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과 마무리
부끄럽지만, 흠흠, 아직 스쿼시를 하고 있다. 회사에서조차 ‘아직도 하냐’고 할 만큼 조용히, 드문드문;;; 게다가 라켓도 샀다(무려 십만 원짜리 기념품이다;;;). 작년 6월 초쯤엔가 처음 등록을 했으니 이제 거의 9개월을 채워 간다. 그동안 나의 스쿼시 실력은 날로 일취월장하여, 휘두르는 라켓에 바람이 갈라지고 내가 받아친 공이 코트 벽을 한 자나 파고 들어가는 일 같은 것은, 절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초급반에서 강습을 받고 있는데, 나와 비슷한 시기에 시작하여 초급반에서 동고동락하던 친구(‘들’이 될 수도 있었는데 어쩐 일인지 대개의 친구들이 각자의 사정으로 중도하차를 했다)가 중급반으로 가게 된 것이 한 달쯤 되었다. 심지어 초급반의 선생님까지도 중급반으로 가셨다(하하하하). 그러니까 나는 한마디로 ‘장기 유급생’이랄까, 흠흠흠.
두 개 산 거 아니다. 하나만 샀다;;;
물론, 이런 상황을 전혀 예상 못한 바는 아니다. 실은 스쿼시를 시작할 때부터 늘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초급반의 친구들이 중급반으로 가게 될 것이고, 나는 <여고괴담>의 주인공처럼 졸업하지 못한 채로 계속 초급반에 있게 될 것이라는 (그러니 ‘상처받지 말자!’라는, 흑) 자기암시를 끊임없이 해왔던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장기 유급생이 되어서 그러는 것은 ‘정말’ 아닌데(지…진짜다;;;), 요즘 자꾸 꾀가 난다. 가기가 싫다.
생각해 보면, 그나마라도 한 덕에 숨통이 트이기도 했다(아랫배를 압박하던 윗배의 일부가 사라졌다;;). 생리통도 많이 줄었다(처음엔 완전히 없어진 줄 알았더니 그건 아니었던 듯). 2013년에 발병(?)하여 2014년에도 출현했던 한포진이 사라졌다(그러고 보니 2015년엔 약을 먹지 않았다). 더불어 간혹 자다가 깰 정도로 (나는 정말이지 잠에서 잘 깨지를 못하는 사람이다) 가렵게 올라오던 두드러기들도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혈연적·법률적 가족관계도 아니며, 같은 업계에 종사하지도 않는, 그러니까 나처럼 집과 회사만 오가는 사람이 좀처럼 만날 기회가 없는 사람들도 만날 수 있었다(꼭 친해졌단 말은 아니다;;; 흠흠). 그리고 이렇게 블로그의 글감도 되어 주고……, 내가 대강대강 설렁설렁 하고 있다는 사실만 빼면 스쿼시란 것이 이렇게 장점이 많을 수가 없다(다만, 사주에 목기운이 없어 적극성 제로, 비겁이 없어 승부욕이 제로인 나에게 좀 안 맞는 것일 뿐;;;).
그럼에도 내가 가기 싫으면 가지 않아도 된다. 어차피 이번 달이면 등록 기간도 끝날 테고, 그만두지 말라고 누가 사정사정하는 것도 아니고,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9개월이나 한 것도 할 만큼은 한 것이다(알아주는 이는 없으나 스스로 대견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단번에 “그만 두겠다” 소리가 나오지는 않는다. 이유가 뭘까 싶었는데 찾은 듯도 싶다.
짠! 여기서 찾았다!
篤初誠美, 愼終宜令, 도타울 독, 처음 초, 정성 성, 아름다울 미, 삼갈 신, 마칠 종, 마땅할 의, 좋을 령. 고사를 알아야 해독되는 문장이 아니라서 단어 자체로 뜻이 명확하고, 대구도 아름답다. 뜻을 풀면 “시작을 돈독히 하는 것이 진실로 아름답고 마무리를 신중히 하는 것이 마땅히 좋다”(주흥사 지음, 『낭송 천자문/추구』, 민태연 풀어 읽음, 북드라망, 2016, 64쪽)이다. 천자문은 문장보다는 낱글자를 익히는 책이기에 내가 볼 때는 '상상'이라도 해야 뜻풀이가 가능한 함축적인 문장들도 많은데, 이 문장은 풀이가 더 보탤 것도 없이 명확하다. 처음, 이 문장이 눈에 들어왔던 것은 '종'(終) 자 때문이었다. 얼른 끝내(버리)고 싶다, 는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뻔뻔하게도 나는 대강대강 설렁설렁한 주제에도 ‘마무리’만은 ‘신중하게’, ‘마땅히 좋게’ 하고 싶었나 보다. 하지만 친구들이 사라졌다는 이유로, 꾀가 난다는 이유로, 9개월이나 했으니까라는 이유로 딱 끊어버리는 것은 결코 좋은 마무리일 수가 없다. 마무리와 절단은 다른 것이니까. 그걸 알기에 막상 그만두려 하니 찜찜함이 가시지 않았던 것이다. 어쩌면 시작을 돈독히 하지 않았기에 끝내고 싶을 때 끝내지 못하는 벌일 수도 있겠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이제 '독'(篤) 자가 눈에 띈다('독' 자에는 '진심이 깃들어 있다'는 뜻도 있다). 이제 "독초성미 신종의령"이라는 문장을 나는 '무독무종'(無篤無終, 독실함 없이는 마무리도 없다), 네 자로 줄여서 새겨두겠다. 그러니, 일단은 또 결제의 힘을 빌려서(?), 흠흠, 한 3개월쯤 후에 신간 출간 소식과 함께 이제는 스쿼시도 마칠 수 있게 되었다는, 아니 마쳤노라는 낭보를 전하고야 말겠다!
그...그리고 굳이 한 가지 덧붙이자면 "독초성미 신종의령"이라는 이 아름다운 문장은, 단돈 2천원으로, 둘이서 함께, 두 달이면 완성하는『천자문 가족과 연인과 친구와 함께하는 쓰기책』의 19일차, 쪽수로는 22쪽에 있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는 독자님들이 더 잘 아시리라 생각한다. 흠흠.
한자 공부의 시작을 돈독히 하는
『낭송 천자문/추구』와 『천자문 가족과 연인과 친구와 함께하는 쓰기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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