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비노, 『존재하지 않는 기사』
- 어떻게 '허무'와 함께 살 것인가?
'인생'이란 '허무'를 어떻게 다루느냐의 문제가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다. 어째서 '허무'가 문제가 되는가?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죽고 난 후에는, 흙과 먼지가 되고 만다. 죽음은 생(生)에 대한 모든 감각을 유지시켜 주던 의식이 사라지는 순간이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기억과는 별개로 죽은 자 자신에게 그의 삶은 완벽한 '무의미'가 되고 만다. 살면서 누렸던 모든 것이 사라지는 '죽음'을 바로 곁에 두고 사는 것은 고통스럽다. 그 고통을 완화하는 장치가 '허무'가 아닐까? '허무'는 옷을 바꿔입은 '죽음'인 셈이다. 쾌락을 추구하고, 성취를 갈망하고, 철저한 소명의식을 마음 속에 품고, 안간힘을 쓰면서 생의 기록을 남기는 이 모든 인간적인 행위들의 이면에는 어찌 할 수 없는 근본적인 '허무', 존재가 흩어져버리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자리잡고 있다. 망각하지 않고서는 삶을 지속할 수가 없다.
『존재하지 않는 기사』가 다루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이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존재하지 않는 기사' 아질울포는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한다. 시작부터 역설이다. 그가 입고 있는 하얀 갑옷 속에는 정작 갑옷을 입고 있는 사람이 없다. 오로지 갑옷이 말하고, 갑옷이 움직일 뿐이다. 그렇지만 그는 '갑옷'조차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자', 아질울포의 '정체'는 그 자신의 '고유성'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순결을 잃을 뻔한 귀족 처녀를 구해내고 받은 기사작위, 기사로서 걸치고 있는 갑옷, 기사로서 얻은 전쟁에서의 공훈만이 '존재하지 않는 기사' 아질울포의 '존재'를 드러낸다. 아질울포가 진짜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 하는 것을 묻지는 말자. 차라리 여기서 물어야 할 것은 다른 것이다. 명함에 박혀있는 회사명과 직급, 입고 있는 옷의 브랜드, 살고 있는 아파트의 주소 등등, 각자에게 붙어있는 이런 '라벨'들을 모두 떼버리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 우리는 정말 존재하기는 하는 것일까? '존재하지 않는 기사' 아질울포는 전장의 그 어떤 장군보다도 열심히 일하고 싸운다. 그러나 그는 존재하지 않는다. 칼비노가 '존재하지 않는', 그러나 존재하고 있는 기사 '아질울포'를 통해서 던지는 질문이 바로 여기에 있다. 정장과 유니폼을 벗어버린 후에도, 아무런 소속이 없어도 과연 자신의 '존재'를 붙잡아둘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아질울포는 일을 하거나, 전투를 벌이지 않을 때에는 작은 돌을 이용해서 열을 맞추거나, 빵쪼가리를 뭉쳐서 정렬된 도형을 만드는 일에 몰두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의식이 흩어져 소멸될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는 잠이 들지도 못한다. 의식의 중단은 곧 소멸이기 때문이다. 아질울포의 일과 휴식은 컴퓨터를 통해서 일을 하고, 쉬는 동안에는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는, 이른바 현대에 '존재'하는 인류와 몹시 닮아 있다. '게임을 하면서 쉰다'라고 하지만, 특정한 임무를 부여받고, 그 임무를 완수해 내는 게임의 가장 기본적인 태스크는 사실 '일'을 하는 것과 큰 차이가 없다. 게임을 멈추면 어떻게 될까? 뭐라도 해야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 상태를 견딜 수가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순간을 노리고 들어오는 '허무'를 감당할 수가 없다. 아질울포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사라지고 만다. 뭐라도 '해야만' 의식을 붙잡아둘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그는 잠도 잘 수 없다. 잠들면 그대로 사라지고 만다.
아질울포와는 반대의 경우도 있다. 모든 것을 망각 속으로 몰아넣은 아질울포의 하인 '구르둘루'다. 그에게는 '자아'가 없다. 식량을 배급하는 줄 어느 곳나 그가 있다. 매번 이름을 바꾸고, 매번 다른 사람이 되어서 거기에 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이 '구르둘루'라는 것도 모른다. 단 한순간도 주의를 집중하지 못하기 때문에, 외부로부터 오는 아주 작은 자극만으로도 그는 자신을 잊고 다른 사람이 되고 만다. 그는 아질울포의 거울상에 다름 아니다. 어느 곳에나 존재하나 자기 것이라고는 단 한순간도 갖지 못하는 존재와 존재하지 않으나 매순간 '존재'를 자각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는 쌍을 이루고 있다. '구르둘루'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어디에나 존재하는 구르둘루, 월급을 주는 곳이라면 어디든 기웃거리는 구르둘루, 매번 다른 인간이 되는 구르둘루, 단 한순간도 집중하지 못하는 구르둘루, 구르둘루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구르둘루는 늘 '허무'를 피해서 다닌다. 그래서 그의 인생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허무'가 없으면 '의미'도 없다. 이 또한 역설이다. 모든 의미를 집어삼키고 마는 죽음-허무야말로 '의미'를 생산하는 원동력이 된다. 반대로 존재 자체가 허무인 아질울포는 생의 모든 것을 '의미'로 채운다. 이 극단의 사이에 랭보와 테오도라 수녀가 있다. 랭보는 '허무'와 먼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자기 증명의 열망에 가득찬 '젊음'을 상징한다. 그에게 인생은 '허무'를 향해 달려가는 행로가 아니다. 여느 젊은이들이 그렇듯이 얻고 싶은 것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처음에는 아버지를 죽인 원수에 대한 복수가, 그 다음엔 야망이, 그 다음에는 사랑이 그를 움직인다. 열매를 맺기 위해 꽃을 만개시키는 여름날의 나무처럼 그는 생의 에너지로 가득차 있다. 전쟁터에서 우연히 만난 여전사 브라다만테에 대한 사랑으로 열병을 앓는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건다. 이 열망의 곁에는 어떤 허무도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다. 무의미에 대한 공포도 마찬가지이다. 생의 허무 속에서 그래도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찾는다면, 혹은 살아갈 수밖에 없는 어떤 숙명이 있다면 그것은 청년 랭보의 삶 속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땅을 뚫고 올라와 비와 바람을 맞으며 커가는 나무. 나무는 자신의 성장에 의문을 갖지 않는다. 우리의 생도 나무를 닮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 모든 이야기는 테오도라 수녀(화자)의 기록으로 전개되어 간다. 이를 통해서 이 소설이 가지고 있는 기가막힌 형식미가 드러나는데, 그것은 쓰지 않겠다. 알고보면 재미가 반감되는 법이니까. 본문 페이지가 170여쪽 밖에 안 되는 '긴 단편'이니 꼭 읽어보시면 좋겠다. 이 짧은 우화 속에 칼비노는 '인생'의 본질,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숙명, 근본적인 허무와 마주하는 법 등, 모든 것을 담았다. 소설을 읽고 나는 생각했다. '이래서 살아갈 수밖에 없구나'라고.
"그도 배우겠지요……. 우리도 우리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존재한다는 것도 배울 수 있는 거랍니다……."
1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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