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과 지성: 새로운 모험
2015년 12월부터 새로운 연재를 시작한다. 일명 “도시와 지성”이다. 이 연재의 주인공은 바로 뉴욕이다. 뉴욕이라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쇼핑, 투어, 예술, 월가, 테러, 기타 등등. ‘뉴욕’이라는 이름을 둘러싸고 떠오르는 이미지는 수도 없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딱 떨어지는 답은 없다. 그만큼 뉴욕의 시공간은 깊고 넓다. 이 심연을 더듬어보기 위해 이 도시를 통과해갔던 지성인들의 족적과 작품을 따라가보려고 한다. 이 괴물 같은 도시는 그들에게 무엇을 보고, 느끼고, 생각하게 했을까? 아니, 이 위대한 인간들의 시선에는 뉴욕이 어떻게 비쳐졌을까? 도시와 지성 사이에 강렬하게 튀는 스파크가 분명 존재했을 것이다. 이 스파크가 현재 뉴욕을 빛나는 별로 부상시킨 원동력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뉴욕은 '그들'에게 무엇을 보고, 느끼고, 생각하게 했을까?
이번에는 이 연재를 기획하게 된 계기를 간단히 이야기 하려고 한다. ‘뉴욕 타임즈’에서 ‘뉴욕과 지성’으로 넘어가는 간주 파트라고나 할까. 개인적으로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모험을 앞두고 잠시 심호흡을 할 필요가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많이 떨리기 때문이다(^^).
■ 심심한 자의 몸부림
이 모든 아이디어는 지극히 개인적인 사정에서 시작되었다. 이 년 전, 나는 오 년 동안 먹고 싸고 자며 글쓰기를 배웠던 남산강학원과 감이당 연구실을 떠나 뉴욕에 떨어졌다. 길 위에서 공부하라는 모토로 사람들을 해외로 떠미는(!) MVQ 프로젝트의 첫 타자가 된 것이다. 처음답게 많이 떨었다. 매뉴얼이라고는 없었고, 연구실도 ‘해외’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고는 전무했다. 고등학교 중퇴자 신분으로 학생 비자는 어떻게 유지하며, 부동산 집 계약은 어떻게 하며, 더듬거리는 영어로 어떻게 친구를 사귀며, 기타 등등. 나는 결국 모든 것을 하나하나 부딪혀가며 터득해야 했다. 하루하루 배우지 않기가 더 어려운 상황이었다.
흥분과 두려움은 딱 반 년 지속되었다. 그리고는 모든 것이 잠잠해졌다. 밥처럼 심심한 일상이 다시 펼쳐진 것이다. 물론, 한 번 적응하면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익숙함 가운데에서 가장 고팠던 것은 연구실에서 밥 먹듯이 했던 세미나와 글쓰기였다. 여기서는 같이 세미나를 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다들 영어 공부나 대학 공부가 우선이었다. 혼자서 문학 작품도 뒤적여 봤고 읽고 싶었던 한국어 책도 구해서 읽어보았다. 그래도 공부를 중심으로 하는 관계가 사라지니까 좀처럼 흥이 나질 않았다. 참, 이래서는 길 위에서 공부하겠다던 애초의 모토 앞에서 면목이 없어지지 않는가.
그렇게 침대에서 뒹굴뒹굴 하던 와중, 궁여지책이 떠올랐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이 도시, 뉴욕을 공부하면 어떨까? 별 거 없다고 했던 내 일상이 매일 같이 나와 뉴욕 사이에 수많은 관계를 제공하고 있지 않은가? 뉴욕, 세상에서 가장 유명하고 대단하다는 이 도시에서 그냥 ‘살기만’ 하고 떠나기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라고 생각하지만 말고, 뉴욕을 텍스트 삼아 뉴욕과 세미나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세미나가 하고 싶어요..."
■ 위대한 도시와 위대한 인간, 그 ‘사이 공간’ 찾아라
도시를 어떻게 공부한단 말인가? 하릴 없이 도시학 책을 뒤적이던 와중에 갑자기 고미숙 쌤의 조언이 광명처럼 찾아왔다. 뉴욕에 살았던 지성인들을 한 번 공부해 보라는 것이다. 눈이 번쩍 뜨였다. 그렇다, 나는 뉴욕을 처음부터 위에서 내려다보며 분석하려고 했다. 하지만 지적인 사람들의 눈을 통하여 뉴욕을 직접 ‘걸어 보는’ 경험이 더 생생하고 새로울 것 같았다. 이렇게 뉴욕의 단면을 한 조각씩 수집하다 보면, 종국에는 뉴욕이 깜짝 놀랄만큼 독특하고 다차원적인 공간으로 재구성되지 않겠는가.
시작은 좋았으나, 계획을 세워보니 갈 길이 생각보다 험난했다. “도시와 지성”이라는 연재 제목이 무색하도록, 뉴욕과 지성인 사이에서 어떤 식의 연관성을 찾아내야 올바를지 막막했기 때문이다. 뉴욕에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연관 없는 사람들을 줄줄이 소개하는 정도에 그쳐서는 안 되었고, 그렇다고 ‘뉴욕’이라는 하나의 키워드로 그들의 작품을 일괄되게 재단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 사이에서 이도저도 되지 않는 글을 쓸 까봐 겁이 났다.
하지만 이 사이야말로 내가 보고 싶었던 뉴욕의 진짜 얼굴이 아닐까? 들뢰즈와 가타리는 원래 진짜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지각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사건은 생성하고 또 소멸하는 것만을 본질로 삼기 때문이다. 그래도 사건을 지각하고 싶다면 전체를 바라보는 시선부터 바꾸라고 말한다. 이들은 전체를 ‘다양체’라고 불렀다. 다양체는 여러 구성요소들을 포함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이것은 균질한 여러 조각들의 합이 아니다. 이 요소들은 거리를 계속 바꿔가면서 서로에게 힘 작용을 하고, 또 서로의 성질을 바꿔버린다. 이 ‘사이’의 운동이 곧 다양체를 만든다. 즉, 다양체는 신체처럼 숨을 들이셨다 내뱉고 혈액을 순환하고 가스를 내뿜으며 연속적으로 변한다. 이런 다양체를 설명하는 ‘올바른’ 방법이란? 그런 건 당연히 없다.
다양체를 설명하는 올바른 방법? 그런건 당연히 없다!
뉴욕도 다양체다. 뉴욕이라는 이름은 미국 뉴욕 주에 위치한 항구 도시일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이곳에서 벌였던 수많은 활동과 지적 사건들을 가리키는 고유 명사다. 나는 노트북을 키고 뉴욕에 살았거나 한때 거쳐갔던 지성인들을 검색해 보았다. 오호 통재라, 땅에 묻힌 고구마처럼 한 번 줄기를 당기니 줄줄줄 따라나온다. 피츠제럴드, 이반 일리히, 하워드 진, 에드워드 사이드, 허먼 멜빌, 스티븐 굴드, 거기에 아인슈타인까지. 이 다종다양한 인간들을 일괄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뉴욕이라는 전체는 없다. 정말로 독특한 뉴욕을 보고 싶다면, 물리적인 공간과 인간 그 사이에만 있는 뉴욕-다양체를 조금씩 상상해야 한다. 지성인들이 뉴욕-되기를 하고 뉴욕이 지성-되기에 성공한 찰나의 순간을 발견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 탐사에 달리 매뉴얼이 있겠는가? 방법이 따로 없다. 도시와 사람 사이의 접점, 어느 한쪽으로도 전적으로 귀속되지 않는 특이점을 찾아내기 위해 각 꼭지마다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수밖에. “도시와 지성” 중에서 가장 부각되어야 할 개념은 도시도 지성도 아닌, 이 둘을 연결시키는 “와”가 아닐까.
■ 발로 그리는 뉴욕
아, 설명이 거창해지고 있다. 아직 연재를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쓸데없이 무거워지는 것은 좋지 않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진실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결국 뉴욕이든 작가들이든 읽어내는 사람은 나고, 이 요소들을 엮어서 글로 쓰는 사람도 나다. 그리고 이 모든 작업의 기반은 2015년 현재 뉴욕에서 살면서 숱한 실패와 자극, 빛나던 우정의 시간을 통과하며 모아진 내 자잘한 삶의 파편들이다. 이 연재가 내 일기장처럼 될 것이라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그보다, 내가 ‘나’의 사적인 경험에서 벗어나 뉴욕-되기에 도전하고 있음을 밝히려는 것이다. (나도 다양체의 일부다^^)
퀸즈나 브루클린 가장자리에 서서 맨해튼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저절로 탐험을 앞둔 모험가의 심정이 된다. 도시를 두고 종종 빌딩 숲이라고 하는데, 이는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도시는 정말 숲처럼 깊다. 겉으로 보기에는 보도블럭의 총합처럼 보이지만, 안으로 직접 들어가보면 길을 잃기 싶상이다. 블록과 블록 사이에도 무한한 세계가 숨어 있음을 본능적으로 감지하게 된다. 이런 세계를 ‘전부’ 알기란 불가능하다. 그보다는 표면상에서는 쉬이 볼 수 없었던 “지각 불가능한” 모습을 하나씩 드러내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 글쓰기는 뉴욕 설명서가 아니라 내 발로 그리는 뉴욕 지도에 더 가깝지 않을까. 뉴욕을 인식하는 주체(subject)가 아니라, 나를 이 도시의 일부로서 개조하는 하나의 기획(project)이 되고 싶은 바람이다.
참고로, 이 시리즈에 누구나 열정을 가지고 동참했으면 좋겠다. 이것이야말로 꿩 먹고 알 먹는 게 아닌가? 도시에 머무르는 바로 그 시간, 그 공간에서만 다듬을 수 있는 보석 같은 글이 될 테니까. 베이징과 지성, 도쿄와 지성, 카이로와 지성, 암스테르담과 지성, 하바나와 지성, 그 외 수많은 버전이 가능하다. 이것처럼 내가 살았던 도시와 나를 행복하게 해준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좋은 선물은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내 영원한 사랑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했듯이, “세상 모든 사람 되기는 세계 만들기(faire monde)이며, 하나의 세계 만들기(faire un monde)”이기 때문이다. 세계인 되기!
“세상 모든 사람 되기는 세계 만들기(faire monde)이며, 하나의 세계 만들기(faire un monde)이다. 없애버림의 과정에서 우리는 하나의 추상적인 선, 그 자체로 추상적인 퍼즐의 한 조각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리고 다른 선들, 다른 조각들과 접합접속 하고 연결하면서 하나의 세계가 만들어져서, 투명함 속에서 먼저번 세계를 완전히 뒤덮을 수 있게 된다.”
-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김재인 역, <천 개의 고원>, 새물결, 530쪽
글_김해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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