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평범한 존재들의 환상 (1)
: 뉴욕, 그리고 스콧 피츠제럴드
크리스마스가 얼마 전이었다. 11월부터 크리스마스 준비에 여념이 없던 뉴욕은 올해도 화려하게 행사를 치러냈다. 크리스마스의 꽃은? 당연히 세일이다. 가로수길마다 치렁치렁 매달린 작은 전구를 따라 사람들은 불나방처럼 가게로 모여든다. 그런데 올해 길을 걷다가 새로이 깨닫게 된 재미있는 사실이 있다. 세일 광고는 가게 안에 어떠어떠한 물건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 대신 특정한 ‘이름’을 내세운다. “당신이 찾던 나이키의 모습—70% 세일,” 혹은 “휴일을 맞이한 그대, 프라다를 가져라.” 마치 ‘나이키’나 ‘프라다’가 실재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오늘날 사람들은 물건이 아니라 브랜드를 소비한다. 스마트폰이 아니라 아이폰을, 운동화가 아니라 나이키를, 커피가 아니라 스타벅스를 집어든다. 왜 꼭 그 브랜드여야만 하느냐고 묻는다면 답은 하나다. 그냥,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 브랜드여야만 한다는 것. 사람들의 가슴 속에서 브랜드의 존재감은 상품의 이용가치를 훌쩍 압도한다.
뉴욕-브랜드의 미스터리
도시에도 브랜드가 있다면 뉴욕은 단연 불변의 1위다. 이곳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한 번쯤은 여행해야 하는 특별한 곳이다. 이 년 전 내가 뉴욕에 간다고 선언했을 때도, 정작 친구들에게 내 유학행보다 큰 반응을 일으켰던 것은 ‘뉴욕’이라는 이름이었다. 눈을 반짝거리며 날 쳐다보던 친구들의 머릿속에 무엇이 스쳐 지나갔을지는 안 봐도 뻔하다. 뉴욕을 배경으로 한 환상적인 드라마나 영화였겠지. ‘로마의 휴일,’ ‘유브 갓 메일,’ ‘세렌디피티,’ ‘킹콩,’ ‘섹스 인 더 시티,’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비긴 어게인,’ ‘대부’......
나라고 달랐을까? 한 손에 커피를 들고, 자기만의 패션 감각을 뽐내며, 당당하게 거리를 활보하는 세계 최고의 멋쟁이 뉴요커들을 볼 것이라 기대했던 것은 정말 내 잘못이었던 걸까? 한겨울, 비행기에서 갓 내려 마주친 뉴욕의 맨 얼굴은 내가 들었던 모든 로맨틱한 소문을 와장창 깨뜨렸다. 하수구 없는 길거리는 어설프게 녹은 눈으로 질척거렸고, 건물은 겉모양만 멀쩡할 뿐 속은 모두 낡았다. 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지하철은 제대로 운행되지 않는 날이 더 많았고, 쥐들과 지하철 역을 함께 써야만 하는 뉴요커들은 고된 삶에 치여 옷차림에 신경 쓸 시간도 없었다. 고대했던 타임스퀘어의 화려한 불빛마저 서울 명동의 불빛과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 충격적이게도, 21세기 뉴욕은 모던이라 불리기에 너무 늙어버린 도시였다. 오늘날 뉴욕의 명성은 20세기 초에 눈부시게 이룩했던 영광의 그림자를 붙잡고 간신히 유지되고 있다. 어디에도 영원한 젊음은 없다.
문제는 이 사라진 젊음이 계속 되는 것처럼 여전히 ‘믿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풀리지 않는 뉴욕의 미스터리다. 여전히 뉴욕의 명성은 승승장구 하고 있다. 수많은 관광객들이 밀물처럼 찾아와 예상된 감탄사를 터뜨린다. 뉴욕의 공중화장실이나 다를 바 없는 스타벅스에서 셀카를 찍으며 ‘낭만’을 업로드하고, 세계 어느 메트로폴리탄 도시에나 있는 타임스퀘어 전광판을 보며 ‘경외’를 투사시키며, 수없이 늘어선 쇼핑 센터의 개수가 ‘미국의 자유’를 계량하는 척도라고 믿는다.
이 마법 같은 현상을 매일 보고 있노라면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된다. 브랜드의 가치가 상품의 객관적 품질에 달려 있지 않는 것처럼, 뉴욕의 도시 브랜드를 유지시키는 힘은 이 도시의 객관적 젊음에서 비롯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브랜드화’의 원동력은 우리 자신에게서 나온다.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마음 속에 품고 있는 환상이다. 이 물건, 이 이름, 이 도시 하나를 움켜쥐는 것만으로도 내 삶이 고양되는 것 같은 환상이, 물질적이라고도 비물질적이라고도 할 수 없는 ‘브랜드’의 가치를 탄생시킨다. 하지만 이를 단순히 돈이 만들어내는 속임수로 평가절하 할 수는 없다. 이 환상이 가져다주는 희열은 정말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그 누가 쇼핑 직후 찾아오는 짜릿함을 부정할 수 있겠는가? 타임스퀘어에서 셀카를 찍은 직후 밀려오는 흥분은?
마음 속에 뉴욕 여행 한번 쯤은 품고 사는거 아닌가?!
뉴욕은 이 불가사의한 환상을 일상 속에서 극대화시킨 시공간이다. 비평가 헨리 멘켄의 말마따나, "돈에서 탄생하는 것들은 대개 몹시 특별한데, 이 특별함은 세상 어느 장소보다도 뉴욕에서 가장 특별해진"(Miller, Donald L. “Supreme City: How Jazz Age MAnhattan Gave Birth to Modern America,” Simon & Schuster, p.47)다는 사실이야말로 뉴욕이 특별한 이유다. 지금으로부터 약 백 년 전, 뉴욕이 막 태동하던 시기에 이 환상을 누구보다 집요하게 파헤쳤던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이름하여 스콧 피츠제럴드다.
피츠제럴드: 재즈 시대의 왕자
1920년 뉴욕. 한 젊은 신인 작가의 이름이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다. <낙원의 이쪽>이라는 제목의 처녀작은 기성 작가들에게 볼 수 없었던 신선한 주제라면서 상당히 긍정적인 평을 받았다. 그러나 평을 받은 것은 작품만이 아니었다. 작가 본인도 그에 못지않게 대중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는 일단 잘생겼다. 흰 피부, 금발, 회색과 파란색이 섞인 눈동자 색을 가진 전형적인 미국 미남이었다. 미 중서부의 초라한 집안 출신이었지만 자수성가 하여 뉴욕에 왔다. 게다가 성공했다. 인세로 벌어들인 상당한 돈을 아내와 함께 매일 같이 펑펑 쓰고 다녔고, 이 철 없는 부부가 파티장에서 친 사건 사고들은 매일 같이 신문에 가십거리로 오르내렸다. 그의 나이 25살, 아직 새파랗게 젊을 때였다.
당시에 가장 '힙'했던 작가 스콧 피츠제럴드
이 주인공이 바로 스콧 피츠제럴드다. 피츠제럴드는 대학 시절부터 작가에 뜻을 두었다. 그는 재능이 넘쳤지만 전통적인 ‘아티스트’의 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의 일차적인 목적은 성공이었다. 스타가 될 수 없다면 자신의 아름다운 글도 가치를 잃는다고 믿었다. 물론, 프린스턴 대학에서 퇴학 당하고 자동차 정비소 아르바이트로 끼니를 이어가며 할렘 가 아파트에서 글만 쓰던 시절에는 이 꿈이 요원해 보이기만 했다. 그렇지만 꿈은 정말 이루어졌다.
그의 성공에는 개인적 운만이 아니라 시대적 운도 따랐다. 피츠제럴드의 감성이 시대의 이상과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세계 1차 대전이 막 끝났던 당시, 미국인들은 그 전과는 완전히 다른 시절 경험을 하고 있었다. 고작 ‘가난한 이민자들의 황무지 나라’로 여겨졌던 미국은 전쟁 특수를 누리면서 세계적인 열강으로 급부상했고, 경제의 양과 질 모두 폭발적으로 팽창하면서 삶이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만연해졌다. 뉴욕은 이 ‘신(新)미국’의 증거이자 상징이었다. 작은 섬 맨해튼은 단시간 내에 세상의 중심지로 우뚝 섰다. "금융, 산업, 기술, 건축, 출판, 연극, 음악, 라디오, 언론, 광고, 스포츠, 패션과 소문의 중심지"(같은 책, 같은 쪽)는 단연 뉴욕, 여기 한 곳이었다. 이 도시의 이름에는 자연스럽게 지상 위 천국의 아우라가 씌워졌다. 젊은이들은 빚이 있어도 걱정하지 않았고, 인생에 대한 낙관주의가 유행처럼 퍼졌다. 사람들 간의 유일한 공통 덕목은 ‘소비’였다. 이 광란의 1920년대는 당대 유행했던 음악 장르인 재즈를 따서 훗날 재즈 시대라 불리게 된다. 실제로는 "첫째로 섹스, 둘째로 춤, 그 다음에야 음악을 뜻했"(F. Scott Fitzgerald, ‘’Echoes of The Jazz Age’, SCRIBNER'S MAGAZINE, VOL. XC, 1931, p.461)던 시대였지만 말이다.
피츠제럴드는 이 시대가 기다리던 작가상이었다. 그의 라이프 스타일부터가 그랬다. 금전적 성공, 세련된 매너, 인생 역전 스토리, 알콜 중독, 파티 중독, 뭇 남성들의 구애가 끊이질 않는 아름다운 아내, 내일을 생각하지 않은 채 오늘을 불태우려는 몸짓 등은 새로운 세대가 찾아헤메던 새로운 이상이었다. 피츠제럴드의 작품 역시 같은 맥락에서 사랑받았다. 재즈 시대의 레퍼토리인 돈과 사랑, 금전적 성공은 피츠제럴드가 다룬 주제의 전부였다. 뉴욕의 화려한 불빛, 그 불빛을 쫓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 중 한 명인 자기 자신의 방탕한 인생을 그는 지극히 수려한 필체로 옮겨냈다.
피츠제럴드는 ‘재즈 시대의 왕자’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놀라울 일도 아니다. 그는 뉴욕의 전성기와 인생의 전성기를 같은 시기에 누렸던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피츠제럴드는 인생과 작품으로 직접 "아메리칸 드림을 살아 보이"(Andrew Turnbull, “Scott Fitzgerald,” Grove Great Lives, 2001, p.107)는 듯 했다.
환상, 물질과 이상의 이분법 너머
하지만 아메리칸 드림이란 무엇이며, 그 꿈을 붙든 피츠제럴드는 무슨 작가란 말인가? ‘돈과 예술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작가’라는 것이 피츠제럴드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지만, 그의 독특성을 포착하기에는 턱없이 얕은 접근방식이다. 동시대 예술가들은 피츠제럴드를 속물이라고 손가락질했고, 대중은 그의 작품을 즐기긴 했어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두 반응 역시 피츠제럴드에 대한 진부한 표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결국 예술이냐 돈이냐라는 낡은 이분법이다.
피츠제럴드의 실제 삶은 이 이분법을 빠져나간다. 그의 최고의 역설은 물질적 성공을 그 어떤 정신적 가치보다도 순수하게 쫓았다는 것이다. 물과 기름처럼 보이는 이 양극을 피츠제럴드는 온몸으로 융합시켰다. 그는 돈이 가져다주는 ‘격조 있는 삶’이 아름답다고 믿었다. 그래서 돈을 벌자마자 호텔비, 여행비, 의복비 등등에 한 푼도 남기지 않고 다 써버렸다. 저축이나 투자에는 일푼 관심도 없었다. 돈이 필요할수록 그는 더욱 작품 활동에 매진했고, 자신의 작품이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일수록 자신의 예술성을 확신했다. 그는 돈을 많이 버는 자신의 삶을 열렬히 추구했고 또 사랑했다. 순수하게 속물적인, 혹은 속물적인 마음을 감출 수 없을만큼 순수한! 이 기묘한 조합은 그의 작품 속 주인공들에게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피츠제럴드의 청춘들은 물질적 부에 아이처럼 마음을 빼앗기면서, 화려한 번영 속에 인생의 숭고함이 있을 것이라고 순진하게 믿는다.
시대의 화려함을 아주 잘 담아낸 영화 <위대한 개츠비>
이 양극을 하나로 묶는 힘, 피츠제럴드와 뉴욕을 연결하는 이 기묘한 태도를 뭐라고 정의해야 할까? 이것은 바로 앞서 보았던 ‘환상’이다. 비정상적일 만큼 풍족한 물질의 향연이, 인생의 가능성은 끝도 없다는 순진한 믿음으로 승화되어버린 결과다. 뿌리 속까지 자본주의적 환상인 것이다. 이는 종종 집, 자동차, 애인, 직업 등등 구체적인 이미지로 투사된다. 하지만 사람들이 환상을 통해 소유하려는 것은 특정 상품이 아니라, 끊임없이 더 나은 세계를 약속하는 기형적인 세계관이다. 계속 증식하는 자본을 계속 팽창하는 세계에 대한 징표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때 ‘더 나은 세계’란 도대체 어떤 세계인가? 똑부러지는 답은 없다. 이 방향도 한계도 없는 ‘더’라는 가능성이 거꾸로 무한한 희망을 갖게 한다. 그렇다, 바로 여기에 근본적인 모순이 있다. 돈이 제공하는 환상의 목적은 돈 자체가 아니다. 삶을 더 강렬히 경험하고 싶다는 욕망이다. 이것보다 더 강력하고 순수한 자기정당성이 어디 있겠는가? "삶은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속의 달리기 경주와 같았고, 보상은 모든 이를 위해 준비되어 있었다."(F. Scott Fitzgerald, ‘’Echoes of The Jazz Age’, SCRIBNER'S MAGAZINE, VOL. XC, 1931, p.464) 이것이 풍요로운 재즈 시대가 잉태시킨 욕망이었다.
피츠제럴드는 평생 이 힘에 끌려다니며 살았다. 그리고 이 힘은 작품으로 고스란히 태어난다. 여기에 뉴욕보다 더 좋은 배경이 없다. 뉴욕은 환상의 생명력과 파괴력이 동시에 꿈틀거리는 도시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자본주의적이고 계산적인 이 도시에서 ‘가장 로맨틱한’ 사건이 벌어지리라는 뿌리 깊은 믿음. 거리마다, 건물마다, 발길 닿는 곳곳마다 이곳에서라면 무슨 일이든 일어날 것 같다는 기대감으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열기. 1920년대부터 지금까지, 뉴욕을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한 공간으로 만드는 원동력은 바로 이 환상이었다.
피츠제럴드가 남긴 고전 <위대한 개츠비>의 주인공 개츠비는 "마치 1만 5000킬로미터 밖에서 일어난 지진을 감지하는 복잡한 지진계와 연결되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삶의 가능성에 민감하게 반응"(F.스콧 피츠제럴드, 김욱동 역, <위대한 개츠비>, 민음사, 2014, 17쪽)하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피츠제럴드 자신이야말로 이 지진계였다. 언제 위태로이 꺼질지 모르는 환상의 지반을 본능적으로 감지했던 뉴욕의 아들. 그는 질문한다. 환상이 증폭시키는 희망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돈이 담보한 희망
피츠제럴드는 <위대한 개츠비> 첫 장부터 희망에 대해 이야기하겠노라고 선언한다. 그를 대신해 선언할 사람은 닉이다. 닉은 미국 중서부 출신으로, 증권 일을 배우러 뉴욕으로 막 이사 온 젊은이다. 책의 시작부터 그는 뜬끔없이 아버지의 가르침을 상기하면서 희망에 대해 나름의 정의를 내린다. "판단을 유보하면 무한한 희망을 갖게 된다."(같은 책, 16쪽)
사실, 닉이 말하는 ‘희망’은 긍정적인 뉘앙스를 띄지 않는다. 닉의 아버지는 희망이 아니라 차라리 상류 계층의 동정심을 설파했다. 비판하고 싶을만큼 경멸스러운 사람을 만나더라도 그들이 닉처럼 유리한 조건(부유하고 교양 있는 환경)에서 삶을 시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주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닉은 뉴욕에 오면서 한계에 부닥치게 된다. 아버지 세대에서 닉의 세대로 넘어가는 25년의 세월 동안 세상은 딴판으로 변했다. 부유해진 미국 사회는 ‘희망’에 가득 차 이제 상류 계층의 관대함조차 요구하지 않았다. 특히, 새 시대의 선봉자였던 뉴욕에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바이러스처럼 퍼져있었고, 무조건 더 많은 부를 탐하는 욕심 앞에서는 상류 계급과 하류 계급 사이의 구분이 없었다. 닉은 이 세태가 아버지 세대의 관대함으로도 참아줄 수 없을만큼 천박하다며 비판적으로 말했다.
여기서 소설의 줄거리를 잠깐 소개해보자. 오 년 전, 제이 개츠비라는 가난한 군인은 닉의 사촌동생인 귀공녀 데이지와 사랑에 빠졌다. 데이지는 그 후 톰 뷰캐년이라는 백만장자와 결혼을 하지만, 개츠비는 첫 사랑을 끝내 잊지 못하여 결국 오 년 동안 불법 사업으로 돈을 번 후 데이지 집 근처에 집을 산다. 이곳이 바로 닉이 이사 온 동네인 부촌 롱 아일랜드다. 사실, 이 삼각 관계 이야기는 전혀 특별하지 않다. 아침 드라마에나 등장할 만큼 통속적이다. 이 소설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것은 에로스가 아니라 비상식적인 규모의 사치일 뿐이다. 돈이 가져오는 순간의 쾌감을 주인공들은 고집스럽게도 ‘사랑’, ‘희망’, ‘자유’와 같은 낭만적인 이름으로 칭하지만 말이다.
이 정도는 준비해야 첫사랑과의 만남 정도는 할 수 있는 것!?
그런데 닉이 비판하지 않은 사람이 딱 한 명 있다. 바로 개츠비다. 그는 개츠비가 “드러내 놓고 경멸해 마지 않는 것을 모두 대변하는” (같은 책, 16쪽)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결국 옳았다고 말한다. 이 모순된 긍정에는 뼈 아픈 진실이 담겨 있다. 개츠비는 돈이 가져다 줄 ‘새 세상’에 대한 믿음을 극도로 허무맹랑한 수준으로까지 밀어붙인다. 부자만 되면 첫 사랑을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가장 어리석고 순진한 사람이었으며, 결국 가장 극적으로 파괴된다. 헌데 그럼으로써 작품에서 진실을 밝히는 유일한 사람이 된다. 그의 인생에서 실재했던 것은 사랑도 아니고 부도 아니었다. ‘더 나은 세계’로 갈 수 있다는 강렬한 환상 뿐이었다. 기 보드르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의 “양적 저속함에 대한 열렬한 집착”은 허무하게도 “실체 없는 질을 위한 투쟁”(기 보드르, 유재홍 역, 『스펙타클의 사회』, 울력, 2015, 59쪽)일 뿐인 것이다.
고로, 희망에 대한 닉의 정의는 이렇게 다시 읽혀야 한다. ‘희망이란 판단을 무한히 유보한’ 결과라고. 부유해진 새 시대, 모든 것이 가능해졌다고? 아니다. 모든 것이 가능할 것이라는 기이한 믿음이 생겼을 뿐이다. 기존의 모든 판단을 무작정 무시해버리는 이 낭만적인 태도는 물론 돈이 양산해낸 것이다. 피츠제럴드에게 돈은 꿈을 이루는 물질적 수단이 아니다. 누추한 현실을 잠시 유보시킴으로써 비현실적인 희망을 꿈꾸게 하는 것, 이것이 돈의 힘이다. 이 힘이 삶의 의지와 직접 결부될 때 여기서부터 환상이 시작된다.
글_김해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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