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새로운 성경 읽기 - 하느님과 지혜,『성경』의 「시서와 지혜서」

새로운 성경 읽기 - 하느님과 지혜

『성경』의 「시서와 지혜서」




둘째 아이와 나 사이에만 있는 ‘철학자 이름 말하기 게임’이 있다. 철학자 이름을 번갈아 대다가 한 사람이 더 이상 대지 못하면 끝이 난다. 아이는 대개 내가 알려준 철학자 이름을 대지만, 어떤 때는 책장에 있는 책의 저자 이름을 따로 알아 두었다가, 그 이름으로 기습을 시도하기도 한다. 끝난 듯하다가 약점을 찾아 다시 시작하는 것이 흡사 손자(孫子)의 기습법과 닮았다. 이제는 레퍼토리를 꽤 확보해서인지 형에게도 여간해선 지지 않는 모양이다. 어디 여행을 갈 때면 이제 그 세 명이 하게 되는데, 누가 보면 철학자 이름들이 오가는 여행길 차안 풍경이 무척 기이하게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어느 인터넷 서점에서 ‘한 눈으로 보는 서양철학사’ 브로마이드가 사은품으로 왔다. 세계 유일무이한 게임을 즐기는 우리 가족에게 그것은 무척 소중한 것으로서, 나는 그것을 무려 식탁 옆에다 붙여 놓았다. 그것을 붙인 첫날, 나는 기념으로 그 표 맨 왼편에 쓰여 있는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를 꽤 열심히 설명해 주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이 항상 변화한다고 주장했고, 파르메니데스는 그 반대로 세상은 변화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는 놀라운 내용을 들은 녀석은 어느 한 편을 들기 힘든 모양이었다. 부서진 장난감을 보면 헤라클레이토스가 맞는 것 같고,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보면 세상에 안 변하는 게 몇 가지는 있을 것 같고, 뭐 그런 모양이다. 그 이후에 사람을 만나면 상대방의 입장을 물어보는 게 일종의 예식처럼 되었다. 이모에게도, 동네 아줌마에게도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를 설명해주고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는 것이다. 


그날도 녀석의 친구가 와서 신나게 놀고 있던 때였다. 방안을 온통 뛰어 놀던 아이가 소파에 앉자, 비로소 생각이 떠오른 듯 대뜸 그 친구에게 묻는다. 너는 헤라클레이토스냐, 파르메니데스냐. 그런데 이 친구의 반응은 다른 사람과 무척 달랐다. 다른 이야기에는 또박또박 잘 대답하던 친구가 이 질문에는 좀 색다른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둘째가 다시 파고들어 물었다. 아니 누구냐니까, 너는 어느 입장이냐고! 그때 친구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놀라운 대답. “하느님의 사랑은 변치 않아!” 오~ 마이 갓! 아들은 뭔가 새로운 것을 알았다는 듯이 눈이 휘둥레지며 엄마의 얼굴을 보았다. 


성서에서 ‘하느님’을 의미하는 단어는 복잡한 유래가 있다. 교회에 의해 ‘하느님’으로 찬미되는 분은 야훼(יהוה, YHWH)[각주:1] 라는 이름의 신이다. 야훼는 “나는 있는 나다.”[각주:2] 라고 말하며 모세에게 나타난 인격적인 하느님을 가리킨다. 원래는 ‘감추시는 분’이지만, 이집트에서 억압받는 유대민족을 위해 결정적으로 개입함으로써 당신 자신을 계시(啓示)하였다는 그 신이다. 카톨릭 성서에서 굵은 글씨의 ‘주님’으로 번역되는 분은 바로 이 야훼를 말한다. 


축자적으로 보면, 성서에 나타난 야훼가 유일하고 초월적인 것은 분명하다. 이 의미에서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각주:3] 는 성서의 첫 문장은 성서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하느님은 끊임없이 자신의 초월성을 되새긴다. “하느님께서는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위에 있다”[각주:4] 그러므로 “나는 주님이다.”[각주:5] 또한 성서는 하느님의 유일성을 끝없이 강조한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심이시다”[각주:6]


YHWH


그러나 성서의 기원이랄 수 있는 남유다 J문서와 북이스라엘 E문서의 저자들은 그런 것들을 믿지 않았다.[각주:7]원래 야훼는 ‘거룩한 존재들’이 모이는 신들 모임의 일원이었을 뿐이다. 당시에는 여러 신들이 있었고, 사람들도 여러 신들에게 자신을 의탁했던 것으로 보인다.[각주:8] 『성서』에서도 “그들은 하느님이 아니라 잡신들에게 재물을 바쳤다”[각주:9] 와 같은 문구들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더군다나 이 신들의 모임은 가나안 최고의 신인 ‘엘(El)’이 주재했다. 야훼가 아니었다. 『성서』에서도 “지극히 높으신 분(El, the Most High)께서 민족들에게 상속 재산을 나누어 주실 때”[각주:10] 라는 문구에서 보듯, ‘엘’이 더 높은 지위였었기도 했다. 그러나 기원전 8세기에 들어서면서 야훼가 신들의 모임에서 엘을 추방하고, 유일한 신으로 올라선다.[각주:11] “주님(Yahweh, the Lord)은 위대하시고 드높이 찬양받으실 분 모든 신들 위에 경외로우신 분이시다.”[각주:12] 마침내 야훼가 거룩한 이들의 모임에서 다른 경쟁상대가 없는 최고의 신이 된 것이다. “신들 가운데 누가 주님과 비슷하겠습니까?”[각주:13] 그 순간 아들의 친구가 말한 것처럼 하느님은 영원히 변치 않는 신이 되었다. “영원무궁토록 우리의 하느님이시다.”[각주:14] 이것은 로마를 중심으로 기독교 국가가 구성되어 가던 중세에 더욱 강화된다. 그런 과정에서 기독교는 자신의 사유와는 전혀 다른 그리스 철학과 스토아주의를 자신의 것으로 전유하는 일을 감행하는데, 그것으로 기독교 안에는 어떤 역설들이 덧붙여지게 되었다. 즉, 이 신은 ‘자기포기’를 전제로 해서야 만날 수 있는 신이 되어 버린다. 즉, 기독교의 신은 ‘고백’의 단계(이른바 ‘고해성사’)를 거쳐서 자신을 대상화하고[각주:15] 그렇게 대상화된 자신을 포기하는 고행을 거침으로써 구원된다는 구도 위에서 비로소 정립된 ‘하느님’인 것이다. 결국 신앙은 자기포기를 통해 하느님께 구원됨을 목표로 하는 역설을 내포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유대교 안에서 다신주의가 유일신주의로 전환이 이루어지고, 이것이 로마로 무대를 바꾸어 정착되면서 우리는 자기를 포기하는 자, 그래서 유일하고 초월적인 타자인 신에게 자신을 의탁하고 마는 자가 되고 말았다. 영원히 변치 않는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 우리는 영원히 자기를 포기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뒤집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가나안의 다신론(바알종교)에 대항하여 유대교를 구성해낸 성서 역사가들이든, 그리스철학이나 스토아주의의 자연철학에 대항해 중세 기독교를 구성해낸 교부학자들이든, 그들 모두 어떤 새로운 해석을 통해서 다신론적 문화와 그리스·로마 철학을 자신의 목표에 맞게 전유하는 전략을 취했다. 역사를 뒤돌아보면 그들은 그것들을 더욱 세련되고 확고한 정신으로 재구성하는데 성공했다고도 할 수 있다. 이제는 그것이 세계를 이끌고 있는 것이다. 다소는 어이없는 일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이것이 정신과 세계가 구성되는 본질이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눈을 돌아보면 이 세상을 움직이는 거의 모든 생각들이 그렇게 구성되는 것이다. 예컨대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도 기존의 자유주의적 정치경제학이 갈 수 있는 극단치를 가지고 재배열함으로써 획득한 정신이었다. 중국 선불교는 기존의 도교적 사유와 언어를 전유하고서야 가능한 사유였다. 


그렇다면 그들이 만든 세련된 정신을 해체하고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도 거꾸로 그것들을 재전유하고서야 가능하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가능하다. 즉 그들이 유일하고 초월적인 신으로 구축해놓고 정교하게 구성한 하느님의 세계를, 애초에 그러지 않았던 하느님, 그러니까 유일하지도 초월적이지도 않은 내재적인 하느님, 좀 더 말해본다면 자연철학이 이야기하는 그 하느님으로 전환하여 재구성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들이 전유하여 『성서』에 품은 자연주의를 우리가 다시 우리의 방식으로 재전유하는 것이다. 오히려 그렇게 되면 세련되게 구축된 그들의 장치를 우리의 방식으로 활용할 계기를 마련하게 되는 것 아닌가.


나는 그런 의미에서 성서에 빈번하게 나타나는 ‘지혜(Hokhmah)’ 개념에 주목하고 싶다. 고대 근동의 현자들은 왕에게 고문 역할을 하면서 현실이 하늘의 원칙에 부합한지를 항상 살피고 사람들에게 이 원칙을 알려주었다. 이렇게 삶 속에서 축적된 지혜들은 모세나 시내 산의 율법과는 기원적으로 다른 원천들을 지닌다. 예를 들면 “빈정대는 사람들은 성읍을 들끓게 하지만 지혜로운 이들은 화를 누그러뜨린다”, “통치자가 거짓된 말에 귀 기울이면 신하들이 모두 사악해진다”,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고 마음이 겸손하면 존경을 받는다”[각주:16] 같은 문구들은 야훼와 전혀 상관없는 것들이다. 


 『성서』는 이런 것들을 「시서와 지혜서」라는 이름으로 모아 놓았다. 여기에 해당하는 책은 「욥기」, 「시편」, 「잠언」, 「코헬렛」, 「아가」, 「지혜서」, 「집회서」이다. 여기서 ‘지혜’라는 개념은 실제적인 삶의 지식들이고, 실천을 통해 획득된 일상적 지식이다. 지혜란 삶에 대한 올바른 앎이다. 그것은 삶의 능력과 기술을 습득하고 실천하고 전수하는 행위에 관한 것들이다.[각주:17] 그런데 「시서와 지혜서」는 야훼와 무관하게 자연과 역사를 통해 축적되어 온 이 지혜를 하느님에 대한 경외로부터 나온다고 규정하면서 전유한다. “보아라, 주님을 경외함이 곧 지혜며, 악을 피함이 슬기다”[각주:18] “지혜의 시작은 주님을 경외함이며 거룩하신 분을 아는 것이 곧 예지다”[각주:19], “지혜의 교훈은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다”[각주:20] 그러나 여기서 표현된 ‘하느님’ 혹은 ‘주님’을 본래적인 지혜 원천인 ‘자연과 역사’로 해체해 읽어버리면 「시서와 지혜서」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된다. 즉 자연과 역사를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곧 지혜가 된다. 지혜는 자연과 역사로부터 생성되고, 다시 자연과 역사를 생성하는 것으로 되돌아간다. 아주 세련된 기독교 구조물 아래에서 자연과 역사와 지혜가 함께 어울리는 기묘한 감각을 획득하는 것이다. 『성서』 읽기의 새로운 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시편」의 청원자는 주님께 아뢴다.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행복 당신 밖에 없습니다”[각주:21] 그것은 자연과 역사에게 지혜를 갈구하는 인간의 모습 그대로다. 그리고서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주님 저의 힘이시여. 주님은 저의 반석, 저의 산성, 저의 구원자”[각주:22]라고 사랑을 표명한다. 지혜의 원천인 자연과 역사를 자신과 강하게 밀착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런 지혜는 현세의 왕권조차 지배한다. “세상 끝이 모두 생각을 돌이켜 주님께 돌아오고....주님께 왕권이 있고 민족들의 지배자시기 때문이다.”[각주:23] 재배치된 『성서』의 모든 사유는 자연과 역사로 돌아간다. 현실적인 힘의 배치는 자연과 역사라는 잠재력의 층위를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는 점을 분명하게 알려준다. 고도로 발전된 기독교 언어의 등에 타고 올라서서 지혜의 꼭대기에 다가가면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경지에 이른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고

바른길로 나를 끌어 주시니

당신의 이름 때문이어라”(「시편」 23,1-3)


마음속으로 ‘하느님은 없다’고 말하는 이는 어리석은 자라는 비난[각주:24]도 이렇게 읽으면 쉽게 납득이 된다. 그들은 자연과 역사로부터 지혜가 솟아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주님이 해체되면, 지혜에 대한 모든 배치도 함께 달라진다. 지혜의 원천인 자연과 역사로서의 하느님은 언제나 나의 피난처이고 나의 산성이다.[각주:25] 내가 최후로 신뢰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어떤 것도 아닌 바로 하느님으로 대표되는 자연과 역사인 것이다. 그러므로 “숨 쉬는 것 모두 주님을 찬양하여라.”[각주:26] 고 하는 시편 마지막은 자연과 역사에 대한 생명들의 무한한 찬양으로 읽힌다. 생명을 증진시키는 것은 어떤 다른 것도 아니고 자연과 역사에 내재된 것들(주님)이며, 그것들로부터 지혜가 솟아나므로 생명은 영속적일 수 있는 것이다. 행복은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과 역사로부터 솟아난 지혜를 잡은 자들의 생명력이다. “지혜를 붙잡는 이에게 생명의 나무, 그것을 붙드는 이들은 행복하다.”[각주:27] 


물론 『성서』는 자연숭배를 철저하게 배척한다.[각주:28] 『성서』가 이야기하는 우상은 야훼 이외의 자연물들에 대한 숭배이다. 『성서』에서 모든 악의 시작이고 원인이며 끝은 우상숭배이다.[각주:29] 그러나 그것을 축자적으로 읽지 않고, 거꾸로 읽어볼 수도 있다. 『성서』는 자신이 배척해야할 것으로서 우상들이 고안되는 이유로 “인간의 허영”을 든다. “우상들은 인간의 허영 때문에 세상에 들어왔으니 그것들이 얼마 못 가 끝장난다는 것은 이미 정해진 것이다.”[각주:30] 그리고 그런 허영에 의해 생성된 관습이 시간이 지나면 더 굳어지고 법처럼 지켜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급기야 군주들의 명령으로 그 조각상들이 숭배를 받았다고까지 서술한다.[각주:31] 이렇게 보면 우상은 어떤 통념이며, 아울러 그런 통념으로 세상을 지배하는 권력으로 읽힌다. 마침내 지혜서의 저자는 권력자와 재판관에게 강력하게 경고한다. “그분께서는 지체 없이 무서운 모습으로 너희에게 들이닥치실 것이다. 정녕 높은 자리에 있는 자들은 엄격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각주:32] 삶의 철학을 거슬러 통념에 물들어 권력을 쥐고 흔들면 역사가 심판한다는 뜻이다. 『성서』가 품은 자연주의는 당연히 근본적으로 반-권력적이다. 


미셸 푸코

이 순간에 지혜는 반드시 필요하다. 즉 지혜를 찾아야 한다. 그것은 사랑하고, 찾기만 하면  쉽게 발견할 수 있다.[각주:33] 그것을 갈망하기만 하면 지혜가 스스로 미리 다가가 자기를 알아보게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지혜는 갈망에게 달라붙는다. 그것은 자연과 역사에게 갈구하여 요청하면 쉽게 획득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런데 그것을 획득하면 획득한 자의 영혼을 바꾼다. “자신 안에 머무르면서 모든 것을 새롭게 하며 대대로 거룩한 영혼들 안으로 들어가 그들을 하느님의 벗과 예언자로 만든다”[각주:34] 이것은 푸코가 이야기했던 영성(spirituality)의 구조와도 동일하다. 푸코에게 영성이란 한 주체가 어떤 존재의 양식을 받아들이고, 그러한 존재 양식에 응하기 위해 스스로를 변형시키는 것을 의미한다(1984년 1월 20일 미셸 푸코와의 대담)[각주:35]. 그것은 『성서』에서 이야기하는 지혜와 정확하게 똑같은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하느님’을 자연과 역사로 탈신학화시키고, 다시 지혜를 영성으로 대응시키고서 바라보면 『성서』가 ‘삶의 기술’을 어떻게 전유하였는지가 너무나 명확하게 드러난다.[각주:36] 자연과 역사로부터 영성을 획득한 인간은 자신의 주체를 새로운 생활양식과 더불어 변화시킨다. 그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지혜를 획득하여 거룩한 영혼들 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성서』의 지혜문학을 ‘실천이성의 신학’이라고까지 불리는 것이다.[각주:37] 


「욥기」에서 주위의 통념과 대결하는 인간의 모습은 극적이다. 「욥기」의 중심에는 욥이 고통을 당하는 원천이 하느님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이는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모두 하느님에게서 온다는 이스라엘의 전통적 믿음과 일치한다. 우리의 독법으로 본다면 자연과 역사는 좋은 것과 나쁜 것 모두를 우리에게 던져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욥의 친구들은 전통적인 사유체계에 의해서 ‘상선벌악(賞善罰惡, 착한 사람은 상을 받고 악한 사람은 벌을 받는다)’의 관점에서만 욥을 비판한다. 엘리파즈, 빌닷, 초파르 등 친구들은 엄격하고 격렬한 어조로 하느님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죄를 지었고, 그래서 벌을 받았다고 욥을 비난한다.


그러나 욥의 태도는 묘하다. 욥은 친구들의 공허한 말을 일축하고, 자신을 박해하는 하느님을 거슬러, 공정을 베푸시는 하느님께 도움과 자비를 탄원한다. 탄원 과정 속에서 놀랍게도 역설적인 패러디가 등장한다. 악인들은 오래 살며 늙어서조차 힘이 더 난다. 그들의 후손들은 든든하고, 집은 평안하여 무서워할 일이 없다. 심지어 하느님의 회초리가 그들 위에 내리지도 않는다. 그들은 행복 속에서 나날을 보내다가 편안히 저승으로 내려간다.[각주:38] 이것은 완벽한 역설이다. 현세의 편안함은 저승으로 가는 지름길인 것이다. 자연과 역사로부터 어떤 지혜도 획득하지 못하고 편안함 안에서 잠들어 버린 자, 바로 그들이 악인이다. 아마도 친구들의 태도는 그런 편안함 속에서 더 이상 새로운 지혜가 내려앉지 않는 모습을 상징할 것이다. 


그런 친구들의 굳은 통념을 거슬러서 생생히 살아있는 지혜를 찾아 갈구하는 모습이 바로 욥이다. ‘인내자’ 욥과 ‘반항자’ 욥은 굉장히 가까운 위치에 있다.[각주:39] 그는 이 즈음에 이르러 거의 신적인 주장마저 하는 느낌이다. “세상은 악인의 손에 넘겨지고 그분께서는 판관들의 얼굴을 가려 버리셨네.”[각주:40] 욥은 일종의 통념에 대항하는 혁명가의 모습인 것이다.[각주:41] 그는 새로운 체험을 바    탕으로 어떤 혁명을 거쳐 하느님을 다른 빛 안에서 본다. 다른 존재가 된 것이다. “당신에 대하여 귀로만 들어 왔던 이 몸,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각주:42] 그 순간 하느님으로부터 얻은 고통의 의미를 깨닫는다. 그것은 내 안에 은폐되어 있던 비-자연, 그러니까 인간 중심주의이다. 욥은 인간을 넘어서서 하느님의 공간으로 이동한 것이다. 


자연과 역사를 상징하는 하느님, 그리고 자신의 주체를 변화시키는 빛인 지혜. 하느님과 지혜는 이렇게 만난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둘째 아이의 친구가 수줍게 이야기했던 “하느님의 사랑은 변치 않는다.”는 말은 어떤 의미에서 맞아 보인다. 그것은 자연과 역사로부터 끊임없이 솟아나는 지혜를 이야기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 대답이 더욱 의미 있으려면, 한 가지가 더 얹어져야 한다. 자연과 역사로부터 변함없이 솟아나는 지혜는 바로 나를 변화시킨다는 사실 말이다. 하느님의 변함없는 사랑은 나를 새로운 세계를 이동시키며, 세상을 변화시킨다.


글_약선생(a.k.a. 강민혁) 


  1. 헤브라이어본 구약성서에 4개의 자음이 연속된 'יהוה'가 나오는데, 이 낱말을 로마자로 표기하면 YHWH이다. 현대의 성서학자들은 '여호와'라는 발음보다 야훼가 훨씬 더 원 발음에 가까울 것이라고 추론한다. BC3세기 이후 유다인들은 하느님에 대한 경외심을 표현하고자 이 이름을 소리내어 발음하지 않고 항상 다른 이름으로 대체하여 불렀다. 참고로 「시편」집에 야훼는 695번 나타난다. 현대 번역본은 이 이름을 ‘주님’으로 옮기고 있다. [본문으로]
  2. 한국천주교편, 『성경』 탈출 3,14,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이하 『성경』은 생략) [본문으로]
  3. 「창세」 1,1 [본문으로]
  4. 「코헬」 5,1 [본문으로]
  5. 「탈출」 6,6 [본문으로]
  6. 「신명」 6,4 [본문으로]
  7. 기원전 8세기 근동 지방과 동지중해 지방에 ‘문학 혁명’이 일어났다. 그리스에서는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탄생했고,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역사가들은 전통 이야기들을 민족적 서사시로 만들어 엮었다. 현대 성서학자들은 남유다의 서사시를 ‘J’ 문서로, 북이스라엘의 서사시를 ‘E’ 문서로 부른다. ‘J’는 ‘야훼(Jahweh)’를 ‘E’는 ‘엘로힘(Elohim)’을 가리킨다. 이 두 개의 서로 다른 서사시가 후대 편집자에 의해 하나가 되어 히브리어 성서(구약성서)의 근간을 이루었다.[카렌 암스트롱 지음, 『성서 이펙트』, 배철현 옮김, 2013, 22쪽] [본문으로]
  8. 수메르 문명은 자연계의 여러 요소를 신적인 존재로 여겼다. 안(하늘의 신), 엔키(물과 지혜의 신), 엔릴(대지와 공기의 신), 니누르타(전쟁과 농업의 신), 두무지(죽음과 부활의 신) 등 자연현상들이 신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신들은 가나안을 거쳐, 이집트, 그리스로 넘어갔다. 올림포스 12신도 수메르 신화의 모방이다. [본문으로]
  9. 「신명」 32,17 [본문으로]
  10. 「신명」 32,8 [본문으로]
  11. 카렌 암스트롱 지음, 『성서 이펙트』, 배철현 옮김, 2013, 25쪽 [본문으로]
  12. 「시편」 96,4 [본문으로]
  13. 「시편」 89,7 [본문으로]
  14. 「시편」 47,15 [본문으로]
  15. 미셸 푸코 지음, 『주체의 해석학』, 심세광 옮김, 동문선, 2007, 358쪽. [본문으로]
  16. 「잠언」 29,8-22 [본문으로]
  17. 에리히 쳉어 편저, 『구약성경 개론』, 이종한 옮김, 분도출판사, 2012, 570쪽. ;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교 신학 특히 종교개혁 전통의 지평 안에서는 「시서와 지혜서」의 지혜에 대해 거듭 유보를 하고, 심지어 평가절하까지 해왔다. 야훼와의 관련성이 결여되어 있고, 현세 지향적인 성격은 세속적이며, 행위-현상 연계성과 결부된 행업과 보상의 교환관계 때문에 이른바 ‘율법’으로 이미 체계화 되어 있으며, 이것은 예수가 극복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냐는 것이 그 이유다.[에리히 쳉어 편저, 『구약성경 개론』, 이종한 옮김, 분도출판사, 2012, 577쪽] [본문으로]
  18. 「욥」 28,28 [본문으로]
  19. 「잠언」 9,10 [본문으로]
  20. 「잠언」 15,33 [본문으로]
  21. 「시편」 16,2 [본문으로]
  22. 「시편」 18,2-3 [본문으로]
  23. 「시편」 22,28-29 [본문으로]
  24. 「시편」 53,2 [본문으로]
  25. 「시편」 91,2 [본문으로]
  26. 「시편」 150,6 [본문으로]
  27. 「잠언」 3,18 [본문으로]
  28. 「지혜」, 13 [본문으로]
  29. 「지혜」 14,27 [본문으로]
  30. 「지혜」 14,13 [본문으로]
  31. 「지혜」 14,16 [본문으로]
  32. 「지혜」 6,5 [본문으로]
  33. 「지혜」 6,12 [본문으로]
  34. 「지혜」 7, 27 [본문으로]
  35. 미셸 푸코 외 지음, 『미셸 푸코의 권력이론』, 정일준 편역, 새물결, 1994, 117쪽. [본문으로]
  36. 삶의 기술로 남아 있던 시절의 지혜문학에서는 지혜를 찾고 배우라고 인간들을 고무하고 안내했던 반면, 바빌론 유배 이후에는 이 관점을 전도시킨다. 우선 시도되는 것은 지혜를 인격화시키는 것이다. 즉, 지혜는 여인으로 인격화되어, ‘여인 지혜’라는 관념이 생겨난다. 아울러 이스라엘의 토라(오경)를 하느님의 가장 위대하고 참된 지혜 선물로 보는 것이다. 모든 것을 주재하시는 하느님의 비밀이 바로 지혜인 것이다. 이제 삶의 기술이 더 이상 실천이성의 성취가 아니라, 유일신으로서 하느님의 선물이 되고 만다[에리히 쳉어 편저, 『구약성경 개론』, 이종한 옮김, 분도출판사, 2012, 573쪽]. [본문으로]
  37. 에리히 쳉어 편저, 『구약성경 개론』, 이종한 옮김, 분도출판사, 2012, 571쪽. [본문으로]
  38. 「욥기」 21,7-13 [본문으로]
  39. 에리히 쳉어 편저, 『구약성경 개론』, 이종한 옮김, 분도출판사, 2012, 596쪽 [본문으로]
  40. 「욥기」 9,24 [본문으로]
  41. 욥 이야기의 기본층은 바빌론 유배 전에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나, 최종적인 보편적·유일신적 경향은 유배 중·후 신학의 경향들과 더 일치한다. 천상 장면들에 의한 이야기의 확장은 유배에서 돌아온 초기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사탄(고발자)은 유배 후에나 고유명사로 나타난다. 아울러 욥 문학은 전통적 지혜신학과 비판적으로 대결하고 있는데, 특히 지혜와 하느님 경외를 동일시한 28,28은 뒤늦게 첨가했을 것이다. 아무튼 본문에서 설명한 자연과 역사에서 솟아난 지혜라는 나의 관점은 이런 역사적 상황과 정반대의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본문으로]
  42. 「욥기」 42,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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