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군자가 중용을 행한다는 것은 시중하는 것이다" 시중이란 무엇인가?


크로노스와 카이로스 시간의 공존, 시중(時中)




『중용』은 텍스트 전체가 자연의 질서에 인간의 질서를 어떻게 합치시킬 것인가에 바쳐져 있다. 자연의 질서에 인간의 질서가 연결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고대 중국을 비롯한 전근대사회의 특징적인 사유패턴이다. 근대이전에는, 자연의 질서와 상관없이 인간이 만들고 개조하는 것이 사회라는 생각은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전근대사회의 사회구조는 동양이든 서양이든 상당히 안정적이었다. 사회구조를 바꾼다는 것은 자연의 질서가 바뀐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고대인들의 우주론은 중심과 주변이라는 정해진 자리를 가지고 있었고, 그것은 고대의 신분제와 합치했다. 고대중국에서는 별들이 북극성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북극성은 황극으로서 천자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반면 고대 그리스 아리스토텔리스의 우주론에서 우주는, 불변의 에테르로 구성되어 있는 천상과, 흙(地), 물(水), 불(火), 공기(風)가 뒤섞여서 지저분한 지상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이 중세 교회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은, 기독교적 사회질서와 합치했기 때문이었다. 사회와 자연의 관련성에 대해서는, 사회구조가 신분제였기에 자연 또한 고유한 자리가 있는 것으로 파악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고, 자연을 그렇게 파악했기에 사회구조가 신분제로 구성 되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고, 상호 구성적일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여하튼, 고대인들은 자신들의 사회구조와 부합하는 고정된 자리를 중심으로 하는 우주관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자리가 어떻게  자신의 위치를 확보하느냐의 문제에서는, 서구와 중국이 꽤 차이가 나는 것 같다.


서구인들에게 자리는 그 자체로 고유한 본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 다른 자리와의 관계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천상은, 그 본질이 ‘완전함’이기 때문에 불변의 에테르로 구성되어 있을 뿐 아니라 영원한 원운동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고대인들에게 자리는 다른 자리와의 상대적인 개념이었다. 북극성이 하늘의 기준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북극성이 움직이지 않는데 비해 다른 별들은 움직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왕도 그를 왕으로 믿고 받드는 신하와 백성들이 있기에 왕이다. 그래서 중국인들에게 자리는 상호 규정적인 내재적인 관계 속에 있는 것이지 독자적인 본성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 자리를 차지하는 자와 자리의 관계도 중국과 서구는 다르다. 중국의 경우는 그 자리를 차지하는 자가 자리에 서로 걸맞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두었지만, 서구의 경우는 자리와 내용의 관계는 질료형상론과 동일한 도식으로 자리가 내용을 결정했다. 그러니까 고대 중국에서 자리는 배치의 산물이었지만, 서구 유럽에서 자리는 그 자체로 고유한 본질을 가지고 있었다.


"고대 중국에서 자리는 배치의 산물이었지만, 서구 유럽에서 자리는 그 자체로 고유한 본질을 가지고 있었다."




고대 중국인들에게 자리의 문제와 더불어 또 하나의 특징적인 사유패턴은 우주는 일정한 변화의 리듬을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아침이 오면 반드시 밤이 오고, 밤이 깊으면 다시 해가 뜬다. 달은 차면 반드시 기울고, 비워진 것은 반드시 채워진다. 아무리 대단한 왕조도 영원히 지속되지 않았고, 한 왕조의 몰락은 새로운 왕조의 시작이었다. 상승의 정점은 곧 하강의 시작이고, 없어짐은 곧 생겨남의 시작이 되는 리듬이 자연에는 있었고, 인간의 세상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런 리듬이 생겨나는 것은 왜일까? 고대 중국인들은 사물이 단독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그물망으로 엮여있고, 그 배치에 따라 상승과 하강, 곧 양(陽)과 음(陰)의 리듬이 발생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양(陽)과 음(陰)은 절대적인 개념이 아니라 상대적인 개념이다. 옆에 무엇이 오느냐에 따라 상대적으로 양이 될 수도 있고 음이 될 수도 있다. 요컨대, 고대 중국인들에게 자연의 질서는 음양의 배치에 따라 변화를 거듭하는 것이었고, 그 변화를 인위적으로 막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서구 고대인들도 처음부터 변화를 부정했던 것은 아니다. 도처에서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것을 부정하기는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는 시간의 신이 둘이었다. 하나는 크로노스로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흘러가는 연속적인 시간을 관장하는 신이다. 크로노스는 변화 그 자체를 관장하는 신인 셈이다. 또 다른 시간의 신은 카이로스인데, 카이로스는 기회라는 말뜻을 가지고 있고, 포착하는 시간이다. 이때 시간은 정지된 시간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시간의 신을 둘로 만든 것은 크로노스는 카이로스에 의해 포착되는 것이지만, 크로노스가 없다면 카이로스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었고, 그것이 시간의 실상(實狀)이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시간은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가차 없이 흐르지만, 인간들은 또 그 시간을 포착한다. 그래서 해가 뜨면 일어나서 농사를 짓고,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가서 쉴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크로노스의 시간과 카이로스의 시간의 공존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이를 논리적으로 따지면 아포리아에 빠져버린다. “날아가는 화살은 날지 않는다”는 제논의 역설이 바로 그것이다. 날아가는 화살이 지나는 궤적을 좌표위에 표시해 보라. 좌표의 한점, 한점에서 화살은 정지해 있다는 것이 제논의 논변이다. 그는 움직임을 부정한 자신의 스승, 파르메니데스를 옹호하기 위해 이 논변을 통해서 움직임이 환상이라는 것을 증명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제논의 역설이 보여준 것은 크로노스의 시간과 카이로스의 시간의 공존이다.


크로노스는 카이로스에 의해 포착되는 것이지만, 크로노스가 없다면 카이로스는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이 시간의 실상(實狀)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변화를 사유했다면, 중국 고대인들은 하늘과 땅, 인간이라는 정해진 자리에서의 음양의 배치로 변화를 사유했다. 주역(周易)은 이 변화의 양상을 케이스별로 나누어서 집대성한 책이다. 주역의 시간성은 배치의 변화가 만들어 내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크로노스의 신과 카이로스의 신을 만들어서 변화, 즉 움직임과 정지를 함께 사유하려 했다면, 고대 중국인들은 자리를 배치의 효과로 만듦으로서 그렇게 했다. 역(易)의 시초는 복희씨가 8괘를 만든 것이 64괘로 확장되었다. 주역(周易)은 주(周)나라의 역(易)이라는 의미인데, 주(周)나라의 문왕과 주공이 괘사와 효사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공자는 주역(周易)의 죽간을 묶은 가죽끈이 세 번이나 끊어질 정도로 주역(周易)을 깊이 공부했고, 괘사와 효사의 주석을 10개의 전(傳)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공자는 왜 가죽 끈을 세 번이나 다시 맬 정도로 주역(周易)을 탐독한 것일까? 노자계열의 지식인들은 변화는 인위적으로 관리하지 않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고대 그리스 식으로 보자면, 크로노스의 시간만 인정한 셈이다. 이들은 그래서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다. 하지만 공자에게 그것은 인간의 길이 아니다. 그는 오히려 유위(有爲)를 통해서 자연과의 합일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마치 고대 그리스인들이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의 시간이 서로 상관적이라고 생각한 것처럼 말이다. 유위(有爲)는 제도와 정치이고, 고대 그리스식으로 보자면 카이로스의 시간이다. 요컨대 공자는 크로노스의 시간과 카이로스의 시간의 공존을 모색한 것이다. 아마도 주역(周易)은 공자에게 그 길을 보여준 텍스트였을 것이다. 공자는 자연과 합일할 수 있는 유위(有爲)를 실현하기 위해, 군자에게 중용(中庸)할 것을 요구한다.


공자가 말했다.
“군자는 중용을 행하고, 소인은 반대로 행동한다.
 (君子中庸, 小人反中庸)
군자가 중용을 행한다는 것은 때에 맞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君子之中庸也, 君子而時中)
소인이 반대로 한다는 것은 거리낌 없이 행동하는 것이다.”
 (小人反中庸也, 小人而無忌憚也)


공자가 소인의 ‘기탄없음(無忌憚,무기탄)’과 대비시키고 있는 것이 군자의 중용, “시중(時中)”이다. “시중(時中)”이란 말의 뜻은 시(時)에 따라 중(中)을 취한다는 말이지만, 중(中)이 무엇을 말하는지 공자나 자사가 명확하게 개념 정리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시(時)가 개입되기 때문에, 중(中)이라는 것은 딱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정도만 알 수 있을 뿐이다. 중(中)은 ‘가운데’라는 의미인데, 그렇다면 때에 따라 상한과 하한이 변하는 ‘가운데’를 말하는 것일까? 중(中)이 ‘가운데’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양적인 의미의 중간은 아니다. 양적인 것에는 시간성이 없기 때문이다. 혹자는 1과 50의 중간은 25이고, 1과 100의 중간은 50인 것처럼, 양적인 의미의 중간 역시 상한과 하한이 무엇인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시간성이 아니냐고 반박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셀 수 있는 것의 중간은 셈법의 규칙이 바뀌지 않는 한 사실상 정해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양적인 것, 셀 수 있는 것에는 시간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성이 있는 곳은 언제나 질적인 곳이기에 변화는 언제나 질적인 변화다. 그래서 중용의 중(中)을 글자의 뜻으로 이해한다 해도, 양적인 가운데가 아니라 질적인 가운데를 의미한다. 그것은 그 시(時)에 ‘적중(適中)’하는 것이다.



정자(程子)는 중(中)을 ‘치우치지 않음’이라고 주석했는데, 글자의 뜻에 충실한 주석인 듯하다. 주자(朱子)는 정자의 주석에 ‘과(過)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다’를 추가했고, 그 주석에 대한 근거는 다음 문장으로 보인다. 


공자가 말했다.
“중용의 도가 행해지지 못하는 이유를 알겠다.
 (道之不行也, 我知之矣)
지혜로운 자는 하찮게 여겨 행하지 않고, 어리석은 자는 알지 못하여 행하지 못한다.
 (知者過之, 愚者不及也)
중용의 도가 밝혀지지 않는 이유를 알겠다.
 (道之不明也, 我知之矣)
능력 있는 자는 중용의 도를 더 이상 밝힐게 없다고 생각하고, 부족한 사람은 제대로 알려고 애쓰지도 않는다.
 (賢者過之, 不肖者不及也.)


공자는 지혜로운 자, 능력 있는 자는 모두 과(過)한 것이 있어서 중용을 못하고, 어리석은 자나 부족한자는 모자라기 때문에 중용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정자나 주자는 치우치지 않음이라든지, 치우치지 않고 과불급도 없는 것이라고 중(中)을 개념 정의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중(中)의 의미를 한정해 버리는 것은 아닐까? 내 생각엔 공자와 자사가 “중(中)은 ~이다”라고 개념화하지 않은 것은, 시(時)에 따라 달라지는 중(中)을 특정한 무엇으로 한정짓지 않으려했기 때문인 듯하다. 정자와 주자는 “~이 아니다”라는 식으로 부정을 통해서 개념정의하고 있는데, 부정을 통한 개념정의는 “~이다”라는 정의보다 한계가 넓은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중세의 부정신학은 한계를 정할 수 없는 신을 말하기 위해서 부정의 방법을 사용했다. 하지만 한정짓지 못하는 것을 말하고자 할 때 사용하는 부정의 방법은 하나의 ‘~이 아니다’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이어지는 “~이 아니다”여야 한다. 그래서 정자와 주자의 중(中)에 대한 정의가 부정의 방식을 사용하고 있더라도 중(中)을 한정짓는 정의와 마찬가지다. 하지만 공자가 말하고자 한 것은, 시(時)는 늘 변화하는 것이기에 중(中)을 무엇이라 한정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중(適中)함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공자와 자사가 “중(中)은 ~이다”라고 개념화하지 않은 것은, 시(時)에 따라 달라지는 중(中)을 특정한 무엇으로 한정짓지 않으려했기 때문인 듯하다"


지혜로운 자와 능력 있는 자가 과하기 때문에 중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런 의미가 아닐까?  해가 뜨는 시간과 해가 지는 시간은 날마다 조금씩 다르다. 그러나 촌부는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집에 돌아와서 저녁을 먹고 쉰다. 이것은 숨을 쉬는 것처럼 너무나 자연스런 일이다. 하지만 지혜로운 자는 시계를 맞춰놓고 매일 오전 6시에 일어나고, 오후 6시에 집으로 돌아오면 된다고 촌부의 리듬을 무시할 것이다. 능력 있는 자는 마치 제논처럼 의기양양하게 대단한 말재주로 “날아가는 화살은 날지 않는다‘고 하면서 변화는 가짜라고 하거나, 혹은 반대로 변화만이 진짜라고 할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매일 먹고 마시지만 그 맛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드물다.
 (人莫不飮食也 鮮能知味也)


“시중(時中)”하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촌부가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집에 와서 쉬는 것처럼 자연스런 일이고, 그렇게 살고 있다. 그러나 그 의미를 아는 자는 드물다. 만물은 시(時)에 따라 변화한다. 그렇기에 불변의 원칙을 세울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변화를 관리하는 방법이 꼭 불변의 원칙을 세워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변치 않는 원칙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시(時)에 따라 칙(則)을 바꿀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자러가듯이 이미 하고 있는 시중(時中)을 모든 일에 적용할 수 있는 것! 그것은 분명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글_최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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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명자바라기 2016.07.14 22:34 신고 답글 | 수정/삭제 | ADDR

    소인배가 시중하면서 중용이라는 건 참 힘든데..

    • 북드라망 2016.07.15 10:03 신고 수정/삭제

      그런가요? 하지만, 보통 사람들도 시중하면서 중용을 행하는 것은 쉽지 않아 보입니다. 각자, 자기 자리에서 해나갈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하면 되지 않을까요?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