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뉴욕, 가장 평범한 존재들의 환상 - 『위대한 개츠비 』



가장 평범한 존재들의 환상(2)

: 뉴욕, 그리고 스콧 피츠제럴드




아메리칸 드림을 묘사한 최초의 작품. 이것은 『위대한 개츠비』(이후 『개츠비』)에 따라붙는 가장 전형적인 찬사다. 누구나 동의할 만하다. 아메리칸 드림의 핵심은 ‘누구나 노력만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약속이고, 개츠비는 이 약속의 산 증거이기 때문이다. 무일푼 집안에서 태어나서 상류 계층에 버금가는 재산을 긁어모은 것이 개츠비다. 흙수저 출신이 금마차를 타고 돌아왔다. 심지어 귀족 가문 유부녀에게 대놓고 구애까지 한다. 발칙하지만 대단하다. ‘수저론’에 뼈아프게 공감하는 요즘 시대 청년들에게는 신화에나 존재할 사기 캐릭터일지도 모른다.


개츠비는 사기캐릭터?



뉴욕 드림


아메리칸 드림은 신분과 계급의 개념에 뿌리내리고 있다. 상류 계층과 하류 계층, 그러니까 금수저와 흙수저의 문제인 것이다. 작품 『개츠비』를 둘러싼 유명한 해석도 계급론에 빚진다. 20세기 초 ‘올드머니(Old Money)’와 ‘뉴머니(New Money)’ 간의 시대적 대립을 반영했다는 것이 그 중 하나다. 올드 머니란 식민지 초기부터 부를 독식해왔던 귀족적 상류 계층인 반면, 뉴 머니는 19세기를 통과하며 폭발적으로 팽창한 미국 경제의 수혜를 받아 벼락부자가 된 사람들을 뜻한다. 데이지를 놓고 톰과 개츠비가 벌이는 신경전을 계급 갈등으로 해석한 셈이다.

그런데 계급론에서 한 발짝 떨어져서 보면 『개츠비』에서 또 다른 ‘꿈’이 발견된다. 지난 연재에서 다뤘던, 자본의 증식과 삶의 고양을 등치시키는 환상이다. 자본주의는 환상에 생을 불어넣어서 유통시키는 기상천외한 체제다. 사람들은 ‘더 나은 삶’이라는 환상을 먹고, 마시고, 만진다. 이로써 고양은 영적이거나 지적인 귀족만이 아니라 모든 범인(凡人)에게 약속된다.

이 약속이 계급을 막론하고 작품 구석구석에서 등장한다. 주인공들은 각기 다른 계급에 속해 있지만, 이들이 낭만적으로 추구하는 품위, 목표, 사랑 등등의 가치는 결국 돈으로 환원될 수 있다. ‘될 수 있다’는 이 가능성이 계급 간 욕망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빈자는 아직 부자가 되지 않은 사람이고, 부자는 언제든 빈자로 떨어질 수 있는 사람 아닌가? 이 공식 하에 부자는 부의 낭만을 끊임없이 과시해야 하고, 빈자는 부를 향한 열등감에 끊임없이 시달려야 한다. 이 낭만과 처절함을 교차시킨 그로테스크함이야말로 『개츠비』가 그리는 감각이다. 톰과 데이지는 최상류계층임에도 불구하고 귀족의 특별함이 사라졌다는 불안감에 시달리고, 뉴욕 외곽 퀸즈에서 카센터를 운영하는 머틀은 톰과 결혼해서 계급상승을 이루겠다는 희망 하나로 삶을 지탱하며, 개츠비는 불법으로 돈을 긁어모으면서 이것이 자신의 순수한 사랑을 실천하는 길이라고 믿는다. 누구도 계급의식을 따라가지 않는다.


'돈'이라는 새로운 계급의식



『개츠비』의 주인공들을 하나로 묶는 공통점이 있다. 뉴욕의 이방인이다. 톰, 데이지, 닉, 개츠비는 전통적인 사회 가치에 더 익숙한 미 중서부 출신들이다. 윌슨과 머틀 부부는 동부 출신이지만 뉴욕의 내부로는 진입할 수 없는 가난한 외부자다. 인물들은 각자의 거리에서 뉴욕을 응시한다. 고장난 심장 박동처럼 발작하듯이 자본을 회전하고, 축적하고, 미화하는 이 신세계에 경악과 경외를 함께 느낀다. 그리고 홀린 듯이 이 도시의 삶을 쫓는다. 작품 속에서 뉴욕 맨해튼은 실제로 두세 번 밖에 묘사되지 않는데, 나머지 부분은 인물들의 욕망 속에서 신비롭게 구성된다. “이 세상의 모든 신비와 아름다움에 대한 터무니없는 첫 약속을 간직한” “하얀 각설탕 덩어리 같은” (F.스콧 피츠제럴드, 김동욱 역, 『위대한 개츠비, 민음사, 102쪽, 2014) 비현실적인 도시로서. 이때 뉴욕은 공간적 배경을 뛰어넘는다. 이는 새 시대의 상징이다. 극한의 환상을 약속하던 1920년의 자본주의가 공간으로 구체화된 모습이다. 주인공들은 이 도시의 환상에 완전히 융화되지도, 자유로워지지도 못 한 채 이리저리 끌려다닌다.


그렇다. 『개츠비』의 꿈은 흙수저 출신이 금마차를 타고 돌아오는 아메리칸 드림보다 더 ‘환상적이다.’ 이 꿈은 차라리 뉴욕 드림이라고 불려야 할 것이다. 가장 평범한 존재들이 가슴에 품은, 혹은 그들을 그런 존재로 전락시켜버린 꿈이라고.




상품: 품위 있는 삶


꿈이 투사되는 첫 번째 대상은 상품이다. 쇼핑의 화신은 톰의 불륜녀 머틀이다. 그녀는 원래 평생 사치품이라고는 구경도 못 한 여자였다. 뉴욕 퀸즈 쓰레기 골짜기(오늘날의 코로나Corona)에서 남편과 함께 운영하는 허름한 자동차 정비소가 그녀가 가진 전부였다. 그러던 어느 날 기차에서 톰을 우연히 만나 연애를 시작하면서 머틀의 일상은 180도 바뀐다. 쇼핑 천국 맨해튼에 진입한 것이다! “쇼핑할 물건들 목록을 만들어 둬야겠어. 마사지 기구, 파마 기구, 개 목걸이, 스프링 달린 예쁜 재떨이, 그리고 여름 내내 시들지 않고 어머니 무덤을 장식해 줄 까만 비단 매듭 화환.” (같은 책, 61쪽)


상품은 그냥 물건이 아니다. 필요 이상으로 습관처럼 구매되는 상품은 물건의 기능성과는 상관 없다. 상품이 실제로 제공하는 것은 무형의 품위다. 작품 『개츠비』에서는 다양한 사치품이 항상 상류층의 권력과 직결되어 배치된다. 톰의 위압감은 고풍스러운 저택을 통해 구현되고, 개츠비의 인기는 노란색 승용차로 표현되며, 데이지의 미모는 럭셔리한 이브닝드레스로 완성된다. 이 모든 배치는 돈만 주면 품위를 가질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맨해튼 5번 가 명풍샵 쇼 윈도우 앞에서 기웃거리는 머틀 역시 품위를 사러 온 것이다. 점원이 신상품을 골라온다. 품위를 어깨에 걸치고, 품위를 머리에 꼽고, 품위를 발에 신는다. 그렇게 머틀은 ‘귀부인’이 된다.


"품위를 어깨에 걸치고, 품위를 머리에 꼽고, 품위를 발에 신는다. 그렇게 ‘귀부인’이 된다."


상품은 확실히 효과가 있다. 톰이 닉을 소개시켜 준 날, 머틀은 맨해튼에 있는 동생의 집에서 홈 파티를 열어 우아한 자태를 뽐낸다.


윌슨 부인은 조금 전에 옷을 갈아입었는데, 지금은 크림색 시폰으로 만든 정교한 야회복을 차려입고 있었다. 그 옷자락으로 방 안을 쓸고 다니는 동안 쉴 새 없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옷이 날개라더니 옷 덕분에 인품마저 달라보였다. 자동차 정비소에서 눈에 띄었던 강렬한 생명력은 상당한 거만함으로 변해 있었다. 그녀의 웃음이며, 그녀의 몸짓이며, 그녀의 말투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가시적으로 변했고, 그녀가 그렇게 부풀어 오를수록 방은 점점 더 비좁아지는 것만 같았다.

- 같은 책, 53~54쪽


그러나 변신이 완벽하지 않다. 머틀의 옷차림은 어색하기 짝이 없고, 품위는 곧 거만함으로 전락한다. 이것이 상품의 한계이다. 상품을 통한 품위는 일회용이다. 유효하되 한시적이다. 환상이 벗겨진 자리에는 일상의 너절함이 드러난다. 품위에 대한 열망은 품위 없는 삶에 대한 경멸과 맞닿아 있다. 머틀은 자기 일상을 증오한다. 그녀의 카센타가 있는 곳은 그 이름도 쓰레기 계곡이다. 쓰레기는 물건이 가치를 잃어버린 최악의 상태이다. 악몽 같은 일상에서 머틀을 구하는 방법은 ‘신상품’을 사는 것뿐이지만, 그럴수록 자기 집의 ‘쓰레기’도 늘어난다. 뉴욕이 쇼핑의 도시이자 쓰레기의 도시인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머틀의 꿈은 하나다. 톰과 결혼하는 것이다. 상품을 구매해서 품위를 지속시키는 데에는 이것만큼 가장 간단한 방법이 없다. 그녀는 톰을 향해 저돌적으로 구애를 한다. 그 구애의 끝에는 물론 돈이 있다. 이 속물적인 몸짓을 보면 마음이 짠하다. 구질구질한 일상을 향한 그녀의 분노에는 거짓이 없지만, 그녀가 상품과 쓰레기 사이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일은 영영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머틀은 데이지가 몰던 차에 사고로 깔려 죽는다. 그녀의 뉴욕 드림, 가장 평범하고 널리 퍼진 이 ‘서민의 꿈’에 피츠제럴드가 경고를 날리는 것인가? 갈가리 찢긴 그녀의 몸에는 이제 더 이상 어떤 상품도, 어떤 품위도 소용없으리라.




파티: 도피할 수 있는 세상


두 번째 환상이 투사되는 장소는 파티다. 『위대한 개츠비』에서 부가 가장 과장되는 장면을 꼽으라면 단연 개츠비의 파티다. 그의 부엌에는 “엄지손가락으로 작은 단추를 200번만 누르면 삼십 분 안에 무려 200잔의 오렌지 주스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주스 기계가 있고, 홀에는 “진짜 청동 레일로 장식한 바”에 “진과 각종 술과 코디얼 주” (같은 책, 65쪽)가 설치되어 있다. 돈의 냄새를 쫓아 수많은 사람들이 개츠비의 집을 방문한다. 맨해튼의 유명한 배우, 증권을 팔아보려는 외국 금융인, 공짜 술을 탐하는 사교계 인사, 롱 아일랜드의 어중이떠중이. 이들 모두가 개츠비의 파티에 와서 시끌벅적한 소란을 일으킨다.


개츠비의 저택에서는 화려한 파티가 끊임없이 열렸다. (영화 <위대한 개츠비> 중 파티장면)



개츠비의 파티는 뉴욕의 초상화다. 1920년 대 뉴욕은 거대한 파티장이었다. 자본은 블랙홀처럼 강력한 자기장을 형성하여 사람들을 빨아들이고 회전시켰다. “사람들은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고, 어디론가 떠날 계획을 세웠고, 그러다가 대화를 나누던 상대를 서로 잃어버리고 찾아다니다가 몇 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다시 찾아냈다” (같은 책, 61~62쪽)는 피츠제럴드의 문장은 뉴욕이라는 도시의 메타포로 손색이 없다.


이 도시-파티가 제공하는 환상은 독특하고 매력적이다. 바로 타인의 시선으로부터의 도피다. 도시 바깥의 공동체는 보통 정체성을 재단하는 견고한 경계로 꽉 짜여 있다. 계급, 성(性), 연령, 명예 등등에 대해서 안팎이 분명한 가치가 강요된다. 하지만 뉴욕은 사정이 다르다. ‘공동체 일원’이 아니라 ‘인구의 흐름’ 밖에 없다. 이 자본의 블랙홀은 인구의 유동성을 극한까지 밀어붙여, 일정한 가치 판단이 뿌리 내릴 수 있는 인간관계를 일회성 조우로 바꿔버린다. 여기서 고정된 정체성에 균열이 생긴다. 내가 누구인지 드러내기를 강요받지 않고, 나의 차이를 대놓고 비판받지 않고, 심지어 타인을 사칭한다고 해도 쉬이 드러나지 않는다. 이 분위기는 ‘뉴욕의 자유’로 예찬되어 왔지만, 이 예찬을 한 꺼풀 벗겨보면 결국 도피에 대한 흥분에 지나지 않는다. 닉이 뉴욕에 첫눈에 반한 이유도 바로 이것이었다.


나는 뉴욕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활기에 넘치고 모험으로 가득한 밤의 분위기와 끊임없이 명멸하는 남녀와 자동차들이 들떠 있는 눈동자에 안겨 주는 만족감이 마음에 들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5번가를 걸어 올라가 군중 속에서 낭만적인 여자들을 골라내 몇 분 안에 그들의 삶 속에 들어가는 상상을 하며 즐겼다. 어느 누구도 그 사실을 눈치 채거나 그러지 말라고 말리지 않을 것이다.

- 같은 책, 88쪽


그렇지만 이것이 정말 자유인 것일까? 닉은 곧 다른 풍경을 보게 된다. ‘자유의 공기’ 속에서 신뢰가 아예 사라지고 있었다. 톰은 불륜을 저지르고, 개츠비는 자신이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한 엘리트이라고 거짓말 하며, 닉이 잠깐 사귄 아가씨 골프 선수 베이커는 시합 도중 부정을 저지른다. 닉 자신마저도 여자 문제가 복잡하게 얽혔던 고향 생활을 감춘 채 뉴욕에서는 쿨한 관조자인 척 하고 있다. 누구도 스스로를 투명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이 불안한 상태에서는 진실한 관계가 형성될 수 없다. 개츠비의 파티는 이 불안한 관계의 총체다. 파티에서 웃고 취하는 사람들은 사치의 어마어마한 규모를 즐기고 있을 뿐이다.


책 말미, 개츠비의 장례식에는 파티참석자가 딱 한 명밖에 오지 않았다. 그 많은 사람들은 모두 어디 갔을까? 다른 파티에 참석 중이었을 것이다. 철새처럼 한 파티에서 다른 파티로, 더 많은 음악과 음식과 소문이 모여 있는 곳을 찾아서 옮겨 다닐 것이다. 그렇다. 도피는 원치 않아도 계속된다. 뉴욕의 활기는 오직 뉴욕을 위해서만 돌아갈 뿐이다.




연애: ‘그’ 순간은 영원하리


마지막 환상은 연애다. 『개츠비』에서 연애는 돈 없으면 할 수 없는 사업이다. 연애를 하려면 닉처럼 증권 회사에서 일하는 수준은 되어야 하고, 정부(情婦)를 얻으려면 톰처럼 애인의 쇼핑 목록을 모두 채워 줄 수 있어야 하며, 옛 사랑의 마음을 돌리려면 개츠비처럼 오직 그녀만을 위해서 오 년 간 호화로운 파티를 열 수 있을만큼 돈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 연애의 실체는 다들 쪽팔릴 정도로 허술하다. 당연하다. 상대방을 만나려는 목적이 참 별 볼 일 없기 때문이다. 물욕을 채우기 위해서나 결혼 생활의 권태를 잠시 잊기 위해서, 혹은 남편이 짓밟은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서 연애를 한다.


『개츠비』에서는 대부분 어떠한 이유로든 연애를 한다.


그런데 이 속에서 혼자 튀는 인물이 한 명 있다. 개츠비다. 개츠비는 누구보다도 사랑과 돈의 망상에 단단히 갇힌 인물이다. 하지만 다른 인물들과는 달리, 그 망상의 목적이 무엇인지가 뚜렷하지 않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데이지를 되찾으려 한단 말인가? 개츠비는 지극히 평범한 무색무취의 인간이다. 성격뿐만 아니라 과거도 그렇다. 그 옛날 데이지와 엄청난 사랑을 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냥 한량 군인과 부잣집 아가씨가 반짝 데이트한 것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츠비는 이 짧은 시절을 재현하기 위해 남은 인생을 건다. 데이지가 더 이상 오 년 전 그 여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에는 살아갈 이유까지 잃어버린다. 이쯤 되면 개츠비가 원하는 것은 ‘데이지’가 아니라 ‘데이지와 함께 했던 과거’라고 봐야 한다.


개츠비의 이런 모습은 순수한 사랑, 더 나아가 미국식 이상주의라고 해석되어 왔다. (부유한 로맨티스트처럼 미국이 바라는 자화상이 또 있을까?) 그러나 ‘개츠비적(Gatsbyesque)’이라는 형용사는 로맨티스트와 동의어가 되어서는 안 된다. 개츠비의 연애에도 숨은 목적이 있다. 돈을 모으면 ‘좋았던 그때 그 시절’이 돌아오리라는 이 독특한 욕망은 자본주의의 배치가 탄생시킨 또 하나의 환상이다. 바로 영원에 대한 환상이다.


돈이 축적과 삶의 고양을 직결시키는 사고방식은 시간에 대한 감각도 바꾼다. 시간을 질이 아니라 양의 문제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원래 고양의 순간은 자기 한계를 뛰어넘을 때 찾아온다. 지적이거나 영적인 사람들, 옛날 무림의 고수들은 수련을 통해서 스스로를 극복하려고 했다. 연인들도 상대방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는 기분을 느낄 때 사랑에 빠진다고 한다. 이 순간은 평소의 시간과 질적으로 다르다. 한계가 부서지는 찰나는 다른 어떤 순간, 다른 어떤 경험과도 대체불가능하다. 대체불가능하기 때문에 강렬한 것이다. 그런데 자본주의는 이 고양을 만인에게 약속한다. 그것도 축적을 통해 약속한다. 특별한 사람들처럼 ‘무한한’ 세계를 향해 열리는 충만한 경험을 할 수 없더라도, 돈을 지불하기만 한다면 다종다양한 환상과 기쁨을 ‘무한히’ 반복하여 제공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고양은 이제 양적인 반복에서 오는 자위가 된다. 나를 뛰어넘어 존재하는 무한한 우주에 대한 인식이, 나를 중심으로 영원히 팽창하는 세계관으로 바뀐다. 노력하기만 하면 기회가 끊임없이 찾아올 것이다. 돈을 벌기만 하면 ‘좋은 삶’을 ‘영원히’ 지속시킬 수 있을 것이다.


개츠비는 이 가능성에 처절하게 매달린다. 고급 셔츠, 고급 맨션, 고급 자동차를 구매해서 그 옛날의 낭만을 다시 살아보려 한다.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는 속물적인 철학 위에서 역설적이게도 지극히 비속물적인 목표를 쫓는다. 고양의 순간, 그 순간의 재현. 그러나 자본이 강박적으로 제공하는 ‘기쁨’은 삶의 충만한 순간을 대체할 수 없다.


그는 이 푸른 잔디밭을 향해 머나먼 길을 달려왔고, 그의 꿈은 너무 가까이 있어 금방이라도 손을 뻗으면 닿을 것만 같았을 것이다. 그 꿈이 이미 자신의 뒤쪽에, 공화국의 어두운 벌판이 밤 아래 두루마리처럼 펼쳐져 있는 도시 너머 광막하고 어두운 어떤 곳에 가 있다는 사실을 그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개츠비는 그 초록색 불빛을, 해마다 우리 눈앞에서 뒤쪽으로 물러가고 있는 극도의 희열을 간직한 미래를 믿었다. 그것은 우리를 피해 갔지만 별로 문제 될 것은 없다—내일 우리는 좀 더 빨리 달릴 것이고 좀 더 멀리 팔을 뻗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맑게 갠 날 아침에…….
그리하여 우리는 조류를 거스르는 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 가면서도 앞으로 앞으로 계속 나아가는 것이다.

- 같은 책, 253쪽


'자본이 강박적으로 제공하는 ‘기쁨’은 삶의 충만한 순간을 대체할 수 없다.'


지난 오 년 동안 개츠비는 자신이 만든 환상의 세계에서 살면서 “초록빛 불빛”을 쫓았다. 그러나 그 불빛은 이미 지나간 과거였다. 개츠비가 수많은 재산에 파묻혀 쫓았던 것은, 가장 자연스럽고 날것 그대로였던 삶의 어느 순간이었다. 돈이 약속했던 ‘더 나은 삶’의 이미지도 진짜 삶의 모방일 뿐이었다. 그의 현재는 무색무취로 텅 비어버린 데다가, 우여곡절 끝에 직접 마주한 데이지의 “목소리는 돈으로 가득 차 있” (같은 책, 172쪽)었다.


어디 개츠비 뿐일까. 『개츠비』의 인물들은 궁극적으로 이 환상 속에 살고 있다. 이 공허한 영혼들은 개츠비와 똑같은 갈증에 시달린다. 고양의 순간. 삶이 예상치 않게 선물해 주었던 ‘그때 그 순간.’ 하지만 갈증은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 끝까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시간이다.




계속되는 것은 삶 뿐이다


이것이 뉴욕이다. 머틀의 꿈은 오늘날에도 계속 이어진다. 매년 몇 십만 명의 이민자들이 뉴욕에 발을 딛는다. 이민 1세대는 노예처럼 일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자본주의 노동 시장의 밑바닥에 있기를 자처한다. 그들에게 삶을 약속하는 것은 나이키 신발, 맥도날드 햄버거, 전원식 주택, 각종 가전제품들이다. 닉의 꿈도 계속 된다. 세계 각국의 젊은이들은 번쩍거리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과 24시간 운행되는 지하철을 보며 비로소 젊음의 활기를 느낀다. 수많은 바(Bar)와 술과 소란 속에서 자유를 만끽하고, 그 후에는 각자 고립된다. 개츠비의 꿈은 뉴욕의 길거리마다 자욱하게 스며들어 있다. 삶의 빛나는 순간을 박제해서 전시하는 광고판마다, 뉴욕의 전성기를 기념하고 자랑하는 관광지마다. 이처럼, 뉴욕은 브랜드-도시가 된다.


피츠제럴드의 뉴욕은 서글프다. 왜일까. 이 도시의 거주자들이 속물이어서도 아니고, 이상을 잃어버려서도 아니다. 환상은 사람들을 가장 평범하고 볼 일 없는 존재로 전락시킨다. 환상을 구매하지 않는 이상, 환상을 먹고 마시고 만지지 않는 이상 ‘삶’을 느낄 수 없는 무능한 존재로 만든다. 가장 아름다운 도시에 가장 평범한 존재들이 사는 것이다. 뉴욕 드림은 뉴욕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가 번창한 어느 지역에나 퍼져 있는 꿈이다. 사람들은 먹고 살기 위해 돈을 번다고 한다. 혹은, 더 ‘위대해지는’ 방법으로는 돈을 버는 것이 최고라고 한다. 하지만 이 물질만능주의 밑바닥에는 삶의 생생한 순간을 향한 갈증이 숨어있다. 이 갈증이 모든 물자와 자본을 움직이는 원동력이다. 고로, 개츠비는 이 시대 평범한 아무개의 얼굴이다. 잘 살고 싶다는 욕망 앞에서 사람들은 개츠비만큼 절박해지고, 돈이 환상적인 삶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믿을 만큼 낭만적이다. 개츠비의 파멸에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은 이유도 이 부정할 수 없는 동질감 때문이다.


환상에는 끝이 있다. 그 후로도 계속되는 것은 삶 뿐이다. 재즈의 왕자 피츠제럴드의 삶도 예상치 못한 불행 속에서 막을 내렸다. 아내 젤다는 정신병을 앓고 병원에 수감되었고, 자신은 끝없는 빚에 쫓기며 할리우드에서 글을 팔았으며, 알콜 중독증에서 벗어나지 못하다가 45살이라는 나이에 생을 마감한다. 삶은 원래 이렇게 고통스러운 것일까? 차라리 환상에 취해 사는 것이 더 나을까? 피츠제럴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의 삶은 망가졌지만, 덕분에 그는 자본주의의 환상이 가리고 있던 날것의 삶을 목격했다. 고통 속에서 그는 말한다. “생기(Vitality)란……끈기 뿐만이 아니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능력에서 나타난다”(Andrew Turnbull, <Scott Fitzgerald>, Grove Great Lives, p.209, 2001)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은 삶에서 나온다. 이것이 사람들이 뉴욕-브랜드의 환상이 깨진 후에도 이 도시에서 버티고 살아갈 수 있는 이유다. 죽어버린 개츠비는 갖지 못한 힘이다.


뉴욕에 반하고, 타임스퀘어에서 입을 딱 벌린 채 사진을 찍는 우리는 모두 피츠제럴드의 후손이다. 백 년 전 그가 뉴욕에 찬란하게 새긴 환상을 바라본다. 그렇다, 뉴욕은 아름답다. 누가 부정하겠는가. 하지만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다. 피츠제럴드는 이 양면을 뼛속까지 이해했던 자였음이 틀림없다. 이 늙은 도시 깊숙한 곳에는 개츠비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뉴욕이 빛나는 한 이 그림자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글_김해





설정

트랙백

댓글

  • 펀스 2016.04.03 01:24 신고 답글 | 수정/삭제 | ADDR

    이런 말이 어울릴지 모르겠지만, 일전에 정말 감탄하며 읽었습니다. 오늘 또 지인과 이 책과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다 생각이 나서 또 왔네요. 티스토리에 있던 모 출판사의 칼럼이었다고만 생각하고 무작정 검색했어요ㅋㅋ
    좋은 글 감사합니다. 종종 또 올게요~

    • 북드라망 2016.04.04 10:27 신고 수정/삭제

      펀스님, 검색에 성공하셨군요! 다시 찾아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게다 댓글까지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참고로 설명을 드리자면, 저희 북드라망 출판사에서 『리좀, 나의 삶 나의 글』이라는 책을 써주신 김해완 선생님께서 매달, 마지막 금요일에 뉴욕과 인연이 있는 작가들과 작품 이야기를 써주시는 코너입니다. 카테고리를 보시면 다른 작가에 관한 글도 보실 수 있습니다.
      그럼그럼, 종종(^^) 뵙겠습니다~ 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