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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약선생의 도서관

[약선생의 도서관] "제 갈 길을 가라, 남이야 뭐라든!"

by 북드라망 2016. 9. 27.


제 갈 길을 가라, 남이야 뭐라든!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




어떤 작가는 그 명성에 비하여 뒤늦게 찾아온다. 대단한 명성을 갖고 있고, 작품도 너무나 위대하여 언젠가는 꼭 만나리라고 다짐하지만, 주소가 바뀌어 뒤늦게 받아보게 되는 편지처럼, 그래서 친구의 절절한 사연을 그때서야 알게 된 사람처럼, 뒤늦게야 그를 만나곤 때늦은 후회를 하는 것이다.


내게는 시인철학자 단테(Dante Alighieri, 1265~1321)[각주:1]가 그런 사람이다. 그의 웅장한 문체와 사유는 익히 들어왔지만 내게는 영 인연이 없는 사람인 줄로만 알았다. 하긴 내게도 그와 아주 조그만 인연이 있긴 하다. 그것은 19세기 공산주의자 마르크스와 관련된다.


"나는 단테를 마르크스를 통해 처음 만났다." (그림 (Domenico Petarlini, 1860).)


대학교 4학년 때 지금도 존경하는 어느 선배에게서 『자본론』을 배웠다. 돌이켜보면 이 일은 내 삶에 매우 이례적이고 중대한 사건이었다. 취직 공부에 한창이어야 할 그때 『자본론』이라니, 조금은 어리둥절한 일이기도 했다. 아무튼 그때 선배는 『자본론』 1권의 모든 문장을 한줄 씩 읽어주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혼자 읽을 때는 전혀 모르겠는 문장들이 형이 읽기만 하면 그 의미가 어떤 마법을 가진 듯 귓전을 때리며 내 정신 안으로 들어왔다. 아마도 확신에 찬 형의 강독과 설명이 여전히 언어들 사이가 비어 있을 내 정신의 공간을 세차게 채워주었던 것 같다. 형은 버스 안에서도 내가 물어보면 그 자리에서 서슴없이 책을 펼쳐들고 강독을 해주었다. 그야말로 새로운 정신세계였다.


그런데 그때 내 귀에 쏙 들어온 강렬한 문구가 하나 있었는데, 글쎄 그게 마르크스의 말이 아니라 단테의 문장이었다. 그것은 다들 잘 아는 그 문구, 바로 “제 갈 길을 가라, 남이야 뭐라든!”[각주:2]이다. 제 갈 길을 가라, 남이야 뭐라든! 햐, 이런 멋진 말이 다 있더냐. 형의 입으로 읽어줘도 좋았고, 속으로 내가 되뇌어도 좋았다. 뭔가 내 신체에 강한 힘을 불어넣어주는 신비함마저 느끼게 해주었다. 그러나 단테는 그 뒤로 내게 오랫동안 찾아오지 않았다.


마르크스가 이 문구를 인용한 이유는 정치경제학의 과학적 성격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의 독특한 성격 때문에 인간의 가장 추악한 감정이랄 수 있을 사리사욕(private interest)이 자유로운 과학적 연구를 막는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마르크스는 강하게 공언하길, 자신을 과학적으로 비판한다면 무엇이든 환영하겠지만, 이른바 여론의 편견에는 단호하게 대처하겠다면서, 바로 이 문장, 그러니까 “제 갈 길을 가라, 남이야 뭐라든!”을 인용한 것이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나 단테를 읽어 보니, 마르크스가 단테의 원래 문장을 변형하였다는 것을 알았다.[각주:3] 스승 베르길리우스를 따라 정죄산으로 올라가는 연옥 길에서, 순례자 단테가 뒤따라오는 게으른 영혼들의 재잘거리는 소리에 관심을 빼앗긴다. 그러자 베르길리우스가 크게 꾸짖으며 이렇게 외쳤다. “내 뒤를 따르라!(Vien retro a me)[각주:4]  저들은 떠들도록 내버려 두고, 바람이 불어쳐도 끝자락조차 흔들리지 않는 탑처럼 굳건하여라!”(「연옥편」 5곡 13행)[각주:5] 마르크스는 이 시구의 “내 뒤를 따르라!”를 “제 갈 길을 가라”(Segui il tuo corso)로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것도 이탈리아어 문장으로 바꾸는 수고를 다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나는 뒤늦게 『신곡』(원제:La comedia di Dante Alighieri)[각주:6]을 읽고 마르크스의 이런 변형이 정말 기가 막힌 한 수라는 것을 깨달았다.


『신곡』은 온갖 상상력으로 가득하다. 특히 지옥은 마치 팀 버튼의 그로테스크한 영화 장면처럼 무척이나 발랄한 상상력이 넘치는 곳이다. 너무나 앞을 보고 싶어서 너무 빨리 가려다 보니, 등을 가슴으로 삼고 있는 자가 있으며(「지옥편」 20곡 37행),  검붉은 피가 흐르는 나무가 말을 하고(「지옥편」 13곡 34~42행), 모래사장 위로 거대한 불비가 내리고 있으며(「지옥편」 14곡 28행), 턱부터 똥구멍까지 찢어져서 창자를 덜렁덜렁 매달려 있는 사람도 보일 뿐 아니라(「지옥편」 28곡 22행), 수종이 물기를 죄다 빨아들인 탓에 사지가 뒤틀려버려 류트처럼 생긴 자도(「지옥편」 30곡 49행) 있다. 온갖 기괴한 것은 여기 다 모여 있지 싶을 정도로 지옥은 상상력의 보고다. 연옥과 천국도 지옥 못지않은 상상들이 판을 친다.   


그림 속의 악기가 바로 류트다. 그림은 프란츠 할스의 <류트를 연주하는 어릿광대>.


그러나 나에겐 그런 상상력보다 더욱 강렬하게 다가오는 것들이 있었다. 그것은 이야기의 전개 방식과 순례자 단테의 체험들이다. 『신곡』은 스승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처럼 출발부터 그리스의 서사시들과 다르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 노래하는 것은 여신 무사(Mousa)이지 호메로스 자신이 아니다. 호메로스는 무사의 노래를 사람의 언어로 번역하여 전달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각주:7] 그러나 『아이네이스』의 베르길리우스는 다르다. 그는 스스로 ‘내가 노래한다’(cano)고 말한다. 『아이네이스』의 첫 구절은 “무구들과 한 남자를 나는 노래하노라(Arma virumque cano)”이다.[각주:8] 그는 호메로스처럼 여신에게 노래해 달라고 말하지 않는다. 자기가 스스로 이야기를 창작한다는 사고방식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노래하다’란 뜻의 ‘cano’(카노)는 소리 내어 노래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시를 짓는다’, ‘시를 읊다’는 의미도 포함한다. 그러니까 그는 자기가 스스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지, 여신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전달해주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신곡』은 바로 이런 베르길리우스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단테도 이렇게 기원한다. “아, 뮤즈여!(O muse) 지고의 지성이여! 날 도우소서! 아, 내가 본 것을 기록하는 기억이여! 여기서 그대의 고귀함을 드러내 다오”(「지옥편」 2곡 7~9행)[각주:9] 그는 자신이 본 것을 기록하고자 하지, 여신의 이야기를 전달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야기를 전개하는 장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아이네이스』가 패배한 전투로부터 시작한 것처럼, 『신곡』은 순례자가 유혹에 무릎을 꿇고 방황을 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순례자도 아이네이스처럼 패배자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도 호메로스의 서사시와 다르다. 호메로스가 영웅 아킬레우스의 전쟁 승리와 영웅 오뒷세우스의 조국 귀환을 노래하고 있는 것에 반해, 베르길리우스와 단테는 패배와 도망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이탈리아 사람이라면 모두 알고 있다는 그 유명한 「지옥편」의 첫 3행을 보자.

 

우리 인생길 반 고비에

올바른 길을 잃고서 난

어두운 숲에 처했었네.


Nel mezzo del cammin di nostra vita

mi ritrovai per una selva oscura

che la diritta via era smarrita

 - 「지옥편」 1곡 1~3행[각주:10]



여기서 “인생길 반 고비”는 35세 정도로 단테가 피렌체의 프리오레[각주:11]자리에 앉는 때이다. 아주 높은 자리에 올랐고, 세상 사람들이 기대와 존경은 끝이 없다. 이제 찬란한 미래만 있을 듯한 그런 시기다. 그러나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 순간 나는 올바른 길을 잃고서 어두운 숲(selva oscura, 수풀)[각주:12]에 처해 있는 걸 깨닫는다.




그곳은 아름다운 이상도, 새로운 의욕도 다 사라져버린 황폐한 곳. 숲은 일상적으로 유혹이 끊임없이 다가오는 악마의 거처이다. 표범(성적 유혹), 사자(권력의 유혹), 암늑대(식욕의 유혹)가 차례로 공격하면서 순례자가 앞으로 나가는 것을 방해한다. 순례자 단테는 포기하고 되돌아가고만 싶은 이 황폐한 곳에서 시작한다. 실제로 순례자는 늑대의 유혹(식욕) 앞에서 그만 포기하고 속세로 내려가려고 했다. 유혹에 무릎을 꿇는 형국인 것이다.


그러나 비탈길을 내려가려는 단테를 붙잡는 사람이 나온다. 지금은 “사람이 아니나 전에는 사람이었”던 사람, 만토바의 위대한 시인 베르길리우스이다. 그가 말한다. “어찌하여 거대한 고통으로 돌아가려 하는가? 어찌하여 모든 기쁨의 시작이며 근원인 저 환희의 산에 오르지 않는가?”(「지옥편」 1곡 76~78행)[각주:13] 다시 말하면 지금 유혹을 인내하고 오르려는 곳이 환희의 땅인데, 왜 그것을 못 참고 고통의 세계로 다시 돌아가려고 하느냐는 질책이다. 그리고는 순례자 단테는 베르길리우스의 손에 이끌려 지옥으로 들어간다.


『신곡』 전체를 좌우할 앞부분을 좀 더 읽어 보자. 「지옥편」 3곡에는 나쓰메 소세키가 런던 유학시절 런던탑에 갔을 때 머리에 떠올렸던 지옥문의 비명이 나온다.[각주:14] 이제 이 문을 넘어서면 지옥이 펼쳐질 것이다. 지옥이 어떤 곳인가? 통념적으로 지옥은 무시무시한 곳이다. 현세의 죄를 품고 들어가는 곳이며, 그 때문에 온갖 형벌을 받게 되는 곳이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곳이다. 그런데 이 지옥문의 비명은 아주 묘하다.


나를 거쳐서 길은 황량의 도시로

나를 거쳐서 길은 영원한 슬픔으로

나를 거쳐서 길은 버림받은 자들 사이로


Per me si va ne la città dolente,

per me si va ne l'etterno dolore,

per me si va tra la perduta gente.

- 「지옥편」 3곡 1~3행[각주:15]


지옥문은 자신을 거쳐서(per me)[각주:16] 절망의 장소인 황량의 도시로 가라고 한다. 그리고 나서 이런 말도 덧붙인다. “여기 들어오는 너희는 모든 희망을 버려라(Lasciate ogne speranza, voi ch'intrate)[각주:17] 지옥은 죽음의 희망(speranza di morte)조차 없는 곳이다(「지옥편」 3곡 46행).


"여기 들어오는 너희는 모든 희망을 버려라, 지옥은 죽음의 희망조차 없는 곳이다" 작품은 로뎅의 <지옥문>


나는 여기서 아주 묘한 감각을 느낀다. 내게는 지옥문이 ‘또 다른 나’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문장은 내가 ‘나’에게 지옥으로 들어가라고 말하는 것 같다. 나와 같은 느낌이었는지, 소세키도 이 부분을 부드럽게 해석하지 않고 아주 강한 표현을 이용해 거칠게 번역한다. “슬픔의 나라로 가려고 하는 사람은 이 문을 거쳐서 가라. 영겁의 가책과 맞부딪친 사람은 이 문을 거쳐서 가라. 저주받은 무리들 속으로 가려는 사람은 이 문을 거쳐서 가라.”(「런던탑」)[각주:18]
 

나를 거쳐서 지옥으로 가라. 그리고 여기서부터는 희망을 버려라. 소세키의 번역은 다른 세계로 가기 위해서 나는 불가피하게도 ‘나’를 밟고 가야 한다는 뜻으로 새기게 한다. 그것은 ‘또 다른 나’가 ‘기존의 나’에게 내리는, 마치 명령과도 같은 소리로도 들린다. 온갖 부정적인 진실이 뒤엉킨 지옥의 지대를 통과해야만 새로운 세계가 가능하다는 듯이 말이다. 이 의미라면 모든 새 출발은 지옥으로부터 출발한다. 낯선 곳으로의 출발선에 섰을 때 기존 세계에 대한 희망은 모두 버려야 한다. 새로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기존 세계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버리고 길을 떠나야 한다는 뜻이다. 모든 미련일랑 남겨두고, 나를 밟고서 지옥으로 가라.


그러나 들어가자마자 본 지옥에는 뜻밖에도 현세에서 위대하다던 사람들이 모조리 있다. 제1옥인 림보(limbo)[각주:19]에 있는 사람들은 상상을 초월한다. 호메로스, 호라티우스, 오비디우스 같은 위대한 고대 시인들, 헥토르, 아이네이아스, 카이사르 같은 신화적인 영웅들, 심지어 아리스토텔레스[각주:20], 소크라테스, 플라톤, 키케로, 세네카 같이 더없이 훌륭한 철학자들도 이곳 지옥에 있다(「지옥편」 4곡 88~144행).[각주:21]


물론 세례를 받지 않아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었다는 게 그 이유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더욱 중요한 이유가 있어 보인다. 그것은 작가 단테가 그들을 지옥에 배치함으로써 순례자 단테에게 미치는 효과이다. 새로운 길을 가는데 언제나 힘이 들고 겁이 나기 마련이다. 지옥문을 통과했지만 이 세상의 끝자락, 더 이상 내려갈 곳 없는 지옥을 돌파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사정이 이러한데도 단테는 더 깊이 내려간다. 내가 떨어질 수 있는 가장 밑바닥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깨닫기 위해서 더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다. 자신의 구원이 실패했을 때 떨어질 수 있는 최후의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똑똑히 보는 것이다. 단테도 뒤에 이런 말을 한다. “거룩한 영혼들이여, 불을 먼저 겪지 않고서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다”[각주:22] 그 누구라고 하더라도, 심지어 소크라테스라고 하더라도 지옥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고 체험해야 하는 것이다. 전혀 희망이 없는 망자의 무리들 속에서 ‘희망 없음’이란 어떤 상태인지를 체험하고, 그 체험을 내 신체에 장착시켜야 한다. 그래야 앞으로 나갈 힘을 키운다. 이런 의미에서 지옥 순례는 작가 단테가 사고 실험을 통해 체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 단테는 순례자 단테로 하여금 이런 효과를 얻도록 하기 위해 “불을 먼저 겪도록” 배치하고 있는 것이다.




그 순간 현세의 통념이 뒤집힌다. 현세에 위대하다는 사람들도 지옥에 머물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순례자의 감각은 완전히 달라진다. 우선 그런 위대한 사람도 들어올 수 있는 곳이라는 점에서 나도 그들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두렵지 않다. 또한 무엇보다 현세적인 명성이나 위대함이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기준이 아니라는 점도 명확해진다. 이제 자신이 가고 있는 길 이외에 다른 곳으로 눈 돌리는 낭비를 더는 하지 않게 될 것이다. 나중에 베르길리우스도 “이 길밖에 다른 길(altra via)은 없다” “non lì era altra via che questa per la quale i' mi son messo.”[각주:23]고 단언 하는데, 그것은 연옥에만 적용될 말이 아니라 여기 지옥에도 포괄해야만 하는 말이다.


더군다나 정의상 죄는 깊으면 깊을수록 더 뚜렷해져서 순례자 단테의 인식을 더욱 명료하게 해줄 것이다. “기쁨이든 고통이든 모든 것은 완전하면 완전할수록 더 뚜렷한 법이다”(「지옥편」 6곡 106~108행)[각주:24] 다시 말하면 지옥 순례는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더욱 철저히 해주는 효과를 준다. 따라서 지옥은 단테의 사유전개상 맨 처음에 나오는 장면으로서 무척이나 적당한 것이다.


이제 그런 사고실험을 거쳐 지옥을 넘어 가면 연옥이 나온다. 북반구의 지하인 지옥 밑바닥으로부터 비밀의 길을 지나 남반구의 땅속으로 나오면, 비록 땅속이지만 별이 보이고, 바깥 공기가 있는 연옥이 있다. 이곳은 감옥이지만 그나마 하늘이 보이는 감옥이다. 지옥(inferno)은 희망이 없는 반면, 연옥(purgatorio)은 희망이 있는 곳이다. 즉 연옥에서는 혼이 씻길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 그곳은 “인간 영혼이 정화되고 천국에 오를 준비를 하는 왕국”인 것이다(「연옥편」 1곡 4~6행)[각주:25]


들여다보면 연옥은 산의 형태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산으로 높이 솟은 섬이다. 이 ‘섬-산’이 곧 연옥의 정죄산이다. 이 산 정상에 오르면 낙원이 펼쳐진다. 바로 순례자 단테가 가려는 천국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연옥의 길은 자신의 영혼을 정화하면서 자기를 천국 사람으로 바꾸어 가는 여정이다. 지옥에서 최악의 상태에 대해 사고실험을 했다면, 연옥에서는 그것을 딛고 싸우는 전투를 배운다. 이 전투 끝에는 천국이 있으리라 믿으며. 따라서 이 지대는 어떤 변형이 존재하는 곳이다.


그러나 여기에 중대한 것이 있다. 그것은 자기 스스로 자신을 정화시켜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자유를 찾아가는 길이기도 하다. 베르길리우스도 연옥을 지키는 카토에게 순례자 단테를 소개하며 “이 사람은 자유를 찾아서 가고 있소” (「연옥편」 1곡 65, 71행)[각주:26]라고 말한다. 작가 단테가 이 사실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연옥은 자유의 길이다.




이 여정에서는 갈수록 영혼이 정화되므로 곧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는 자신감이 점점 커지는 지대이다. “누구에게도 허락하지 않으신 방법으로 그분의 궁전을 보게 될 것이니”(「연옥편」 16곡 40행)[각주:27] 또한 위로 오를수록 더 쉬워지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오르는 일이 한결 가벼워져서 배가 강을 따라 내려가듯 기분이 좋게 느껴질 때면 곧 길의 끝에 도달할 것이라는 희망도 있다. (「연옥편」 4곡 88~94행)[각주:28]


그래서인지 이곳은 지옥에는 없던 ‘바다의 일렁임(il tremolar della marina)’도 보인다. (「연옥편」 1곡 115~117행)[각주:29] 즉 이곳은 변화가 있는 곳이다. 다시 말하면 바다로 상징되는 모험이 있고, 운명의 전변이 가능한 곳이다. 이 의미에서 연옥은 길을 잃으면 되돌아오는 영원회귀의 점과도 같다. 올바른 길을 잃고 어두운 숲에 처했을 때, 그래서 모든 희망을 버리고 모험에 나서야 할 때 누구든지 항상 돌아와 다시 서는 섬. 바로 그런 곳이 연옥이다. 그리스도교식으로 말한다면 일종의 회심(回心, Conversion)과도 같은 지대인 것이다.


일본 소설가 오에 겐자부로는 마흔 여덟부터 쉰 살이 될 때까지 무려 3년 동안 오로지 『신곡』만 읽었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쓴 첫 소설이 『그리운 시절로 띄우는 편지(懷かしい年への手紙)』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신곡』과 단테 연구서만 읽으며 살아온 사람으로 설정되어 있다. 겐자부로 자신이 독학으로 『신곡』과 단테에 대해서 공부한 내력들을 보면, 주인공은 겐자부로의 또 다른 내면일 것이다.


화자인 소설가(이는 현실의 겐자부로이다)는 살해당한 주인공을 수습하면서 찾아간 인공 호수 중앙의 작은 섬을 연옥의 섬과 중첩시킨다.[각주:30] 언제나 이곳으로 되돌아오겠다고 다짐하면서. 그리고 이제 쓸 모든 작품은 그리운 시절(연옥)로 띄우는 편지가 될 것이라고 다짐하면서. 언제나 내가 되돌아가 이야기를 나눌 죽은 친구가 그리운 시절의 이 섬(연옥)에 있다고 보고, 살아 있는 동안 나는 먼저 간 친구들에게 편지를 쓰며 항상 새로운 마음을 가지겠다는 구상이다. 그것은 자신의 길을 가기 위한 다짐이기도 하다.


결국 단테 읽기와 이 소설은 그에게 새로운 길로의 전환을 의미하고, 매 순간 다시 돌아올 다짐이라고 할 수 있다. 오십 대를 시작하면서 한 이 다짐처럼 그 이후 겐자부로는 이 소설의 주인공에게 편지를 띄운다는 심정으로 삼십년 넘게 다시 소설을 쓸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각주:31] 그렇다면 단테의 『신곡』 읽기가 겐자부로에겐 소설가로서 다가온 일종의 컨버전(Conversion, 회심)이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컨버전의 의미가 인간이 그리스도교인이 되거나, 지금껏 믿어온 것에서 더욱 진정한 그리스도교를 향해 신앙을 바꿔가는 것이라고 한다면, 단테 읽기가 겐자부로 자신에게는 지금까지 수행하여온 소설가로서의 임무를 더욱 강렬하게 느끼게 하고 더 근본적으로 수행하게 된 계기라고 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연옥은 삶의 새로운 용기를 주는 곳이다. 다시 말하면 연옥은 언제나 새로이 시작할 때 되돌아가는 영원회귀의 출발점, 어떤 컨버전이다.


그러나 이곳에도 게으른 영혼들이 가득하다. 「연옥편」 제4곡에는 게으른 자의 상징으로 '벨라콰'라는 단테의 지인이 나온다. 그는 피렌체의 악기제조 직인이었다. 그는 지나가는 순례자에게 "올라간들 무슨 소용인가"라며, 연옥에서도 그 게으름을 끝내지 않는다. 물론 그는 현세에서 죽을 때까지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연옥에서도 현세에서 산 세월만큼 기다려야 한다.


단테와 베르길리우스가 벨라콰를 만났다.


그럼에도 나는 그가 그곳에서 뭔가라도 했어야지 않은가하는 생각이 든다. 그는 여전히 정해진 것 안에서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말을 내뱉고 그저 게으르기만 한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연옥을 연옥답게 '살아내지' 않는다. 그는 컨버전을 획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연옥편」 제9곡에 보면 연옥의 문지기는 베드로에게 열쇠를 전해 받으며, 죄를 씻을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하면 자격이 없더라도, 심지어 지옥탈주범이더라도 들여보내도 괜찮다는 취지의 말도 전해 듣는다. “설령 실수로 열더라도 잠가 두지는 말라고 하셨다” (「연옥편」 9곡 129행)[각주:32] 그러니까 이 지대는 뭔가 애를 쓰면 상황이 바뀌는 공간인 것이다. 어쨌든 애를 쓰고 살아야 한다는 것. 나는 살면서 이것보다 더 중요한 태도를 본 적이 없다. 연옥의 컨버전은 애를 쓸 때 찾아온다. 편안이라는 환상은 그야말로 의욕을 좀먹는 환상인 것이다.
 

천신만고 끝에 연옥의 끝에 오면, 드디어 단테의 생각이 좀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베르길리우스가 자신의 손을 놓으며 이렇게 말한다. “나의 지성과 기술(con ingegno e con arte)로 널 여기까지 데려왔으나, 여기부터는 너의 기쁨이 너의 길잡이가 될 것이다.”(「연옥편」 27곡 130~131행)[각주:33] 이제 너는 너의 기쁨을 깃발 삼아서 앞으로 전진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제27곡의 마지막에는 다음과 같은 말로 끝을 맺는다.


이젠 내 말이나 눈짓을 기다리지 마라!

너의 의지는 곧도 바르고 자유로우니
그 뜻대로 해야 할 것이다.


너의 머리에 왕관과 면류관을 씌운다.”

- 「연옥편」 27곡 139~142행


지금까지 스승 베르길리우스의 손에 이끌려 지옥과 연옥을 순례하였다. 그러나 지옥을 체험하고, 연옥의 고통을 견디며 정죄산에 오르면, 이제 자기 자신만을 깃발 삼아 자기 스스로  전진해야 한다. 이마미치 도모노부에 따르면 여기서 “그 뜻대로 해야 할 것이다”는 “네 스스로 주인이 되게 하여라”로 해석하기도 한다. 즉 이제 순례자 단테는 자기의 주인이 됨으로써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획득한다.


이제 스스로 주인이 되는 때에 이르러서야, 순례자 단테는 천국으로 들어간다. 당연히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신성’을 지녀야 한다. 단테의 표현대로 한다면 “인성을 초월한다.”(「천국편」 1곡 70행)[각주:34] 그러므로 순례자는 천국의 계단을 오르며 점점 ‘초인’이 되어 간다고 할 수 있다. 일종의 변신인 것이다. 단테는 이것을 마치 어부 글라우코스가 해초를 먹고 바다의 신으로 변신할 때의 느낌과 같다고 표현한다.[각주:35] 그러나 이때 인성을 초월하는 것은 다른 게 아니다. 그것은 자기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변신은 자기의 주인으로 변형됨을 말한다. 하느님은 그 순간 ‘왕관과 면류관’을 씌운다.



마침내 순례자 단테는 「천국편」을 거치면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아니, 이미 새로 탄생한 사람으로서 작가 단테는 지상에서 천국을 기억하고 있다.


나는 변한 목소리와 또 다른 양털을 지닌 시인으로

그들에게 돌아갈 것이다. 그래서 내가

세례를 받은 샘에서 면류관을 받을 것이다.”

- 「천국편」 25곡 7~9행[각주:36]


그리고는 그는 이 세상이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의 끝을 바라본다. 새로운 세상이란 이 끝에서 바라본 전경이다.


감히 영원한 빛을 응시하도록 허락하신

풍요의 은총이시여! 저의 눈은 그 빛 속에서

저 가능성의 끝까지 도달했습니다.


나는 그 깊숙한 곳에서 보았다.
우주의 조각조각 흩어진 것이
한 권의 책 속에 사랑으로 묶인 것을

- 「천국편」 33곡 82~87행[각주:37]


단테는 이렇게 묶인 사랑의 매듭을 보고, 어떤 우주적 형식을 깨닫고 만다. 바로 그 순간 마음은 기쁨으로 마구 뛰었다(「천국편」 33곡 91~93행).[각주:38] 사실 이 기쁨은 단테가 「천국편」에서 끊임없이 강조한 ‘자유의지’의 회복으로 얻은 것이다. 단테의 하느님은 그저 죄를 사해 주시는 것이 아니다. 단테의 하느님은 인간이 스스로 거듭날 수 있도록 할 뿐이다.[각주:39]


그것은 내 자신이 걸어갈 가능성의 끝과도 같다. 하느님은 그것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그런 표현으로 순례자가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와줄 뿐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하느님은 숭배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여! 그리스도여!’ 하고 외치는 자들이 심판의 날에 그리스도를 모르는 자들보다 그분 곁에 더 가까이 서리라는 보장은 없다.”(「천국편」 19곡 106~108행)[각주:40] 이렇게 해석되는 순간, 하느님은 숭배해야할 외부의 것이 아니라, 내가 걸어갈 길의 가능성이 된다. 하느님은 그 가능성의 끝이다. 천국은 그 끝에서 바라본 전경이다. 사랑으로 묶인 한권의 책과 같은 천국.



이 지점에 오면 마르크스가 바꾼 문장이 왜 기가 막힌 변형인지 알게 된다. 이 책은 당연히 기독교적 색채가 짙은 텍스트이다. 그러나 단테의 세계로 들어가서 단테가 처한 상황과 배치를 "나"의 지평으로 재배치하면 그것은 완전히 다르게 읽힌다. 특히 지옥문에 쓰여 있는 문구가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를 사로잡았다. 이미 고난에 빠진 순례자가 묘하게도 더 아래로 내려가서 "희망 없음"이란 무엇인지를 강렬한 상상력으로 실험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점점 자신을 변신시켜가며 천국이라는 가능성의 끝에 도달한다. 결국 마르크스의 말대로 자신의 길을 간 것이었다. 


작가 단테는 자신의 이 글을 통해서 어떤 세계로 전진했는가. 그는 순례자 단테로 하여금 자신의 길이 갈수 있는 가능성의 끝을 가보도록 하였다. 마르크스는 의식하지 않았지만 단테가 진정 말하고자 했던 것을 되찾아 준 셈이었다.


글_약선생(a.k.a. 강민혁)


신곡 세트 - 전3권 - 10점
단테 알리기에리 지음, 박상진 옮김, 윌리엄 블레이크 그림/민음사


  1. 각주 1) 단테는 시인이자 철학자이다. 단테 같은 시인철학자는 니체 정도가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니체는 초기에는 자신을 시인으로 정립하고자 애를 썼다. 물론 니체는 후기에 이르렀을 때 시라는 형식에 다소간 회의적으로 되었지만. 여전히 그는 시의 형태로 철학을 했다. 그런 의미에서 단테는 니체가 구사하려했던 ‘철학시’(이건 내가 지은 명칭이다)의 선구자가 아닌가도 싶다. 참고로 『비극의 탄생』에서는 본인도 시인이었던 니체가 시에 어느 정도 기대를 갖고 있었던 듯하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이르면 시와 시인을 상당히 심각하게 의심한다. 이 책 2부 「시인에 대하여」에 보면 니체는 시인이 얕은 바다에 불과해서 피상적이며, 얼마간의 관능적 쾌락과 권태 정도를 생각해낼 뿐이라고 좀 야박하게 이야기한다. 그리고 시인들이 써낸 글이란 게 고작해야 바다에 잠긴 낡아빠진 ‘신의 두상’(가짜 불멸)을 길어 올린 것에 불과하다고도 한다. 그러니까, 시인들이 신(여기서 신은 모든 유일자들을 말한다)을 넘어서 새로운 것들을 보여준다고 하지만, 정작 보여준 것을 보면 그리 새로울 게 없이 신(기존 유일자)의 다른 버전이거나, 신을 넘어섰다는 거짓말만 반복할 뿐이라고 좀 가혹하게 평가하고 있다. 결국 후기 니체에게 시인은 무능한 존재이다. 시를 짓는 것과 철학적 사유 간의 간격을 착각한다는 비판인 듯도 하다. 이쯤에 이르면 니체가 시라는 형식 자체를 부정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하게 된다. 물론 「시인에 대하여」 마지막에 니체는 시인들이 그런 그 자신에게 지쳐버려서, 비로소 자기 자신에게 시선을 돌리고 변화된다고 말하고, 모든 정신의 참회자(penitent of the spirit)는 그런 시인들로부터 솟아난다고 끝을 맺긴 한다. 그런데 그게 시와 시인이라는 형식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인지는 분명하게 말하지 않는다. 내가 보기엔 니체가 시와 시인을 인간주의의 마지막 형식으로 여기는 것 같다. 이런 맥락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시도되고 있는 문장들은 니체의 새로운 형식으로서, 그리고 미래 철학의 형식으로서 ‘철학시’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도 싶다. 이 의미에서 니체는 단테의 후예이다.[니체 지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옮김, 2007, 215쪽.; Friedrich Nietzsche, 『Thus Spoke Zarathustra』, Translated with an introduction by R. J. HOLLINGDALE, PENGUIN BOOKS, 2003, p. 149] [본문으로]
  2. 각주 2) 카를 마르크스 지음, 『자본론 Ⅰ[상]』(2015년 개역판), 김수행 옮김, 비봉출판사, 2015, 8쪽. ; Karl Marx, 『Capital Volume Ⅰ』, translated by Ben Fowkes, Penguin Books, 1990, p. 93 [본문으로]
  3. 각주 3) 펭귄판에는 이 사실이 주석사항에 설명되어 있다. 그러나 김수행 선생님이 번역한 한글판에는 이 주석이 없다. [본문으로]
  4. 각주 4) 이 글의 이탈리아어들은 이마미치 도모노부의 『단테 「신곡」 강의』의 내용을 따르거나, 구글의 이탈리아어 원본 조회 내용을 따랐다. 용어 확인이 필요한 경우는 네이버 이탈리아어 사전에서 확인하였다. [본문으로]
  5. 각주 5) 단테 알리기에리 지음, 『신곡 연옥편』, 박상진 옮김, 민음사, 2007, 45쪽. [본문으로]
  6. 각주 6) 단테는 자신의 작품을 ‘코메디아(Comedia)’라고만 불렀다. 그리스어에서 ‘트라고디아(τραγωδία, tragodia)’는 비극(tragedy)이 되었고, ‘코모디아(comodia, κωμῳδία)’는 희극(comedy)가 되었다. 그렇다면 형식논리적으로 단테의 글은 희극이라고 불러야 맞다. 아니나 다를까, 단테는 그의 강력한 후원자이고, 나중에 「천국편」을 헌정하기도 했던 베로나의 영주, 칸 그란데 델라 스칼라에게 이런 편지를 쓴다. “나는 희극(코메디아)도 지옥의 비참함에서 시작하지만, 천국의 행복으로 열매를 맺게 됩니다”(이마미치 도모노부 지음, 『단테 「신곡」 강의』, 이영미 옮김, 안티쿠스, 2008, 125쪽.) 그렇다면 단테의 코메디아는 비극을 품고 이야기가 전개되는 희극이다. 또한 고대 이래 19세기 중반까지 서양 고전극은 본래 모두 시극(詩劇)이었다고 하니, 코메디아는 당연히 시극이기도 하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단테의 코메디아는 비극을 품은 희극이면서 동시에 시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이런 코메디아의 이름이 가지는 의미가 단테가 서술한 방식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단테는 작품을 ‘지옥’이라는 비극적인 상황에서 시작하여, ‘연옥’이라는 변화의 지대를 거쳐, ‘천국’의 기쁨으로 끝을 맺기 때문이다. 이것은 비극에서 시작하여 희극으로 끝나는 여정인 것이다. 여기에다가 ‘신성한(divina)’을 붙인 사람은 한참이나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이 작품에 최초의 주석서를 쓴 보카치오이다. 1555년에 가서야 신곡은 ‘La Divina Commedia’라는 지금의 이름으로 확정되었다. 그러나 나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작품은 원래 제목대로 그냥 『코메디아』(원제:La comedia di Dante Alighieri)로 놔두어야 했다. 비탄과 환희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그런 작품으로서 말이다. [본문으로]
  7. 각주 7) 호메로스 지음, 『일리아스』, 천병희 옮김, 도서출판 숲, 2007, 25쪽. ; 이런 시작은 『오뒷세이아』도 마찬가지다. 서사시의 첫 구절은 이렇다. “들려주소서, 무사 여신이여! 트로이아의 신성한 도시를 파괴한 뒤 많이도 떠돌아다녔던 임기응변에 능한 그 사람의 이야기를.” (호메로스 지음, 『오뒷세이아』, 천병희 옮김, 도서출판 숲, 2006, 23쪽.) [본문으로]
  8. 각주 8) 베르길리우스 지음, 『아이네이스』, 천병희 옮김, 도서출판 숲, 2007, 22쪽. [본문으로]
  9. 각주 9) 단테 알리기에리 지음, 『신곡 지옥편』, 박상진 옮김, 민음사, 2007, 16쪽. [본문으로]
  10. 각주 10) 단테 알리기에리 지음, 『신곡 지옥편』, 박상진 옮김, 민음사, 2007, 7쪽. [본문으로]
  11. 각주 11) 단테는 1300년에 피렌체의 ‘프리오레(priore)’라는 중요한 직위에 선출된다. 프리오레는 장관이라는 의미이며, 지금으로 치면 한 도시국가의 ‘총리’ 쯤 되는 지위이다. 그러나 피렌체의 정세는 복잡했다. 교황파 겔프당(Guelf)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지지하는 황제파 기벨린당(Ghibellin) 간에 정쟁이 끊이지 않았다. 단테는 겔프당의 지도자였다. 겔프당이 피렌체를 지배했지만, 그 안에서도 흑당과 백당으로 나뉘어 싸우고 있었다. 결국 흑당이 교황과 백당을 분리시키는 데 성공하면서, 백당에 속한 단테는 피렌체에서 영구추방 당하고 만다. 그 후 이탈리아 전역을 도망 다니며 망명생활을 했고, 마지막에는 현재의 라벤나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단테는 1321년 9월에 라벤나에서 죽을 때까지 단 한 번도 고향 피렌체로 돌아갈 수 없었다. 자기 삶의 뿌리가 있는 피렌체에서 서른일곱에 추방령을 당한 단테가 자신의 고향으로 되돌아 갈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큰 괴로움이었다. 『신곡』은 13~14세기의 피렌체의 역사 속에서 단테의 이런 체험이 고스란히 스며들어가 있는 책이다. [본문으로]
  12. 각주 12) 본래의 올바른 길에 대비되는 곳으로 예부터 전해 오는 상징이다. 아마도 첫 구절이므로 누구나 아는 쉬운 상징을 써서 문장을 구성했을 것이다. [본문으로]
  13. 각주 13) 단테 알리기에리 지음, 『신곡 지옥편』, 박상진 옮김, 민음사, 2007, 12쪽. [본문으로]
  14. 각주 14) 나쓰메 소세키의 『런던 소식』(노재명 옮김, 도서출판 하늘연못, 2010) 195~196쪽. [본문으로]
  15. 각주 15) 단테 알리기에리 지음, 『신곡 지옥편』, 박상진 옮김, 민음사, 2007, 26쪽. [본문으로]
  16. 각주 16) 나중에 “나” 대신 “손”이 들어간 문장이 나온다. “길잡이가 내 손을 잡고(per mano) 피가 흐르는 상처 때문에 하염없이 울고 있는 숲으로 끌고 갔다.”(「지옥편」 13곡 130~132행) 아마도 내가 나를 밟고 건너가는 것도 스승의 도움이 필요한 모양이다. (단테 알리기에리 지음, 『신곡 지옥편』, 박상진 옮김, 민음사, 2007, 134쪽.) [본문으로]
  17. 각주 17) 이마미치 도모노부의 강의에 따르면 이 문장은 ‘모든(OGNI)’ ‘희망(SPERANZA)’을 ‘버려라(LASCIATE)’, ‘너희 여기에 들어오는 자(VOI CH’ENTRATE)’이다. 그런데 LASCIATE는 ‘남겨 두어라’라는 의미로 ‘(그곳에) 남겨 두고, 가지고 들어오면 안 된다’라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하다고 한다. 즉, 버리기 힘든 것이지만 놓아두고 떠나라는 느낌이라는 것이다.(이마미치 도모노부 지음, 『단테 「신곡」 강의』, 이영미 옮김, 안티쿠스, 2008, 187쪽.) [본문으로]
  18. 각주 18) 나쓰메 소세키 지음, 『런던 소식』, 노재명 옮김, 도서출판 하늘연못, 2010, 195쪽. [본문으로]
  19. 각주 19) 그리스도를 믿을 기회를 얻지 못했던 착한 사람이나 영세를 받지 못한 어린아이 등의 영혼이 머무는 곳으로 지옥과 천국 사이에 있다. 지옥 속이긴 하지만 지옥에 이르는 강을 건너 맨 먼저 나오는 곳이다. 지옥의 다른 곳과 비교하면 그렇게까지 절망적이지만은 않다. [본문으로]
  20. 각주 20) 단테에게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장 위대하다. 왜냐하면 단테는 당시 최신 철학자로서 토마스 아퀴나스를 따랐고, 그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이기 때문이다. 그의 책 『신학대전』에서 ‘철학자’는 별 말이 없는 한 아리스토텔레스이다. [본문으로]
  21. 각주 21) 단테 알리기에리 지음, 『신곡 지옥편』, 박상진 옮김, 민음사, 2007, 45~46쪽. [본문으로]
  22. 각주 22) 「연옥편」 27곡 10~11행(단테 알리기에리 지음, 『신곡 연옥편』, 236쪽.) [본문으로]
  23. 각주 23) 「연옥편」 1곡 63행 (『신곡 연옥편』, 11쪽.) [본문으로]
  24. 각주 24) 『신곡 지옥편』, 45~46쪽. [본문으로]
  25. 각주 25) 『신곡 연옥편』, 7쪽. [본문으로]
  26. 각주 26) 『신곡 연옥편』, 11~12쪽. [본문으로]
  27. 각주 27) 『신곡 연옥편』, 146쪽. [본문으로]
  28. 각주 28) 『신곡 연옥편』, 40~41쪽. [본문으로]
  29. 각주 28) 『신곡 연옥편』, 15쪽. [본문으로]
  30. 각주 30) 『신곡』 「연옥편」에서 카토가 이 연옥의 섬 해변을 지키는 자로 나온다. [본문으로]
  31. 각주 31) 오에 겐자부로 지음, 『읽는 인간』, 정수윤 옮김, ㈜위즈덤하우스, 2015, 133쪽. [본문으로]
  32. 각주 32) 『신곡 연옥편』, 89쪽. [본문으로]
  33. 각주 33) 『신곡 연옥편』, 246쪽. [본문으로]
  34. 각주 34) 『신곡 천국편』, 11쪽. [본문으로]
  35. 각주 35) 「천국편」 1곡 67~69행(『신곡 천국편』, 10쪽.) [본문으로]
  36. 각주 36) 『신곡 천국편』, 214쪽. [본문으로]
  37. 각주 37) 『신곡 천국편』,290쪽. [본문으로]
  38. 각주 38) 『신곡 천국편』, 291쪽. [본문으로]
  39. 각주 39) 「천국편」 7곡 115~117(『신곡 천국편』, 62쪽.) [본문으로]
  40. 각주 40) 『신곡 천국편』, 166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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