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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하고 인사하실래요 ▽/씨앗문장

『루쉰, 길 없는 대지』 - 집착 없이 오늘을 산다

by 북드라망 2017. 6. 12.

『루쉰, 길 없는 대지』 - 집착 없이 오늘을 산다


“루쉰에게 ‘무덤’은 길을 걷는 자가 도달하게 될 필연적 종착점이다. 그러나 그 종착점은 백합과 장미가 피어나는 또 다른 출발점이기도 하다. 무덤은 언젠가 평지가 되고, 평지 위로 또다시 무덤이 솟아날 것이며, 그 무덤 위로 꽃이 피어나리라. 이것이 시간이 우리에게 선사한 운명이다. 슬퍼할 것도 그렇다고 딱히 기뻐할 것도 없는 운명.”


- 채운, 「계몽에 반(反)하는 계몽 : 루쉰의 『무덤』」, 고미숙 외, 『루쉰, 길 없는 대지』, 북드라망, 2017, 222~223쪽


시간이 주는 가장 큰 축복은 망각과 무의미다. 세상에 일어난 모든 일들이, 그것이 기쁜 일이건 슬픈 일이건 간에 그대로 남아 있다면, 지옥이 어디 따로 있을까. 거기가 바로 지옥이다. 그 어떤 것도 필멸한다는 점 만큼 큰 위안이 어디 있을까. 그때 그때의 아쉬움이나 안타까움이 있을지라도 말이다. 



루쉰에게 ‘길’은 시작도 끝도 없는 것이었다. ‘종착점’이란 단지 ‘종착’이라는 표지가 세워진 곳일 뿐 ‘길’이 끊어진 곳이 아니었다. 루쉰 자신의 인생을 보아도 그렇지 않나. 루쉰의 무덤가에 핀 꽃들, 그 너머의 또 다른 무덤, 또 무덤들. 말하자면, 길이란 무덤들을 따라 뻗어있다. 여기서 한가지 분명하게 전해지는 것은, 그러하니 집착하지 말라는 말이다. 세상에 목숨을 내놓고 우겨야만 하는 진리도 없고, 어떤 굴욕이라도 감내하며 인정해야할 주장도 없다. 일단, 잘 먹고, 잘 자고 건강하게 제 몸을 보존하는 것이 첫째요, 그 다음에 그 어떤 무게도 싣지 않은 공격을 감행하는 것이다. 루쉰의 『무덤』은 그런 텍스트다. 


“알고 있는 것이 있다면, 설령 대를 쌓는 것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스스로 그 위에서 떨어지거나 늙어 죽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만일 구덩이를 파는 것이라면 그야 물론 자신을 묻어 버리기 위한 것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요컨대, 지나가고 지나가며, 일체 것이 다 세월과 더불어 벌써 지나갔고, 지나가고 있고, 지나가려 하고 있다. ― 이러할 뿐이지만, 그것이야말로 내가 아주 기꺼이 바라는 바이다. 그렇지만 이 또한 다분히 말뿐인지도 모르겠다. 호흡이 아직 남아 있을 때, 그것이 나 자신의 것이라면 나도 이따금 옛 흔적을 거두어 보존해 두고 싶다.”


- 같은 책, 222쪽, 루쉰, 「『무덤』 뒤에 쓰다」, 『무덤』, 홍석표 옮김, 그린비, 재인용


말하자면, 우리가 사는 세계는 항상 이렇다. 아니 ‘세계’라기 보다는 각 개인이 놓여있는 ‘장소’라고 하는 편이 더 좋겠다. 그곳에서 멈춰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마치 ‘관찰자’인 듯 그 자리에 놓여 있는 우리 자신 조차도 시시작각 변해 간다. 길을 따라 가는 것, 혹은 길을 내는 것, 그러니까 ‘변화’는 선택이 아니라 이미 하나의 조건인 셈이다. 이 점을 자각하지 않고서는 이미 지나간 일에 붙들려 제 길을 온전히 걷지 못하게 된다. 또는 도저히 올 일이 없는 앞의 일에 홀려 눈을 뜬 채 그 무엇도 보지 못할 수도 있다. 


그 어떤 진리, 진귀한 것, 아름다운 것일지라도 ‘지나갔고, 지나가고 있고, 지나가려 하고’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그런 와중에 흔적이나마 남겨두려는 일을 할 수는 있겠다. 아무런 집착 없이, 다만, 그때 그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또는 하는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그렇다. 다시 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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