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인민"이 형성되다
알랭 바디우 외, 『인민이란 무엇인가』
가끔은 소, 돼지를 도살하여 태연하게 그 고기를 구워 먹는 내 모습이 불가사의할 때가 있다. 그러면서도 지나가는 애완견을 보면 귀엽고, 생명이 참 아름답지, 라고 생각하는 내 모습은 우스운 걸 넘어 기이하기조차 하다. 물론 이것과 저것은 다르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런 모순이 떠오르는 것 자체가 무척이나 괴이한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 때면 내가 딛고 있는 이곳이 매우 난해한 지형이란 느낌으로 가슴이 턱 막힌다. 이토록 난해한 곳에서 내가 무슨 감각으로 살고 있는 것일까 의심스러워지는 것이다. 그러나 살기 위해서 무언가 더러운 것을, 그리고 무언가 잘못된 것을 알아도 안다고 말하지 않고 살아간다. 아무 일도 없이 살아가기 위해서.
이를테면 흔히들 이야기하는 ‘정치적 입장’이 대표적이다. 이웃들과 정치에 대해 길게 이야기 하면 이상한 사람 취급받기 십상이다. 직장에서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선거에 대해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펼치면 그는 편향된 사람으로 낙인찍힌다. 혹시 정치 집회라도 참석했다고 알려지면 그는 찍혀서 더 이상 직장생활하기 힘들게 뻔하다. 우리나라에서 정치적 입장을 갖는다는 것은 먹고 사는 일을 거는 일이기에, 사람들은 삶을 걸고 정치적 입장을 표명하기보다, 정치적 무기력을 선택한다. 아무 일도 없이 살아가기 위해서.
그러나 말들이 시작되었다. 처음엔 칼로 도려낸 틈새로 잠시 새어 나온 빛인가 싶더니, 지금은 활활 타는 횃불로 바뀌어 보란 듯이 광화문 앞을 가득 매웠다. 출근시간이면 꽉 막혀 짜증으로 가득할 그 차로를 아이와 함께 뛰어보기도 했다. 촛불집회의 불꽃들은 마치 물고기들처럼 차로를 흘러 다녔다. 편향과 낙인과 배제를 벗어나서 모든 사람이 불꽃을 들고 물고기처럼 흘러 다녔다. 식어버린 옥수수처럼 딱딱한 마음도 흘러 다니는 불꽃 때문에 물렁물렁해졌다. 여러번 보아서인지 이제 그 속에서 외친 “하야하라”, “탄핵하라”라는 구호도 그 대상이 꼭 ‘박근혜’이기만 한 것 같지 않다. 그것들은 우리가 우리에게 내린 명령어로 느껴진다.
지난 2일 야 3당이 발의한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은 헌법 제1조인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문장을 인용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은 대통령은 주권자인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은 사람이고, 헌법을 준수하여 그 책무를 다하여야 한다는 말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당연히 대통령은 ‘법치와 준법의 존재’일 것이다. 그러나 만일 대통령이 헌법을 경시하게 된다면 “스스로 자신의 권한과 권위를 부정하고 파괴하는 것”이라고 분명한 어조로 덧붙인다.
원래 소추(訴追)는 형사 사건에 관하여 소(訴)를 제기하고 그 소를 수행하는 일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법정에다 심판해달라고 신청하고 그것을 수행하는 일이다. 한국의 형사소송법은 국가기관, 그것도 검사만 이를 제기할 수 있도록 정해 놓았다. 이른바 ‘국가소추주의’이면서 ‘기소독점주의’이다. 그러나 고급공무원이 잘못하여 그를 탄핵 발의하고 헌법재판소에 파면을 구하는 경우는 검사가 아니라, 오직 국회가 하도록 정하고 있다. 그래서 소추에는 두 가지가 있는 것이다. 형사소송법상 소추와 국회의 탄핵소추.
물론 사람들은 고급공무원이라서 힘의 균형을 고려하여 그렇게 정해놓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물론 그렇게 설명하는 것을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번에 진행상황을 보면서 다른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아마 그런 소추가 ‘국가소추주의’의 틀 내에서는 행할 수 없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국가가 스스로 국가를 파면시키는 것은 모순일 테니까. 이를테면 대통령과 국무총리는 국가의 원수로서 그 자체가 국가다. 그러나 검찰은 국가의 소속이기에, 국가인 검찰이 국가인 대통령을 대통령인 채로 소추한다는 것은 자기가 자기를 심판해달라고 말하는 꼴이기도 하다. 그래서 최근에 잘 알려져 있다시피 검찰은 대통령을 수사할 수는 있어도 기소할 수는 없다.
이처럼 소추를 두 가지로 나누어 접근하고 있는 것 자체가 의회는 국가와 다르다는 것을 알려주는 징후인 듯하다. 의회는 ‘국가의 기관’이라기보다, 유일무이한 ‘인민의 기관’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하고 있듯이 의회는 스스로 그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을 온전히 추적하기 위해서는 ‘인민’이라는 단어부터 따져봐야 할 것이다. 우선 인민은 우리들 주변의 일반 사람들(people)이다. 그러나 그렇게만 보면 인민이 길거리를 걸어가는 행인에 불과하게 된다. 그저 지나다니는 사람들일 뿐이면, 그들은 서로 모여서 꿈을 이야기하거나, 그 꿈을 위해 무언가 도모하는 힘을 전혀 형성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를 ‘인민’ 혹은 ‘민중’이라는 말로 바꾸고, 그 뒤에 위원회나 운동 같은 단어를 붙이면 완전히 달라진다. ‘인민 위원회’, ‘인민재판’, ‘민중운동’ 등등. 이 단어들은 ‘인민’이 무언가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1
형용사로 사용된 인민이나 민중은 뒤에 붙은 명사를 급진적으로 정치화시킨다. 무언가 억압을 깨고 새로운 공동체를 지향하는 사람들로 정의되는 것이다. 그냥 사람들이라고 했던 것에서 풍겼던 지지부진한 뉘앙스가 완전히 사라지고, 사람들에게 억압되어 있던 역동적인 이념이 드러나면서, 이 단어를 읽는 자로 하여금 강한 지향성을 느끼게 해준다.
그러나 그 인민이라는 단어 앞에 ‘국민을 지칭하는 형용사’를 붙이고, 피플(people)을 아예 국민이라는 단어로 받으면, 피플(people)이 의미하는 바가 또다시 이상해지고 만다. 미국 국민, 영국 국민, 한국 국민 등등.... 인민이라는 단어가 하나의 정체성으로 봉인되고 마는 것이다. 그것은 무척이나 반동적인 성격을 갖게 된다. 언덕에 박아놓은 울타리가 양들을 가두어 두는 것처럼 사람들을 하나의 정체성 아래 가두어 무기력하게 만들어 버린다. 이미 그들은 ‘사람들’이 아닌, 양떼들처럼 어떤 먹잇감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런 정체성을 갖고 행하는 인민의 투표권은 당선자에게 정당성이라는 허구를 부여하는 정치적 허상이다. 이때의 주권은 루소적 의미에서 실제적이고 활기찬 인민의 주권이라기보다, ‘무기력하고 원자화된 다수 의견의 주권’일 뿐이다. 그런 주권은 서로의 꿈을 이야기하고, 무언가 꿈을 도모하는 정치적 주체를 이루어내지 못한다. 이때의 ‘사람들’은 단지 국가가 지속적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만 동원되는 대상들(‘먹잇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을 가두어두는 울타리를 더욱 강하게 요구하는 양들인 것이다. 2
그러나 인민은 그 안에 돌발적인 것도 또한 동시에 품고 있다. 알랭 바디우(Alain Badiou)는 이집트의 경우를 예로 든다. ‘아랍의 봄’에 타흐리르 광장에 운집한 사람들이 ‘우리는 이집트 인민이다’라고 단언했을 때, 그들은 기존에 있던 국민적 무기력에서 벗어난 이집트 국민, 새로운 이집트 인민을 형성시키고 있었다. 이들에게 ‘국민’은 여전히 도래해야 할 것이지, 기존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이 원하는 국민은 새로운 국가를 위해 재탄생할 인민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국민은 도래할 인민이다. 지금은 없는 인민인 것이다. 3
이 의미에서 보면 ‘인민’이란 의미는 기존 국가의 소멸, 그리고 그것을 넘어 국가 그 자체의 소멸을 함축한다. 이 즈음에서 마르크스의 그 유명한 문구,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조국이 없다”(The working men have no country)가 새롭게 해석된다. 인민은 기존의 국민이 아니다. 그들은 이미 기존 국가로부터 멀리 벗어나 있다. 오히려 그들은 새로운 인민을 형성하는(configurer) 자들이다. 그들은 형성중인 자들이므로 당연히 정착할 조국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런 인민은 “인민을 대표한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무기력을 파괴하고 정치적인 새로움의 몸을 이루는 것으로서의 인민이라고 선언하는” 자들이다. 4 그러니까, 자신의 무기력과 싸우기 위해서 새로운 정신, 새로운 신체를 구성하고 있는 자들인 것이다. 그들은 하나의 “내재적 예외”안 셈이다. 안에 있지만 안에 속하지 않는 예외. 인민이지만 기존 인민이 아니다. 5
이 내재적 예외로서의 인민은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에게서 좀 더 급진적으로 설명된다. 그녀는 투표를 통해 ‘인민주권’이 선출된 권력으로 이전되지만, 결코 완전히 이전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인민 주권에는 완전히 이전되지 않는 부분이 남아 있는데, 자신들이 선출한 정권을 퇴진시킬 수 있는 권한이 바로 그것이다. 인민 주권은 의회 권력을 합법화시키기도 하지만, 그만큼이나 그것을 비합법화시킬 수도 있는 권력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
따라서 이른바 “절차적 민주주의”라는 것은 그것이 인민주권에 바탕을 두고 있는 한, 인민 주권의 내용을 완전히 포괄할 수 없다. 인민주권은 그 자체로 ‘초과-의회권력’인 것이다. 바로 그것이 민주 질서 내부에 존재하는 ‘무정부주의’ 에너지이고, 영구 혁명의 원칙이다. 그것은 내부에 있지만 내부에 있지 않은 ‘구성적 외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안에 있지만 안에 속하지 않는 외부. 인민이지만 기존 인민이 아니다. 6
그렇다면 버틀러가 말한 대로, 집회 그 자체가 ‘우리, 인민(we, the people)’을 실제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내부의 외부’, ‘내재적 예외’를 집회의 형태로 드러낸 것이다. 집회 자체가 이미 발화이며, 인민 주권을 실행하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 그것은 그야말로 직접민주주의의 발화이다. 집회 내에서의 1분 소등, 촛불 파도 등등 그것은 인민 주권을 실행하는 몸짓이고 움직임인 것이다. 그렇게 인민은 구성된다. 이런 자기 형성적(self making) 혹은 자기 구성적 행위는 대의제의 대표형식과는 전혀 다르다. 그들은 대표가 아니다. 그들은 인민 그 자체인 것이다.
지난 토요일, 광장에 232만명이 모였다고 한다. 그들은 하나하나가 인민주권들이며, 동시에 인민 전체이다. 통치자들은 매우 심각하게 오판하고 있다. 60년도, 72년도, 80년도, 87년도, 04년도, 08년도 아닌, 지금은 그것들을 모두 체험한 한국의 지금이다. 아마도 한국은 세계의 미래가 될 듯하다. 통치자의 버티기 때문에 돌연사한 우파들의 무덤들로 가득할 미래. 지금 우리는 근대 국가 이래 세계사적으로도 찾기 힘든 직접민주주의의 출현을 경험하고 있다. 그것이 폭력적이냐, 비폭력적이냐는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물론 폭력이 요청되고 촉발되는 순간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단지 그때그때 그것을 지켜줄 공동체의 정신이 필요할 뿐인 거다. 그런 폭력들도 민주주의가 우리 곁에 출현하면서 행하는 하나의 선택일 것이니까.
우리는 직접민주주의를 온 몸으로 체험하고 있는 중이다. 나는 광장의 촛불집회가 당연히 저항행위이지만, 동시에 직접민주주의의 거대한 의사결정 행위로도 보였다. 버틀러의 말대로 그것은 ‘우리, 인민’이 행하는 하나의 거대한 몸짓이다. 이 의미에서 집회를 폭력-비폭력 프레임으로 바라보는 것 보다, 대중이 직접민주주의의 과정을 어떻게 펼치고 통과하고 있는가가 더욱 흥미롭고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혹시라도 있을 탄핵 부결이 이 흐름을 뒤바꾸지는 못할 것이다. 탄핵이 부결되면 이 흐름은 식물대통령이 아니라, 극우정당과 극우언론으로, 또한 재벌로 향할 것이다. 탄핵부결은 직접민주주의를 더욱 강렬하게 출현시킬 디딤돌이 될 뿐이다. 인민들의 요구사항이 더욱 근본적인 곳으로 향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똑똑한 바보들인 엘리트들은 자신들의 그 똑똑한 계산 때문에 상상할 수 없는 몰락에 동참하게 될 것이 틀림없다. 나는 오히려 지금 이 상황이 민주주의의 시작인 것 같다. 바디우가 말한 바, 국가의 무기력을 파괴하고 새로운 인민, 바로 ‘우리, 인민’이 형성되기 시작했으니까.
글_약선생(a.k.a. 강민혁)
인민이란 무엇인가 - 알랭 바디우 외 지음, 서용순 외 옮김/현실문화 |
- 인민은 people의 번역어이다. 우리나라는 people를 대중, 인민, 민중 등으로 시대에 따라 번역해 왔다. 여기서는 인민으로 번역한다. [본문으로]
- 알랭 바디우 외, 『인민이란 무엇인가』, 서용순·임옥희·주형일 옮김, 현실문화, 2014, 16쪽. [본문으로]
- 알랭 바디우 외, 『인민이란 무엇인가』, 서용순·임옥희·주형일 옮김, 현실문화, 2014, 21쪽. [본문으로]
- 「공산주의당 선언」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1』, 최인호 외 역, 1991, 418쪽. ; David McLellan, 『Karl Marx selected writings』, Oxford 2000, [본문으로]
- 알랭 바디우 외, 『인민이란 무엇인가』, 서용순·임옥희·주형일 옮김, 현실문화, 2014, 22쪽. [본문으로]
- 알랭 바디우 외, 『인민이란 무엇인가』, 서용순·임옥희·주형일 옮김, 현실문화, 2014, 69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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