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정치학② - 지도자의 인격도야
공자의 정치학은 당시의 정세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어떤 정치이론이든 그 당시의 역사적 조건이나 정치적 상황과 무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기원전 1100년경 은나라를 멸망시킨 주(周)나라는 정복전쟁에 참여한 왕족들과 개국공신들, 그리고 힘을 합해준 여러 부족들에게 땅을 나누어 주고 제후로 봉했다. 무왕과 함께 정복전쟁에 나섰던 강태공에게는 제나라를 주었고 아우 주공단에게는 노나라를 주는 식이었다. 이처럼, 건국초기에 주나라는 결혼 동맹을 포함한 혈연관계를 통해 제후국들과 결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세대가 거듭될수록 피도 묽어지고 상호협력의 필요성도 줄어들었다. 그러니 천자로서 주(周)왕의 리더쉽도 초기만큼 유지 되지 않았고, 제후국끼리의 전쟁도 빈번하게 되었다. 공자가 태어나기 200여년 전인 기원전 700여년 경에는 제후국과 이민족이 연합해서 주나라의 서도(西都)를 공격하여 주(周)왕이 살해되는 일까지 발생했다. 주(周)왕의 정치적 생명력이 다한 것이다. 제후들에 의해 새로 옹립된 주(周)왕은 낙양으로 도읍을 옮겼고, 공자가 태어난 기원전 500년경은 이런 혼란의 시기 한 가운데였다.
영화 <공자> 중에서
『논어』 팔일편에 있는 다음의 문장에서 공자의 정세 인식을 엿볼 수 있다. “오랑캐의 나라에도 임금이 있으니, 중국에 임금이 없는 것과는 다르구나(夷狄之有君 不如諸夏之亡也).” 미개한 오랑캐들도 군주가 있는데 높은 문명을 자랑하는 중국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고 공자는 탄식한다. 공자의 정세인식은 중국의 혼란은 군주의 리더쉽 부재 때문이라는 것에 있었고, 그의 관심사는 무너진 리더쉽 복구였다. 하지만 공자가 생각한 리더쉽의 복구방안은 힘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애공이 정치를 묻자 공자는 문왕과 무왕이 폈던 훌륭한 정책은 이미 자료에 다 있지만(文武之政 布在方策), 그 사람이 있어야 그 정치를 펼 수 있다(其人存則其政擧)고 말한 바 있다. 이 문장의 의미는 군주가 문왕과 무왕의 덕을 지니지 않으면 그러한 정책을 펼 수 없다고 읽을 수 있다. 공자는 정치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얻어야 한다고 했고, 덕 없는 군주에게는 현신(賢臣)이 없다고 했다. 공자는 자신이 생각하는 리더쉽의 요체를 이렇게 말한다.
“천하에 두루 통하는 도리가 다섯 가지 있는데, 그것을 행하는 방법은 3가지입니다.
天下之達道五 所以行之者三 (왈 천하지달도오 소이행지자삼)
군신관계, 부자관계, 부부관계, 형제관계 그리고 친구관계는 이 다섯 가지가 천하에 두루 통하는 도리이고, 知(지)와 仁(인)과 勇(용)은 천하에 두루 통하는 덕이니, 그것을 행하는 방법은 한가지입니다.
曰君臣也 父子也 夫婦也 昆弟也 朋友之交也 五者 天下之達道也 知仁勇三者 天下之達德也 所以行之者 一也 (왈 군신야 부자야 부부야 곤제야 붕우지교야 오자 천하지달도야 지인용삼자 천하지달덕야 소이행지자 일야)”
공자는 인간이 필연적으로 놓이게 되는 관계를 군신(君臣), 부자(父子), 부부(夫婦), 곤제(昆弟), 붕우(朋友)로 들었다. 이들 관계들은 군신관계를 제외하고는 군주의 리더쉽과는 별 관련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군주는 그의 곁에 누가 있느냐에 따라 아비나 자식이 되기도 하고, 남편이 되기도 하고, 형이나 친구가 되기도 하기에 이런 관계들이 군주의 삶을 구성한다. 이 상이한 관계들은 제각각 그것이 유지될 수 있는 마땅한 이치가 있다. 맹자는 이를 부자유친(父子有親) 부모 자식 간에는 친함이 있고, 군신유의(君臣有義), 군주와 신하 간에는 마땅함이 있으며, 부부유별(夫婦有別) 남편과 아내는 집안에서의 소임이 각각 다르고, 장유유서(長幼有序) 나이든 사람과 어린 사람사이에는 순서가 있으며, 붕우유신(朋友有信) 친구 간에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5가지 항목으로 특정했다. 맹자의 이 도덕률은 오늘날 고루함의 대명사로 여겨지기도 한다. 夫婦有別(부부유별)이나 長幼有序(장유유서) 같은 항목이 남편과 아내, 나이든 사람과 어린 사람을 비대칭적 권력관계에 놓이게 하는 구실이 되기도 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자는 그 도를 특별하게 무엇이라고 특정하지는 않았다.
공자는 다섯 가지 두루 통하는 도를 행하는 방법으로 지(知)를 첫 번째로 꼽는다. 우선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군신(君臣), 부자(父子), 부부(夫婦), 곤제(昆弟), 붕우(朋友) 관계에서 붕우(朋友)를 제외하고는 힘의 비대칭성이 뚜렷한 관계다. 군주는 신하보다 더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고, 아비는 자식보다, 남편은 아내보다 형은 아우보다 더 큰 힘을 가지고 있다. 힘의 비대칭성은 비대칭적 권력관계를 낳는다. 예컨대 군신관계는 더 큰 힘을 가진 자와 그렇지 않은 자가 맺을 수 있는 관계 중의 하나인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공자는 힘을 관계성의 본질로 보지 않는다. 가령, 군주가 군주인 것은 그를 군주로 인정하고 받드는 신하가 있기 때문이고, 그가 아버지인 것은 그를 아버지라 부르는 아들이 있기 때문이고, 그가 남편인 것은 그를 남편이라 여기는 아내가 있기 때문이고, 그가 형인 것은 그를 형이라 여기는 아우가 있기 때문이고, 그가 누구의 친구인 것은 그를 벗이라 여기는 친구가 있기 때문이다. 천하에 두루 통하는 덕의 첫 번째인 지(知)는 자신을 관계의 효과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것이 출발점이다.
그 다음의 덕으로 공자는 인(仁)을 들고 있다. 인(仁)은 인식의 측면이 아니라 정서의 측면이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정서를 일으킬 수 있는 감(感)하는 능력이 인(仁)이다. 공자는 인(仁)은 “피붙이를 가깝게 여기는 것을 근본으로 한다(親親爲大친친위대)”고 했다. 그러니까 인(仁)은 감(感)하는 능력 중에서도 긍정적인 정서다. 하지만 인간의 정서에는 사랑, 존경 같은 긍정적인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미움, 공포와 같은 부정적인 것도 있다. 스피노자도 말한 바 있지만 긍정적인 정서는 역량을 증대시키는 반면, 부정적인 정서는 역량을 위축시킨다. 스피노자식으로 말하면, 인(仁)은 관계의 역량을 증대시키는 정서다. 인(仁)을 통해서 관계는 더욱 단단해진다. 군주가 처한 관계가 단단해진다는 것은 그 관계의 역량이 증대한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군주의 리더쉽이 발휘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공자가 들고 있는 달덕(達德)은 용(勇)이다. 용(勇)이란 힘써 행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는 군신(君臣), 부자(父子), 부부(夫婦), 곤제(昆弟), 붕우(朋友) 관계를 제대로 잘 유지하기 위해서는 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정서는 긍정적인 방향으로만 흐르는 것이 아니라, 부정적인 방향으로도 흐르기 때문이다. 공포, 미움, 질투는 관계를 깨트리고 만다. 따라서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긍정적인 정서가 지속되어야 하고, 그것은 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더욱이 사람마다 인식능력이 다르고, 정서를 감(感)하는 능력이 다르다. 공자는 이러한 능력들을 세단계로 구분한다.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사람을 생이지지라고 합니다. (或生而知之)
배워서 아는 사람을 학이지지라 합니다. (或學而知之)
어려움을 겪고 나서야 아는 사람을 곤이지지라 합니다. (或困而知之)
과정은 각각 다르지만 이치를 알게 되는 것은 같습니다. (及其知之 一也)
저절로 편안하게 행하는 사람을 안이행지라 합니다. (或安而行之)
자신에게 이롭다고 생각하여 행하는 사람을 이이행지라 합니다. (或利而行之)
어떤 사람은 힘써 노력하여 행합니다. 이런 사람을 면강이행지라 합니다. (或勉强而行之)
행하는 방법은 다르지만 원하는 바를 이루는 것은 같습니다.(及其成功 一也)
생이지지(生而知之), 학이지지(學而知之), 곤이지지(困而知之)는 지(知)적인 능력 차이를 말한다. 원래부터 천재이거나(生而知之), 학문을 통해서 아는 자(學而知之), 그리고 어려움을 당하고 나서야 겨우 알게 되는 자(困而知之)가 있다. 지적인 능력만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니다. 행위능력의 차이도 사람마다 다른데, 이는 감(感)하는 능력이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정서적인 감응의 능력이 뛰어나서 이러저러한 사리분별에 앞서서 자기 자신보다는 타인을 위해 행동하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사리분별을 통해서 옳은 행동으로 나아가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언제나 겪어보고 행동을 수정하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공자는 어쨌든 알게 되는 것도 한가지고, 이루는 바도 한가지라고 말한다. 여기서 곤이지지(困而知之)나 면강이행지(勉强而行之)는 가장 낮은 레벨로 보이지만 생각해 보면 이것도 여간 어려운 경지가 아니다. 된통 곤란을 겪고도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똑같이 어리석은 행동을 반복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애공은 공자에게 말한다. “그대의 말은 아름답고 지극하나 과인이 실로 답답한 사람이라 그런 일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자 공자는 다시 대답한다.
배우기를 좋아하면 지(知)에 가까워집니다. (好學 近乎知)
힘써 행하면 인(仁)에 가까워집니다. (力行 近乎仁)
부끄러움을 알면 용(勇)에 가까워집니다. (知恥 近乎勇)
이 세 가지를 알면 수신하는 방법을 알게 됩니다.
수신하는 방법을 알게 되면 사람을 다스리는 방법도 알게 됩니다. 사람을 다스리는 방법을 알게 되면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 방법도 알게 됩니다.
(知斯三者 則知所以修身 知所以修身 則知所以治人 知所以治人 則知所以治天下國家矣)
영화 <공자> _ 제자들과 문답 장면
곤란을 당해도 배우지 못하고 어리석은 행동을 반복하게 되는 것은 부끄러움을 모르기 때문이다. 지치근호용(知恥 近乎勇). 부끄러움을 안다면 같은 행동을 반복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작금의 어처구니없는 정치스캔들과 그에 대한 대통령의 대응에서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똑똑히 배우고 있는 셈이다. 배우기를 좋아하고, 힘써 행하면 긍정적인 피드백이 만들어지고 그것이 몸에 붙는다. 혹 잘못을 범하더라도 부끄러움을 안다면 그 잘못으로 부터도 배우고 고칠 수 있다. 애공이 말하는 것처럼 군주가 둔하고 답답한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공자는 그것은 문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배우기를 좋아하고(好學), 배운 것을 부지런히 행하고(力行) 그리고 부끄러움을 안다면(知恥) 자신을 다스리는 방법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을 다스리는 방법을 알 수 있다면 다른 사람을 다스리는 방법, 더 나아가 국가를 운영하는 방법도 자연히 알 수 있다고 공자는 말하고 있다.
군주의 수신(修身)이라는 테마는 참으로 지당한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무력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결국은 군주 스스로 수신에 힘써야 하는데 그것을 지배자에게 기대하기는 힘들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러한 군주는 역사적으로 드물었지 않았는가? 공자에게 정치를 물었던 애공(哀公)은 공자 사후에 월나라의 힘을 빌어서 삼환세력을 치려고 시도하다가 도리어 쫓겨나고 말았다. 힘에 의지해 보려 한 것이다. 곤이지지(困而知之)나 면강이행지(勉强而行之)라도 되면, 말년에 수모는 당하지 않으련만 부끄러움을 모르기에 곤란한 경험으로부터도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배자가 스스로 대오각성해서 뭔가를 하리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우리가 지금의 정치현실에서도 목도하는 것처럼 지배세력이 순순히 잘못을 인정하는 일은 없다. 그렇다면 군주의 수신(修身)이라는 테마의 정치적 의미는 무엇일까? 공자가 말하는 군주의 수신(修身)은 표면적으로는 군주(君主)를 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피지배세력들에게 군주답지 않은 군주를 끌어내리는 명분을 주는 메시지로 읽어야 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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