있는데 평균수명이 늘어난 만큼 '성숙한 인간'으로 사는 시기도 그만큼 길어질 것이라는 착각이 그것이다. 이를테면 20살이 되면 성인이 되고, 24~25살이면 앞가림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며, 제 앞가림을 하면서 무려 70여년을 더 살게 된다는 식이다. 그런데 (자기 자신을 보거나, 주변 사람들을 보거나) 보다시피 그렇게 되질 않는다. 30살이 되어도 '미성숙'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심하면 40살이 되어서도 '자립'과는 무관한 삶을 살 수도 있으며, 60세쯤 되면 누구나는 아니더라도 꽤 많은 사람이 '노인의 지혜' 같은 아이템을 하나씩 가지고 있을 것 같은데 요즘 60살은 말그대로 (제2의)'청춘'이나 다름 없다. 기대 수명이 늘어났다는 것은 (젊은 시절이 오래가는 것이 좋으냐, 성숙한 시절을 더 오래 보내는 것이 좋으냐에 따라 다르지만) '좋은 시절'이 더 보태어지는 것이라기보다는 늘어난 시간에 맞춰 인생의 각 국면들이 비슷한 비율로 함께 늘어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오네스코가 소설을 쓴 1973년, 소설의 배경으로 보이는 1960년대 말, 사람들이 느꼈던 '나이'에 대한 감각과 지금 우리의 감각 사이에는 적게는 20년 많게는 30, 40년 어치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소설의 첫문장에 나오는 '서른다섯'의 나이는 지금의 50대 중반 정도가 아닐까 싶다. 그렇지만, 딱 그렇다고도 할 수 없는게, 사실 요즘에도 '서른다섯' 쯤 되면 '직장 일'에 '신물'이 나는 경우가 비일비재 하다는 점이다.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어려지면서 빨리 늙고 있는 셈이다. (어떤 점에서 어린아이 같은지, 어떤 점에서 빨리 늙고 있는지 생각해 볼 문제다.)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한 것은 아니니까 얼른 '소설'로 들어가보자.)
_ 구스타브 카유보트 [파리의 거리, 비오는 날]. 처음보는 얼굴, 알지 못하는 사람들. 사람들로 가득찬 거리에서 느끼는 '고독감'.
『외로운 남자』는 제목 그대로 '외로운 남자'의 이야기이다. 박진감 넘치는 전개도 없고, '흥미'를 잡아끄는 요소들도 별로 없으며, 읽으면 읽을수록, 주인공에게 이입하면 이입할수록 답답한 마음이 가시질 않는 그런 이야기다. 주인공 '남자'는 먼 친척에게 유산을 상속받았다. 그는 이제 일을 하지 않아도 생존할 수 있게 되었다.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삶'은 생각만 해도 달콤하다. 사실 '근대'의 노동체계는 수많은 작품들에서 언급된 것처럼 '시간'을 두고 벌어지는 '거래'에 다름 아니다.(노동가치론도 노동력을 '노동시간'에 근거해 계산하고, 널리 읽는 소설 『모모』에서도 '회색신사'들은 사람들의 '시간'을 사러 돌아다닌다.) 여하튼 그는 '유산' 덕에 '시간'을 얻었다. 그는 갑자기 생긴 '시간'을 어떻게 쓸까? 집에 전화를 설치하고, 애인을 만들고, 마음에 드는 식당을 찾아 식사를 한다. '밖으로' 나가는 국면이다. '밖'에서 그는 무얼 느꼈을까?
내가 보았던 모든 길과 도시, 거리, 그리고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을 잊기 위해 정신을 집중하려고 애썼다. 나는 이 세상에 던져졌고, 그런 사실을 마치 난생처음 안 사람처럼 새삼스레 깨달았다. 가끔 느끼곤 하던 세상의 이러한 생소함을 다시 느끼고 싶었다.
- 같은 책, 48쪽
나만이 유일하게 존재한다. 다른 이들이 지나가고 사라짐에 따라 나는 현실일 수 없는 이 소용돌이 속에서 나의 유일함을 느낀다. 현실이란 내가 채우는 일종의 빈 공간이 되었다. 그것은 행복한 자아의 확장이었고, '이 모든 것들'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듯이 느껴질수록 나의 존재에 대한 확신이 더욱 굳어졌다.
- 같은 책, 49쪽
이렇게 되었다. '밖'으로 나간 주인공 화자는 '밖'이 거대한 '제한선' 또는 '자아'가 나갈 수 있는 '한계점'처럼 다가오는 것을 느낀다. 극단적이지만, 이런 반응은 몹시 상징적이다. 우리의 '바깥'은 어떤가?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움직이고 말하는 가로등이나 가로수와 큰 차이가 없다. 요즘은 스마트폰 덕에 길을 묻지도, 물어오는 경우도 드물다. '도를 아십니까'나 그와 비슷한 전도활동의 대상이 되었을 때의 '반응'을 보면 '바깥' 사람들의 '타자성'이 어떤지 대략 알 수 있다. 같은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라면 갑작스러운 그들의 '말걸기'는 정말이지 낯설고, 좀 더 심하게 말하자면 '괴이'하기까지 하다. 알지 못하는 사람(바깥의 사람)이 말을 걸어오는 것 자체가 일종의 '공포'가 된 세상이다. 주인공 화자가 이 국면을 지나, '고립'을 강화하는 흐름으로 가는 것은 그래서 자연스럽다. '나만이 유일하게 존재한다', '나의 존재에 대한 확신이 더욱 굳어졌다'는 표현 속에 깃든 '자기애'는 '고립'과 '단절'로의 이행을 예비하고 있는 셈이다.
스스로 선택한 '고립' 속으로 더욱 '고립'되어 가는 주인공에게 질려버린 '애인'도 떠나고, 외출의 횟수는 점점 줄어간다. 어쩌다가 다시 나간 바깥에서 큰 규모의 시위대 속에 휘말려버린 후 그는 아예 밖에 나가는 것을 멈춰 버린다. 그 휘말림 속에서 그는 '소멸'의 공포를 느낀 것이다. '시위대'는 사실상 절대적 타자나 다름없었다. '절대적 타자'는 곧 '죽음'이다.
나는 그들이 죽음을 극복할 수 없어서 서로 죽인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들이 서로 죽인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달려들어 밀어붙인다.
- 같은 책, 128쪽
이와 같은 공포를 체험한 후에 그는 모든 것을 정지시킨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유산'을 통해 그가 얻은 것은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타자'에 대한 공포 속에서 그는 그 '시간'마저 정지시키고 만다. 집으로 들어가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를 정도의 오랜 시간을 흘려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물려받은 '유산'은 '삶의 무의미'로 전환되고 있다. 짐작해 보건데, 이오네스코에게 인생은 '신물이 나는 일'의 연속이거나, '무의미'가 아니었을까?
당연하게도 주인공 '남자'의 삶은 권장할 만한 삶이 아니다. 차라리 여기서 읽어야 할 점은, 뭐랄까 거스르는 게 제거된 삶, 상극이 없는 삶이 가져올 황폐함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나에게도 그렇고, 당신에게도 그렇고 현관 밖은 타자들이 활보하는 세계, 공포의 장이 되어버렸다. 이 바깥이 두려워서 집 안의 세계를, 내면의 세계를 계속 확장해 간다면 삶의 '역량'은 끊임없는 추락을 겪게 될 것이다.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은 소설에서 처럼 단순한 '무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어쩌면 극단적인 '증오'가 될 수도 있고, 걷잡을 수 없는 '폭력'이 될 수도 있으며, 죽음을 두려워한 나머지 죽음을 향해 질주하는 이상 욕망의 폭발이 될 수도 있다. 심지어 우리는 매일 쏟아져 나오는 뉴스 속에서 그런 증오와 폭력, 변태성을 목도하고 있다. 그런 것들 덕에 더욱 안으로 말려들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해서는 상태만 더욱 악화될 뿐이다. 악화를 넘어서려면 방법이 없다. 삶의 네트워크를 재생시키는 수밖에. 방법은 다양할 수 있다. 어쨌든 '고립'되지 말자. 약간 용기를 가져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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