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정치학 ④ - 수 없는 실패의 길
지난 연재(바로가기)에서 나는 공자가 제시한 9경(九經)의 핵심을 “기쁘게 하라”라고 읽었는데 그것이 과도한 해석은 아닐까 조금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논어』 자로편에서 공자가 직접적으로 그렇게 이야기 하는 구절을 찾았다. 초나라 대부 섭공(葉公)이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 묻자 공자는 말한다. “근자열(近者說) 원자래(遠者來). 가까운 사람을 기쁘게 하고 멀리 있는 사람이 찾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멀리 있는 사람이 그 나라로 찾아오는 것은 좋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공자의 이 대답 역시 한마디로 하면 “기쁘게 하라”이다. 사실 기쁘게 해주는데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으랴? 최고의 정치 지도자가 이렇게만 해 준다면 정말 모든 것이 만사형통일 것이다. 과연 모두를 기쁘게 하라는 9경은 잘 실행될 수 있을까?
공자는 애공에게 9경을 행하는 방법까지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그러면서 그런 구체적인 방법을 하나로 관통하는 것이 있다는 말을 덧붙인다. “범위천하국가(凡爲天下國家) 유구경(有九經) 소이행지자일야(所以行之者 一也), 무릇 천하국가를 다스리는 데는 9경이 있는데 그것을 행하는 방법은 하나입니다.” 그 “하나”가 무엇일까? 그 “하나”의 방법이면 모두를 기쁘게 하는 정치를 펼칠 수 있다고 하니 말이다. 공자는 직접적으로 그것이 무엇인지 말하고 있지 않지만 대체로 성(誠)이라고 해석된다. 그것은 다음의 구절 때문이다.
성(誠)은 하늘의 도이고 성(誠)하려 하는 것은 사람의 도입니다. 성(誠)한 사람은 힘쓰지 않아도 중(中)할 수 있으며 생각하지 않아도 얻을 수 있으며, 자연스럽게 도(道)에 맞게 되니 성인(聖人)입니다. 성(誠)하려고 하는 사람은 선을 택하여 굳게 잡아 지키는 사람입니다.
誠者 天之道也 誠之者 人之道也 誠者 不勉而中 不思而得 從容中道 聖人也 誠之者 擇善而固執之者也
그런데 이 문장이 왜 정치를 논한 20장에 있는지는 참으로 의아하다. 성자(誠者) 천지도야(天之道也), 성(誠)이란 것은 하늘의 길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9경을 행하는 “하나”의 방법이 성(誠)이라고 이해한다면, 그것은 인간은 감히 넘볼 수 없는 경지가 되는 것 아닌가? 성(誠)이란 “힘쓰지 않아도 중(中)할 수 있으며 생각하지 않아도 얻을 수 있으며, 자연스럽게 도(道)에 맞게 되는 것”이라면 인간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이 문장은 “중용(中庸) 불가능야(不可能也)”, 군자의 도(道)인 중용은 불가능하다는 문장과도 일맥상통한다. 결국 군주 개인의 인격도야에 정치가 달려있으니 이 문장이 20장에 있다고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태까지 실컷 9경의 효과와 구체적인 실행방법까지 이야기한 마당에, 그건 사실상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너무 황당한 이야기가 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공자가 말하는 그 ‘하나’의 방법을 성(誠)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잘못된 것일까? 우리는 인간의 길을 찾아야 되는 것 아닐까?
물론 공자는 인간의 길도 제시한다. “성지자(誠之者) 인지도야(人之道也)” 사람의 도는 성(誠)이 아니라 성지(誠之)라는 것이다. 이때 지(之)는 간다는 뜻이니 성지(誠之)는 성(誠)을 향해서 나아간다, 곧 성(誠)하려고 한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공자가 말하는 그 ‘하나’의 방법을 성(誠)이 아니라 성지(誠之)의 길로 이해한다면 어떨까? 그렇다고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성지(誠之)의 길은 실패를 함축한다. 성(誠)하려고 각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 성지(誠之)이기에 그 노력을 멈추는 순간 실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공자는 정치를 묻는 군주에게 성공적인 정치는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이상한 대답을 하는 셈이다.
공자의 이 이상한 대답을 좀 더 밀고 나가면 어떨까? 말하자면 군주의 정치에 국한 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일반의 실패에 대해서 말이다. 역사적으로는 모두를 기쁘게 하려는 열망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낳았다. 하지만 혁명으로 이룩된 체제에서 프롤레타리아조차도 행복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우리의 대의제는 성공적이라 할 수 있을까? 이번 탄핵 때도 보았지만, 대의를 수행한다고 하는 자들은 자신들의 권력창출이 우선이다. 그들은 밀리고 밀려서야 겨우 마지못해 한 발짝을 움직였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대의는 허울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기는 어렵지 않다. 하지만 대중들의 촛불은 그들을 몰아세울 수 있었다. 그렇다면 대중의 직접적인 참여는 정치를 항상 성공적인 방향으로 이끌까? 그것도 단정하기는 어렵다. 지금 우리에게 촛불을 들게 한 그 당사자의 지지율이 세월호나 백남기농민 사건에도 불구하고 한때는 50%를 상회 했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대중이 언제나 현명하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정말 성공적인 정치는 불가능한 것일까?
사실 우리는 너무 쉽게 성공을 기대하고, 성공을 선언하는 건 아닐까? 성공했다는 선언은 상황종료인 완결을 의미한다. 하지만 우리가 처한 상황이란 항상 어떤 조건하에서 전개되는 것이고 그 조건은 변하기 마련이기에 완성되었다고 단언하는 순간 그 문제는 재고(再考)의 여지가 없어지기 십상이다. 가령 우리는 동물 실험을 통해 많은 인간의 생명을 살렸다. 그래서 동물실험은 동물에게는 미안하지만 동물의 생명보다는 인간의 생명이 더 가치 있기에 어쩔 수 없다는 결론 내려 버린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것이 꼭 필요한 실험인지, 실험동물의 노동환경을 개선할 여지는 없는지, 더 나아가 지금도 여전히 동물실험이 필요한지 더 이상 어떤 재고의 여지를 갖기가 어렵다. 반면에 실패는 아직 진행 중인 상황, 미결을 의미한다. 실패했기에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재고해 볼 수 있고, 실패했기에 다른 방식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공자가 성지(誠之)를 통해서 성공적인 정치의 불가능성을 말한 뜻은 이런 것이 아닐까?
공자는 “성지자(誠之者)”를 “택선이고집지자야(擇善而固執之者也), 선을 택하여 굳게 잡아 지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문장은 굳게 잡아 지킨다는 말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그것을 바꾸지 않는다는 의미로 오해될 수 있지만, 이 문장의 방점은 택(擇)에 있는 것 같다. 매번 선(善)을 택해야 하는 것이지, 선(善)이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유가에서는 이를 저울추를 뜻하는 權(권)자를 써서 權道(권도)라고 한다. 요즘은 디지털 저울이 일반적이지만, 예전에 저울은 두 무게의 평형을 기준으로 한다. 가령 양팔 저울은 한쪽 접시에 무게를 달 시료를 담고 다른 접시에는 저울팔이 수평이 되도록 추를 올린다. 즉 추는 시료가 무엇이냐에 따라 매번 달라진다. 성인이라면 저절로 저울추가 달라져서 저울팔의 수평이 한 번도 기울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공자가 말하는 성(誠)의 경지다. 그러나 인간은 저울의 팔이 기울어지는 실패를 겪어본 후에라야 추를 달리한다. 그것이 성지(誠之)의 길이다. 가까스로 수평을 맞추었다고 하는 순간 이번에는 한쪽 접시의 시료가 달라지고 저울은 다시 기운다. 그러면 다시 수평을 맞추어야 한다. 이런 과정이 무한이 반복되는 것이 성지(誠之)의 길이다. 언제까지 이 지난한 과정을 계속해야 할까? 이에 대해서도 공자는 이렇게 답하고 있다.
배우지 않을지언정 배운다면 능하지 않으면 그만두지 않는다.
有弗學 學之 弗能 弗措也
묻지 않을지언정 묻는다면 알지 못하는 것이 있으면 그만두지 않습니다.
有弗問 問之 弗知 弗措也
생각하지 않을지언정 생각한다면 터득하지 못하는 것이 있으면 그만두지 않습니다.
有弗思 思之 弗得 弗措也
판단하지 않을지언정 판단한다면 분명하지 않으면 그만두지 않습니다.
有弗辨 辨之 弗明 弗措也
행하지 않을지언정 행한다면 독실하지 않으면 그만두지 않습니다.
有弗行 行之 弗篤 弗措也
다른 사람이 한 번에 그것을 잘할 수 있으면 나는 백번하고
人一能之 己百之
다른 사람이 열 번에 그것을 잘할 수 있으면 나는 천 번해야 합니다.
人十能之 己千之
이 문장을 공부가 뒤처진 아이들에게 읊어대지는 마시라. 공자가 말하는 공부는 시험공부가 아니라 매번 선(善)을 택하는 공부다. 성인이 한 번에 잘하신다면, 우리는 100번의 실패에도 매번 다시 일어서면 되는 것이다. 지금의 촛불정국을 87년 항쟁과 비교들을 많이 한다. 그때 야권은 분열했고 쿠데타의 주역인 노태우씨가 대통령이 되어 버렸었다. 실패한 항쟁. 그러나 그때 민주정부가 들어섰다고 해도 항쟁의 이유는 계속 생겨났을 것이다. 항쟁은 늘 실패한다. 그렇지만 매번의 실패에도 매번 다시 일어나는 것이 항쟁이다. 인일능지(人一能之) 기백지(己百之) 인십능지(人十能之) 기천지(己千之)! 우리는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일어설 것이다. 인간의 길이란 완성된 성(誠)이 아니라 성(誠)하려고 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글_최유미
'지난 연재 ▽ > 나의 고전분투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誠 - 진실 되고 망령됨이 없는 것 (0) | 2017.01.26 |
---|---|
치곡(致曲), 한 귀퉁이에 정성을 다한다 (0) | 2017.01.12 |
공자의 정치학③ - “기쁘게 하라” (0) | 2016.12.15 |
공자의 정치학② - 지도자의 인격도야 (0) | 2016.12.01 |
공자의 정치학① - 군주제의 민주화 (0) | 2016.11.17 |
안분(安分) - "자신을 바르게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구하지 않으니" (0) | 2016.11.0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