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끼기라도 할 테다
얼마 전 경기도 용인으로 이사를 했다. 그 말인즉, 나는 이제 빨간 광역버스를 타고 출퇴근을 하게 됐다는 뜻이다. 주변의 걱정(어떤 것인지는 다들 짐작하실 터)에도 불구하고 나는 원래 아무 생각이 없기에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다(응?). 내가 너무나 원해서 하게 된 이사는 아니지만, 세상에는 많은 장거리 통근자들이 있는데 내가 그중 하나가 된들 그게 무슨 대수랴. 그리고 광역버스라니, 난 이제 아침저녁으로 버스에서 잘 수 있다! 내가 가진 최고의 장점이자 단점은 졸리면 어떤 상황에서든 졸 수 있고, 잘 수 있다는 것이다(잔다는 건 거의 기절 상태;;). 난 버스나 전철에서 서서도 졸 수 있다. 무릎이 꺾여서 부끄럽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졸음을 굳이 참지 않는다. 졸리면 조는 거다. 그러니 내 자리가 확보된 광역버스에서 오며가며 한 시간씩 잠을 잘 수 있다니 ‘이건 정말 꿀통근이야!’라는 것은 역시 내 착각이었고……, 흠흠.
어른스럽다기보다 어른들이 많이 탄다;;;
처음 일주일만 하더라도 난 거의 타자마자 잠에 빠졌다. 정말 신기하게도 타는 순간 눈을 감았다 눈을 뜨면 뿅하고 서울에 도착! 겨울이라 겉옷이 두꺼워서 둔한 감은 있지만 체구가 작은 나에게 광역버스 좌석은 그리 좁지만은 않다. 특히 점퍼의 모자를 잘 말아 접으면 훌륭한 목베개가 돼서 잠이 더 잘 온다. 그, 그런데 점점… 타자마자 잠이 들던 것이 서너 정거장쯤 지나야 잠이 오고, 고속도로에 진입해야 잠이 오고, 급기야 고속도로 중간에 와서야 겨우 잠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이럴 땐 속으로 악을 쓰면서 어떻게든 잔다).
지난주 금요일에 출근하면서는 너무 화가 나는 바람에 바로 잠을 자지 못했다. 이날 난 하필 앞에서 세번째 좌석에 앉아 있었고, 범인(?)은 첫번째 혹은 두번째 좌석에 앉아 있었다. 출근시간의 광역버스는 퇴근시간과 달리 특히 조용하다. 그렇다, 모두 잠을 자기 때문이다. 부족한 아침잠을 이때들 벌충한다. 그렇기에 버스 기사님들 역시 라디오도 틀지 않으시고 운전을 하시는데, 이날은 어디선가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엔 그리 크지 않았다. 앞자리니까 기사님이 작게 틀어 놓으신 라디오소린가 보다, 했다. 그러나 점점 커졌고, 이어폰을 끼고 있는 내 귀에까지 찬송가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고, 주여, 이건 아니잖아요. 이어폰을 빼고 둘러보니 일단 기사님은 아니었다. 자세히 들어보니, 오 마이 갓, 내 앞자리 아니면 내 앞앞 자리인데, 네 명 중 누구인지는 도무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내 청력은 거기까지는 미치지 않았고 그저 나만 미칠 지경이었다.
군자지중용야君子之中庸也 군자이시중君子而時中이요, 소인지중용야小人之中庸也 소인이무기탄야小人而無忌憚也 …… ‘소인지중용’(小人之中庸)은 어떤 판본에서는 ‘반’(反) 자가 들어가 “소인지반중용”이라고 되어 있기도 합니다. “소인의 중용은”이나 “소인이 중용에 어긋난 것은(혹은 반대로 하는 것은)”이나 문장 전체로 보면 결국 같은 뜻이죠. “소인이 하는 중용의 수준은” 이런 뜻이에요. 소인도 중용을 한다고 내세우겠지요? 이러한 소인의 중용은 ‘무기탄야’(無忌憚也), ‘기탄’(忌憚)이 없대요. ‘꺼릴 기’ 자와 ‘꺼릴 탄’ 자를 쓰는 기탄은 ‘거리낌이 없다’는 뜻이지요. 세상에 겁나는 것 없이 제멋대로 산다는 거예요. 1장에서 『대학』 구절을 설명할 때 나왔죠. ‘소인한거 위불선무소부지’(小人閒居 爲不善 無所不至)라고요. 소인이 일상생활에서 ‘불선’한 일을 하는 것을 하지 못할 바가 없다고 했잖아요. 바로 그거예요. 거리낌없이 제멋대로 사는 걸 기탄이 없다고 표현한 겁니다. 소인의 상태에서 제멋대로 살아요.(우응순, 『친절한 강의 중용』, 중용 제2장 46~47쪽)
아, ‘시중’(時中)은 뭐 아웃 오브 안중이고 ‘기탄’(忌憚) 없이 핸드폰 스피커로 관광버스도 아닌 광역버스에서 음악을 듣는 소인배와 불의(不義)는 분명하나 불리(不利)가 두려워 전전긍긍하기만 하는 또 다른 소인배. 그러는 사이 찬송가 한 곡이 끝났고 잠시 정적. 아, 껐구나, 하고 안도하려던 찰나 다시 시작되는 새로운 곡. 그러나 세상은 아직 살 만한 곳. 내 자리 대각선 뒤쪽에서 누군가 말했다. “기사님, 이거 라디옵니까?” 그러자 바로 “죄송합니다” 하며 멈추는 음악 소리. 아, 끝났다.
크르릉....
버스 안은 조용해졌지만 잠은 바로 오지 않았다. (저도 소인배이면서) 앞으로 중간에 내릴 수도 없는 광역버스에서 이런 소인배들을 종종 만나게 될 거란 생각에 갑갑해졌고, (저는 소인배이면서) 내 주변은 다 군자들이었으면 좋겠다는, 그래서 날 좀 건드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내 얄팍함이 싫어서 혼자서 씩씩댔다. 버스는 어느덧 양재 IC를 지나고 있었고, 이젠 어떻게든 자야 했다. 내 왼쪽에 앉은 옆사람에게 고개가 떨어지지 않도록 고개를 오른쪽으로 꺾고, 최대한 최대한 ‘거리끼면서’ 또 잠을 청했다. 그래, 거리끼면서라도 살자.
친절한 강의 중용 - 우응순 강의/북드라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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