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문화의 추방자이자 이민자, 에드워드 사이드와 뉴욕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문화를 위하여 (1)

: 뉴욕과 에드워드 사이드



논쟁하기 좋아하는 싸움닭. 이것은 ‘뉴요커’에게 붙은 무수한 딱지 중 하나다. 뉴욕에서 직접 살아보니 이 이미지의 유래를 알 것 같다. 여기서는 논쟁을 좋아하지 않은 사람마저도 논쟁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가 있다. 뉴욕이 그토록 광고해대는 (그 놈의!) 다양성 때문이다. 다양한 인간들이 좁아터진 섬에 모여 살다보면 서로에 대한 오해와 몰이해, 잘난척이 어쩔 수 없이 생겨난다. 무지 자체는 괜찮다. 문제는 무지를 고집할 때다. 바로 그때 무지를 깨뜨리려는 자와 무지를 고수하려는 자 사이에 논쟁이 시작된다.



 쿨하지 못해 미안한 이름, 문화


나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한국에 살 때는 과열된 애국심이나 유치한 반일 감정에 거리를 두며 나름 ‘쿨녀’를 자처했었다. 하지만 배치가 바뀌니 나라고 별 수 없었다. ‘코리아’라는 듣도 보도 못한 나라에 대한 무지는 산더미 같았다. 개는 소나 닭과는 영혼이 달라서 잡아먹으면 안 된다거나 (한국은 기독교 국가가 아니야!), 미국이 남한에 주둔해 민주주의를 이식한 것은 천운이라거나 (남한 근대사의 절반이 독재 및 군사 정권이었던 건 알고 하는 소리인가?), 유교 문화라서 스킨십에 참 보수적이라거나 (스킨십에 오픈되어 있는 남미가 마초적인 성문화를 가지고 있는 건 뭐라고 설명할 거지)...... 상대방이 설득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도저히 입을 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론 나에게는 최후의 수단이 있다. 문화인의 정체성에 호소하는 것이다. “그건 너희의 문화니까 인정해줄게. 나의 의견 역시 내 문화에 비롯된 것이니까 너도 인정해줘.” 이렇게 나오면 백이면 백 논쟁을 접는다. 이로써 토론은 교양 있게 막을 내린다.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과 미국인으로서의 상식 모두가 안전하게 지켜졌다.


어떤 뉴욕 사람들은 이 문화상대주의를 뉴욕의 대표 가치로 내세운다.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서 말이다. 21세기에 문화상대주의를 뉴욕보다 더 잘 실천하는 도시가 없다는 것이다. 뭐, 그럴 수도 있다. 뉴욕은 자타공인 다문화의 도시다. 이곳에서는 온갖 이질적인 문화 이미지가 범람한다. 지하철을 타면 한국인 태권도장 광고 옆에 푸에르토리코인 살사 댄스 광고가 나란히 붙어 있는 것이 보인다. 그 옆에는 종합 문화 축제를 선전하는 인도 여인의 모습도 있다. 뉴욕은 이 모든 문화에 접속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문화상대주의의 관용이란 이처럼 ‘이미지’를 전시하는 수준을 넘어설 수 없는 것 아닐까? 나와 논쟁을 마치고 간 사람들에게 한국은 여전히 개고기를 먹고, 미국의 은혜를 받아 민주주의를 안착시키고, 보수적인 유교 문화로 여성을 억압하는 ‘이상한 나라’다. 지적 접근은 딱 그 이미지에서 멈춘다. 이 낯선 문화를 이해해야 할 의무는 없다. 단지 문화상대주의에 입각하여 이것도 문화라고 말해줄 뿐이다. 이것은 또 다른 형태의 무지다. 차이를 인정하자는 결론이 역설적으로 오해를 영구화시킨다.


이런 피상적인 관용을 계속 경험하다보면, 종국에는 깨닫게 된다. 문화에 대해서 겉 이미지 이상으로 깊숙이 파고 들어 논쟁하는 것은 그 자체로 ‘쿨하지 않게’ 비춰진다는 사실을. 왜냐고? 보편성과 특수성 사이의 보이지 않는 위계 때문이다. 문화의 영역을 끌어들이면서 자기 주장을 펴는 것은, 역으로 문화상대주의말고는 설 자리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이 사회 속에서 다르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비주류라는 것이다. 다문화를 표방하는 뉴욕에서도 주류 문화는 존재한다. 주류 문화는 이미지로 드러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스스로를 증명할 필요도, 논쟁할 필요도 없이 공기처럼 퍼져 있다. 바로 유럽에 뿌리를 둔 백인 문화다. 이 문화는 문화상대주의를 가능하게 만든 절대 보편의 문화로서, 일상생활에서는 특수한 문화로조차 인식되지 않는다. 이 위계는 십대 이민자 2세들이 가장 민감하게 알아챈다. 그들은 뉴욕에서 ‘쿨하게’ 보이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 부모님이 가져온 특수 문화의 흔적을 최대한 지울 것. 그리고 논쟁할 필요가 없는 ‘미국 문화’에 최대한 적응할 것.


"특수 문화의 흔적을 지울 것. 그리고 ‘미국 문화’에 적응할 것."


세상에는 쿨하고 싶어도 쿨할 수 없는 사람이 있는 법이다. 1961년,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기 위해 이집트 카이로에서 배를 타고 뉴욕 항구에 도착한 에드워드 사이드가 그러했다. 이 팔레스타인 십대 소년은 미드 타운을 빠르게 가로질러 가는 뉴욕 행인들에 어떻게 섞여야 할지 몰라 어색해한다. 이는 일시적인 느낌이 아니었다. 사이드는 한 평생 뉴욕에서 살아가면서도 끝끝내 이 어색함을 떨쳐내지 못했다.




 문화분열증에 걸린 소년


에드워드 사이드의 자서전 제목은 <아웃 오브 플레이스(Out of Place)>다. 솔직히 말하면 이 제목의 맛을 살리면서 어떻게 번역해야 할지 모르겠다. ‘플레이스(Place)’는 장소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는 물리적 장소 뿐만 아니라 사회적 장소도 뜻한다. 사회에서 개인이 정체성을 갖기 위해서는 여러 방면으로 위치 지어져야 한다. 직업, 계급, 성씨, 성별, 종교, 인종, 민족, 그 외에도 수많은 카테고리가 ‘사회적 주소지’로 사용된다.


사이드의 인생은 늘 주소지 실종 상태였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영원히 자리에서 비껴나”[각주:1]있었다. 여기에 그 어떤 낭만적인 뉘앙스도 덧씌우지 말자. 달리 선택할 여지도 없이 그의 인생은 처음부터 그렇게 설정되었고, 이 선천적 환경이라는 굴레는 누구에게나 유쾌할 수 없다. 사이드는 팔레스타인에서도 최소수인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국적도 모호했다. 사이드의 아버지가 젊은 날 미국으로 건너와서 시민권을 얻은 까닭에, 사이드는 팔레스타인인 동시에 미국 시민이었다. 십대 후반에 미국으로 억지로 보내지기 전까지도 사이드는 중동에서 정착된 삶을 누리지 못했다. 아버지의 사업 때문에 가족 전체가 끊임없이 중동을 이동해야 했다. 사이드는 아동 시절 교육을 팔레스타인이 아닌 이집트 카이로에서 받게 되는데, 당시 카이로는 영국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소위 ‘좋은’ 학교들은 모두 영국식 커리큘럼을 따랐다. 결과적으로 사이드는 아랍 역사보다 영국 역사를 훨씬 잘 알게 되고 만다.


사이드는 이 상황을 다음 한마디로 압축한다. 자기 이름이 지독히도 싫었다는 것이다. “‘에드워드,’ 이 멍청한 영국식 이름에다가 아랍 성씨일 게 틀림 없는 사이드를 억지로 갖다붙인”[각주:2] 자신의 풀네임에 적응하는데 그는 오십 평생이 걸렸다고 했다. 아랍 사람이라면 누구나 (심지어 사이드의 엄마마저도) ‘에드워드(Edward)’의 ‘r’을 발음하지 못했다. 반면, 뉴욕 사람들 역시 십중팔구 그의 성씨를 잘못 발음했다. 사이-이드(Said)가 아니라 사이드(Side)로. 마치 에드워드 사이드란 영원히 옆으로 비껴나야 할 존재라고 말하는 것처럼.


사이드의 분열증은 뉴욕에서 갑자기 폭발한다. 십대 팔레스타인 문학 소년이 무의식적으로 축적해온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 갑자기 수면 위로 뛰쳐나온다. 이 ‘각성’은 단지 사이드가 가족을 떠나야 했기 때문에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사이드의 아버지가 결정한 유학 행선지가 하필 뉴욕이었기 때문에 벌어진 사건이었다. 뉴욕, 이 땅에는 가혹한 지적 자유가 있다. 그것은 ‘무엇이든 공부해도 된다’는 그런 달콤한 자유와는 다르다. 뉴욕의 지적 환경은 끝없이 창의적으로 되라고 주문하지만, 정작 현실은 살아남아야 하는 정글과도 같아서 창의성이 살아남기 힘들다. 지적인 시야가 확장될수록 무지한 세상 속에서 ‘액션’을 어떻게 취해야 할지 모르는 불안감과 분열증도 심해진다. 뉴욕의 지성이란 이 불협화음을 뼛속까지 체험할 수 있는 자유다.


사이드의 고등학교가 딱 그러했다. 그 학교는 뉴욕 위쪽에 붙어 있는 뉴잉글랜드에 있었다. 뉴잉글랜드의 교육 환경은 상류층 백인들이 일색으로, 뉴욕의 최부층의 특권과 곧바로 통한다. 이곳에 어느 날 뚝 떨어진 사이드는 절망과 희열을 동시에 맛본다. 미국 교육은 그의 사고 방식을 획기적으로 열어젖혔지만, 그가 온 힘을 다해 이룩한 성과는 졸업식 때 무시당한다. 사교적이지 않은 ‘모범생 팔레스타인 소년’은 학생 대표가 될 수 없다는 암묵적인 결정 때문이었다. “내가 그들이 바라는 대로 되지 않았기”[각주:3]때문이었다. 그 순간, 그는 갑자기 전체 그림을 보게 된다. 그는 카이로에서 영국식 교육을 받았고, 영국의 전통을 이어받았다는 미국 뉴잉글랜드에 왔다. 그러나 정작 이곳에서는 ‘아랍인’이라는 조건 때문에 이방인으로 낙인 찍힌다. 하지만 사람을 출신 문화대로 분류하는 게 타당한 일인가? ‘에드워드 사이드’라는 사람은 팔레스타인, 카이로, 영국, 미국, 이 모든 조건을 흡수하여 만들어진 존재가 아닌가? 자신의 문화분열증을 이해하려는 사이드의 싸움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고등학교 졸업식, 이때부터 사이드는 자신의 문화분열증을 이해하려는 싸움을 시작했다.



졸업 후, 사이드는 콜롬비아 대학의 영문학 교수가 된다. 그리고 평생 뉴욕에서 살아간다. 그러나 뉴욕에서의 삶은 평탄하지 않았다. 사이드의 삶을 연구한 조셉 마사드는 그의 좌우명을 이렇게 요약했다. “지성인의 삶은 반드시 이주민과 추방자의 삶이 되어야 한다.”[각주:4] 사이드는 처음부터 문화의 추방자이자 이민자였다.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순수한 ‘팔레스타인 문화’ 혹은 ‘아랍 문화’라는 것이 상정될 수조차 없게 되었을 때부터, 그의 추방은 예정되어 있던 것이다. 이 추방은 뉴욕에서 현실이 된다. 그리고 1967년에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에게 점령당하면서 정점을 찍는다. 그는 이제 돌아갈 곳이 없다. 문화상대주의를 논하며 ‘팔레스타인 문화’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그 무언가조차, 정치적 세계에서는 이미 소멸되었다. 그는 말 그대로 뉴욕에 ‘버려졌다.’ 홀로 남은 사이드에게 남은 방법은 딱 하나였다. 자기 정체성을 재인식할 수 있는 지적인 토대를 새로 쌓는 것이다.


“나는 비판을 아주 진지하게 대한다. 한 편이 다른 편에 맞서지 않을 도리가 없는 전투의 한가운데서조차 비판이 존재해야만 한다고 나는 믿는다. 싸워야만 하는 논제, 문제, 가치, 생명이 있는 이상 비판적 의식도 반드시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각주:5]


그가 문학비평가만이 아니라 문화비평가가 된 것도 이때였다. 문학의 영역을 다른 ‘불순한’ 영역과 섞지말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사이드는 개의치 않았다. 이것은 오롯이 그가 문화분열증을 간직한 채 뉴욕에서 살아가기 위한 방식이었다.



 중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사이드는 고백한다. 이 문제의식을 세우기 전까지는 아버지가 정해진 삶의 굴레 속에서만 살았었다고. 자기 자신은 “미국인 비즈니스맨의 아들”[각주:6]에 불과했다고. 그렇다. 미국인이 되기로 결정한 것은 그의 아버지였다. 그가 아니었다. 그러나 ‘아들’인 이상, 분열된 정체성은 의문 없이 세습되어야 한다. 이는 오늘날 수많은 뉴욕 이민자들의 초상화다.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진 맨해튼의 풍경 너머에는, 이 섬에 닿기까지 ‘당연하지 않았던’ 과거가 숨어 있다. 근대화와 식민화를 거쳤던 시간, 수많은 사람들은 이 새로운 시대 속에서 과거로부터 단절되어야 하는 선택을 해야 했다. 우리는 모두 그 누군가의 아들딸이다. 우리 안에도 미묘한 문화분열증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분열증이 봉합될 수는 없다. 이것이 사이드의 결론이다. 사실상 순수한 문화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화는 서로에게로 갈마들고, 서로에 대한 편견에 기대어 인식 체계를 세운다. 이 관계는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문화적 인식 체계는 상대방을 어떻게 대할지 태도를 결정하고, 거기에 정당성까지 덧붙인다. 사이드는 여기서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발생지를 찾는다.


문화상대주의가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어디까지나 비정치적인 영역에서 뿐이다. 반일 감정이 있더라도 일본의 애니메이션 문화는 괜찮고,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은 문제지만 할라 푸드가 뉴욕 길거리 음식의 대표가 되는 것은 좋다. 개고기를 먹거나 애벌레를 먹는 문화를 이해할 수는 없지만 결국 내가 안 먹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만약 논쟁이 정치적으로 비화하면 ‘타문화에 대한 이해’ 따위는 사치가 된다. 이 순간 어느 문화가 중심이고 주변부인지가 확연히 드러난다. 중심 문화는 자기가 보편이라고 주장하며, 더 이상 특수한 차이를 참아주지 않겠다고 말한다. 따라서, 누군가 “당신의 문화를 이해해주겠다”고 말할 때 문화적 약자는 또 다른 명령어를 듣는다. 문화라는 안전 지대를 벗어나는 순간 나는 내 의견을 ‘정상적으로’ 주장할 수 있는 지대를 잃어버릴 것이라는 것. 나의 문화는 정치적으로 죽어있어야만 존중받을 수 있다는 것.


사이드는 이 차별 속에서 또 다른 통찰을 끌어냈다. 너와 나를 가르는 행위는 사실상 너와 내가 단 한 번도 완벽히 분리된 적이 없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고로, 문화분열증은 누구에게나 있다. 문화는 고정된 이미지가 아니다. 그것은 서로에게로 갈마들고, 분열되며, 창조된다. 이 ‘뉴요커’의 놀라운 사유는 다음 편 <오리엔탈리즘>을 통과하며 살펴보겠다.



글_김해



  1. 각주 1) Edward W. Said, , Vintage Books, 1999, p.19 [본문으로]
  2. 각주 2) 같은 책, p. 3 [본문으로]
  3. 각주 3) 같은 책, p.230 [본문으로]
  4. 각주 4) JOSEPH MASSAD, , “THE INTELLECTUAL LIFE OFEDWARD SAID,”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4, p. 7 [본문으로]
  5. 각주 5) 같은 책, 재인용, p.8 [본문으로]
  6. 각주 6) Edward W. Said, , Vintage Books, 1999, p.8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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