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새로운 규칙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
회사란 때마다 사람이 들어오고 나가는 곳이다. 인사이동 철이면 신입이 들어오기도 하고, 다른 부서에서 전입해 들어오기도 하는데, 그때마다 사무실은 어수선해진다. 해마다 돌아오는 소란이라 익숙해질 만도 하건만, 그때마다 신경 쓸 일이 여간 많은 게 아니다. 원래 일이란 정작 그 일에 드는 노력보다 그 일을 준비하고 사후 처리하는 노력이 더 드는 법이다.
그런 상황에 나도 그리 자유롭지는 못하다. 무엇보다 팀에 새 직원이 들어오면 맞춰 일을 조정해야 한다. 그러다보면 이른바 ‘업무 인계인수(引繼引受)’라는 것을 하게 되는데, 한동안 서로 이어주고(繼) 받아주다(受) 정작 팀은 곧 허물 다리마냥 끊기고 삐거덕거리기 일쑤다.
어떤 보고서를 담당할 때였다. 분기마다 감독당국에게 각종 계수들을 보내야 하는 나름 민감한 일이었는데, 종류도, 양식도 복잡해서 족히 열흘은 걸리는 일이었다. 때마침 신참 직원을 받은 나는 그 직원에게 보고서 작성방법을 하나하나 가르쳐주어야 했다. 처음부터 이해하기 쉽게 잘 설명해줘야 나중에는 내가 편안해지리라는, 나름 미래지향적인 안목(?)을 가지고 이것저것 적극적으로 가르쳐주었다. 내 기억에 숫자들은 아스라이 사라졌지만, 그 친구에게 보고서 파일을 열어 침 튀기며 설명하던 장면은 생생하니, 내가 꽤 성실한 직원이었던 것은 지금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모든 걸 알려주지!
보고서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칸칸이 채워야할 숫자의 의미이다. 그 의미들을 이해해야만 그 의미에 맞게 자료를 찾아 넣을 수 있을 것이다. 보고서 양식에는 각 란에 채워야할 수의 간략한 정의들이 적혀져 있다. 그러나 처음 보는 사람이 그 정의들을 이해하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마치 수학책의 공식처럼 나열된 정의의 의미들을 나는 나름 꼼꼼하게 설명했다. 또 거의 보고서를 만들다시피 하며 모든 작업 과정을 진행했던 것 같다. 심지어 엑셀 시트의 매크로 작업의 원리까지 가능한 논리적으로 설명했다. 구성요소의 구성요소까지 설명하고 보여 주었다고 자부하였기에, 나의 설명은 거의 완벽해 보였다. 더 이상 설명할 수 없는 경지의 숫자, 그러니까 보고서 밑바닥에 침전된 순수 결정체(!)까지 설명해주었다고 확신했다.
아마 일주일은 꼬박 걸렸을 것이다. 쓸데없는 이야기는 완전히 배제하고 오로지 보고서에 만 집중한 무척이나 효율적인(!) 시간이었다. 내 노력에 화답하듯 그도 고개를 끄덕였기에 나는 마음속으로 잘 되어간다고 여겼다. 아마 그가 보기에도 그리 나쁜 선임자는 아니었을 것이다. 당연히 우리의 후임자도 아주 열심히 작업하기 시작했다. 아마 역대급 인계인수가 아니었을까.
날이 흘렀다. 그럭저럭 인사이동의 소란스러움은 사라지고, 드디어 보고서 마감 하루 전날. 나는 작업한 결과를 보자고 했다. 물론 여러 부분 틀렸을 수 있지만, 하루 정도면 무리 없이 수정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마침내 그가 보고서 파일을 연다. 그러나 아뿔사, 나는 엑셀을 열고 수십 종의 보고서를 보는 순간, 나는 정신적 아노미에 빠지고 말았다. 보고서 파일은 오류들로 가득 펼쳐져 있었다. 이 친구는 내가 가르친 숫자들을 완전히 다르게 이해하고 작업한 것이다. 아니, 나는 내가 하던 방식 그대로(정말 그대로!) 설명하고 보여주었는데, 그걸 어떻게 이리 다르게 작업할 수 있는가. 아, 이를 어쩐단 말인가.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1889~1951)
흡사 이것은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1889~1951)이 말했던 그런 상황과도 같아 보인다. 그는 어떤 사람이 누군가에게서 선 긋는 방식(예컨대 ‘지그재그 선’이라고 해두자)을 배우는 장면을 예로 든다. 선 긋는 방식을 제대로 가르쳐 주려면, 선 긋는 사람이 어떤 규칙을 따라서 선을 긋는지, 그 규칙이 작동하는 방식 그대로 시연해 보여주면 배우는 사람도 그 규칙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할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그것을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서 가상의 장면 하나를 상상한다. 가르치는 사람이 컴퍼스 하나를 잡는다. 그리고 한 쪽 끝을 ‘규칙’으로 상징되는 표준선을 따라 움직이게 한다. 한편 컴퍼스 다른 쪽 끝으로는 그 규칙을 따르는 선, 그러니까 표준선을 따르는 실제선을 진짜 긋는다. 그렇게 되면, 그가 규칙(표준선)을 따라 움직이는 동안, 마치 그 규칙이 그의 행동을 결정하는 듯이 반대편 컴퍼스가 실제로 선을 긋는 것이 육안으로 보이게 될 것이다.
아마도 비트겐슈타인은 가르치는 사람이 머릿속으로 생각할지 모르는 선 긋는 규칙을 육안으로 드러내주면서, 어떻게 그 규칙을 따르며 선을 실제 긋는지를 투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을 고안해 낸 것이다. 이 사고실험으로 추상적인 규칙과 실제가 함께 보이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내가 신참 직원에게 보고서 작성 방식(이것은 일종의 규칙이다)에 따라 직접 작업하는 과정을 가감 없이 보여주면 그 직원이 충분히 이해하고 배울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과 너무나 흡사하다. 나의 작업 과정을 통해서 그는 보고서의 규칙과 실제 모습을 동시에 보게 될 것이니, 그와 나 사이에 가르침과 배움이 순수하게 교환될 것이다. 이처럼 결정적인 게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이 예를 제시하고서는 우리의 바램과 달리 다음과 같이 강하게 단언한다.
우리는 그(여기서 선 긋는 사람)에게서 그가 그 선을 따르는 방식을 배울 수 없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이 예에서 그(가르치는 사람)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그(배우는 사람)에게 암시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규칙(rule)이 아니다.
- 『철학적 탐구』(이하 『탐구』) 237절,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지음, 『철학적 탐구』, 이승종 옮김, 아카넷, 2016, 263쪽. ; LUDWIG WITTGENSTEIN,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Translated by G. E. M. Anscombe, P. M. S. Hacker and Joachim Schulte, Revised fourth edition by P. M. S. Hacker and Joachim Schulte, Blackwell Publishing Ltd, 2009, p.94~94e
우리는 언제나 규칙이란 하나이고, 그 하나의 규칙을 참여자들이 똑같이 이해하고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게 사실이라면 규칙을 따를 줄 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된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매우 다양한 규칙들로 둘러싸여 따르고 있다. 엄마, 아빠, 아이들은 부지불식간에 어떤 역할을 하면서 가족-규칙을 따르고 있고, 회사에서는 각자의 작업들이 물 흐르듯 연결되도록 업무-규칙을 따르고 있다. 각종 기호들을 이용할 때도 그렇다. 산수에서 계산을 제대로 하려면 ‘공식’이라는 규칙을 따라야 하고, 말을 할 때는 ‘문법’이라는 규칙을 따라야 한다. 계산이나 말하는 것을 일종의 게임이라고 한다면, 공식이나 문법이라는 것은 게임의 규칙들이다.
그런데 규칙을 인지하고 있다고, 규칙을 따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계산 공식을 외우고 있다고, 공식대로 계산할 줄 아는 것은 아니다. 계산 공식을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는 것과 계산할 줄 아는 것은 다르다. 결국 ‘규칙’과 ‘규칙 따르기’는 다르다. 무언가를 안다는 것은 규칙뿐 아니라 그 규칙이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아는 것을 포함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한다.
그러므로 ‘규칙 따르기(following a rule)’는 하나의 실천(practice)이다. 그리고 규칙을 따른다고 생각하는 것은 규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 『탐구』 , 202절, 같은 책, 244쪽. ; p.87~87e
아마도 나는 신참 직원에게 규칙을 철저하게 분해하여 보여주었을지는 모르겠으나, 신참 직원이 해당 규칙을 따를 줄 알게 하지는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계산 공식은 전해 주었지만, 계산 공식을 적용할 수 있게 하지는 못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신참 직원이 내가 지칭하는 의미대로 보고서의 규칙을 따를 수 있게 된 것으로 오인하였다. 규칙을 충실하게 재현하여 보여주는 것만으로는 규칙을 적용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더 필요한 것이었다. 비트겐슈타인의 말대로 진정 가르치는 자가 전달해야 하는 것은 규칙이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인지하고 암기되는 것으로는 규칙이 아니라고 이해하고 있다.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계산 공식 자체는 규칙 그 자체가 아니다. 물론 그것을 규칙이라고 불러야 하겠지만, 그것만으로는 규칙의 의미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에게 규칙의 의미는 규칙을 적용하는 것을 포함해야 한다. 즉 규칙의 의미는 ‘쓰임’인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정리한다.
나는 이 기호에 특정한 방식으로 반응하도록 훈련을 받았고(trained), 지금 그렇게 반응하고 있다. 그러나 이 말을 통해 당신은 인과적 연관만을 지적했을 뿐이다. 즉 이제 우리가 어떻게 도로 표지판을 따르게 되었는지를 설명했을 뿐, 이처럼 기호를 따르는 일이 실제로 무엇에 있는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아니다. 나는 확립된 용법(established usage), 관습(custom)이 있는 한에서만 누군가 도로 표지판을 따라서 간다는 점도 암시했다.
- 『탐구』 , 198절, 같은 책, 240~241쪽. ; p.86~86e
어떤 훈련을 통해 규칙이 신체에 스며드는 과정이 없다면, 규칙의 의미를 파악했다고 할 수 없다는 뜻이다. 결국 규칙은 내 신체에 스며든 용법으로 작동할 때, 그래서 그것이 관습이 되었을 때에야 규칙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 된다. 따라서 규칙은 규칙적인 사용에 존재한다. 그때서야 비로소 그 게임의 규칙이 작동하고, 동시에 게임이 개시되는 것이다. 규칙은 정식처럼 존재하는 명사적 양식이 아니라, 신체에 장착되어 사용되는 때에야 비로소 움직이는 동사적 작동이다.
‘규칙’과 ‘규칙 따르기’는 다르다. 무언가를 안다는 것은 규칙뿐 아니라 그 규칙이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아는 것을 포함해야 한다.
보고서 마감 하루 전날, 난데없이 긴급한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당시 팀장님께 보고하고 그 친구와 함께 모든 보고서를 하루 종일 다시 작성하기로 한다. 결국 업무 시간을 넘어서 밤을 새게 되었다. 별수 없이 내가 자료를 모조리 다시 추출하고 확인하는 작업을 한다. 그런 나를 보면서, 그도 자기가 수정 할 수 있는 보고서를 찾아내어 어떻게든 해본다. 원래 심성은 착하고 성실한 직원이라서 내게 많이 미안했는지 잘못을 만회해 보려고 애를 쓰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의 잘못도 아닌 것을.
아무튼 그와 나는 밤을 꼬박 새게 되는데, 그때 우리는 보고서 작업도 작업이지만 서로의 삶에 대해 아주 많은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그 긴급한 순간에 그 친구 아내가 농구선수였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한참 딴 얘기로 정신이 나가고, 간혹 난해하게 얽힌 보고서 엑셀 함수를 가지고 농담을 곁들이며 장난을 치기도 한다. 우리들에게 뜻밖의 시간이 찾아온 셈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보고서의 규칙들은 한참 딴 얘기가 진행되면서, 그리고 함수를 가지고 주고받은 농담들 사이로 차곡차곡 그 친구의 신체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어쩐 일인지 새벽이 되어가자 그 친구의 이해도가 무척 높아지고 있다는 것을 강렬하게 느끼게 되었다. 예전 인계인수할 때의 느낌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었다. 어떤 곳에서는 내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숫자를 추출하기도 하고, 심지어 나의 오류를 은근히 지적할 줄도 알았다. 순수 결정체 같은 나의 논리적 설명보다, 서로의 삶이 교환되는 과정 속에서야 우리는 우리의 목적이 달성되고 있었다. 그는 그 과정을 통해서 보고서의 규칙을 넘어서서 자기 나름의 다른 형식을 창안하고 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하나의 언어를 상상한다는 것은 하나의 삶의 형식(form of life)을 상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탐구』 19절) 같은 책 45쪽. ; p.11~11e 고 말한다. 보고서의 규칙을 획득하는 일은 그에게 자그마하지만, 명백히 다른 삶의 형식을 받아들이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밥벌이의 중요한 토대가 바뀌는 일이기도 했을테니까. 나는 그 부분과 함께 일을 나누어야 했다. 삶 속에서라야 새로운 게임의 규칙들이 스며드는 것이니까 말이다. 명징한 설명과 정확한 기교와 매끈한 정식들은 필요할지언정, 결정적으로 충분하지 않다. 새로운 삶을 위한 새로운 규칙들이란 그렇게 실제적인 삶의 실감 속에서라야 구성되고 완성된다. 그 친구는 지금도 그때 그 밤샘을 이야기한다. 그는 내게 중요한 삶의 친구이자 후배로 남았다. 내게 그날은 아주 오래된 미래다.
글_약선생(a.k.a. 강민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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