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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의 소설, 또는 보르헤스가 말하는 ‘문학’

by 북드라망 2017. 6. 26.

보르헤스의 소설, 또는 보르헤스가 말하는 ‘문학’



보르헤스의 소설작품들은 어렵다. 아니 ‘낯설다’라고 말하는 편이 더 맞을지도. 20세기에 나온 그 소설들은 여전히 ‘미래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보르헤스가 체험한 문학의 시간에 비해 일상적인 개인들의 시간이 훨씬 더 이전의 시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리하여서 보르헤스가 ‘미래’라고 지시했던 그 시간은 앞으로 다가올 시간이 아니라, 영영 따라잡을 수 없는 시간이 되었다. 실제로 일하고, 먹고, 자면서 살아가는 ‘일상적 시간’은 영영 ‘과거’에 갇혀있는 시간이 되고 만다. 여기에 ‘미래’는 오지 않는다. 아니, 미래도 ‘과거’로만 체험된다. 



보르헤스의 소설은 그렇게 영영 오지 않을 시간, 온 적이 없는 시간을 다루기 때문에 낯설고 어렵다. 어쩌면 그 낯설고 어려운 것이 그 작품들이 가진 ‘매력’의 중추를 이루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래서 차라리, 보르헤스가 ‘문학’을 말하는 책들을 읽는 것이 더 즐겁다. 그런 책들 속에서 독자는 보르헤스를 ‘동시간대’에서 만날 수 있다. 


『보르헤스, 문학을 말하다』가 정확하게 그런 책이다. 비슷한 느낌의 『칠일밤』보다도 더 쉽고 재미있게 읽힌다. 그건 그렇고, 어쨌든 ‘자신을 잊어버리지 않고 말하는’ ‘보르헤스’를 읽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제가 글을 쓸 때, 저는 제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잊고자 합니다. 저는 개인적인 상황들에 대해 잊습니다. 저는 한때 그랬듯이, ‘남아메리카 작가’가 되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저는 꿈이 무엇인가를 전달하려고 그저 애쓸 따름입니다. - 159쪽


그의 소설 속에서 흐려진 작가의 정체성(허구와 사실이 섞여버린)을 비교적 온전히 붙들고 읽을 수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조금 덜 당혹스럽다. 


‘당혹’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는데, 보르헤스는 ‘당혹감’이 문학을 낳는 것이라고 말한다. 작가가 직면한 세계에 대한 당혹스러움, 다시 말해 작가는 모든 문제에 답할 수 있을 때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아무 것도 답할 수 없을 때 그 당혹감을 안고 글을 써가는 사람인 셈이다. 보르헤스의 작품들이 여전히 미래적이라고 한다면, 그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 아닐까? 여전히 답할 수 없는 당혹감, 사라진 확실성에 대한 불안감 같은 것들이 여전히 그의 작품 속에 폭탄처럼 해체되지 않은 채 내장되어 있다는 이야기다. 그걸 넘어, 이 ‘세계’가 이제는 확실성이 아니라, 대안마저 상실해 버렸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여전히 보르헤스의 작품들에, 보르헤스 자신을 미래적으로 ‘생산’하고 있다. 

 



이렇게 불안한 세계에도 여전히 축복이 있다. 바로 그 상황이 아니면 안 되는, 읽을 수 없는 텍스트들이 있는데, 보르헤스의 글과 말도 그런 텍스트들 중에 하나다. 당연히 세계를 확실하게 만들 수 있는 진리 같은 것은 없다. 더불어 있었던 적도 없다. 그래서 문제는 각자가 세계를 어떻게 생산하느냐 하는 것인데, 보르헤스는 커다란 보고다. 여전히 ‘끝없이 펼쳐진 미로’를 완전히 소진시켜버리고 싶은 충동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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