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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하고 인사하실래요 ▽/씨앗문장

법으로 소통한다는 것? 하나의 리듬을 탄다는 것!

by 북드라망 2015. 12. 7.


소통, 하나의 신체가 되는 법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말을 하며 산다. 만일 말을 못하는 신체를 가졌더라도 대체적인 의사소통을 하며 산다. 그만큼 인간은 소통하는 생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저귀는 때지 못했지만, 수다는 떨 수 있다!



소통이란 기본적으로 표현을 필요로 한다. 그중 제일 많이 쓰이는 표현은 앞서 말했듯이 ‘말’이다. 그래서일까? 현대는 말 잘하는 것을 높이 평가를 한다. 쉽게 볼 수 있는 예로 취업할 때를 보자. 취업을 위해 좋은 스펙을 두둑이 쌓지만, 면접에서 말을 잘하지 못하면 가차 없이 떨어진다. 또는 자기주장을 멋있게 구사하지 못하면 무시를 당한다. 그래서 어느 사람들은 말을 배우기 위해 돈을 내고 학원에 다니기도 한다. 그런데 말을 하는 근본적인 원인인 소통과는 멀어지고 있다. 왜 그런 것일까?  


춘추시대에도 소통에 대해 고민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바로 ‘한비자’. 한비자는 유세가이다. 그중에서도 법을 옹호하는 사람이어서 법을 설파하였다. 법을 설파하는 이가 소통에 대해서 어떻게 고민했을까?


하는 말이 유창하고 거침없이 이어지면 화려할 뿐 알맹이가 없어 보입니다. 말이 착실하고 정중하며 빈틈없고 강직하면 도리어 서투르고 산만해 보입니다. 인용을 자주 들면 말이 길어지고, 비슷한 사례들을 열거하여 비교하면 속이 비고 쓸모없어 보입니다. 요점만 간단히 간추려서 그 대강을 직설적으로 간결하게 말을 하면 미련하고 화술이 부족해 보입니다. 상대에게 바싹 붙어 마음을 떠보는 듯이 말을 하면 외람되고 염치없게 보입니다. 말이 넓고 크고 깊고 고상해서 헤아릴 수 없으면 과장되고 쓸모없어 보입니다. 작은 이익까지 계산하여 세심하게 말을 하고, 구체적인 수치를 따져 가며 거듭해서 말을 하면 치사하다 여깁니다. 세속적인 말솜씨로 상대방의 뜻에 맞춰 거슬리는 일이 없으면 목숨을 보존하여 아첨한다 여깁니다. 세속적인 말을 피해 유별나게 말을 하여 이목을 끌게 되면 무책임하고 허황되다 여깁니다. 기민하게 말을 꾸며 수사가 뛰어나면 현학적인 말이라고 여깁니다. 학문적인 문장 없이 본심만 질박하게 말을 하면 미천하다 여깁니다. 시경과 서경을 인용하며 지난 일을 예로 들면 외기만 잘한다고 여깁니다. 이것이 신(臣) 한비가 말하기를 어렵게 여기며 깊이 근심하는 까닭입니다.

 -『낭송 한비자』, 북드라망, 20쪽


어떻게 말을 해도...


이렇게 말에 대해 깊은 성찰을 하다니. 그런데 그의 성찰에 따르면 어떤 말을 해도 꼬투리가 잡히는 꼴이다. 어떻게든 멋진 말을 구사하고 애를 써도 말이다. 즉 소통은 말을 잘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예로 한비자는 공자를 말하기도 했다. 공자는 상대방의 상황을 헤아려 뜻을 잘 전해주는 사람이다. 그만큼 공자는 말하기의 대가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공자는 광(匡) 땅 사람들에게 포위를 당하였다. 말하기의 대가임에도 소통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렇다면 소통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지혜 있는 사람이 어리석은 임금을 설득한다 하여도 반드시 그 말이 채택되는 것은 아닙니다. 문왕이 주를 설득하려던 것이 그 예입니다. 문왕이 주를 설득하니 주는 그를 가두었습니다. 주에게 간언하다 익후가 화형을 당하였고, 귀후는 시신이 저며져 말려지는 형벌을 받았고, 비간은 심장이 찢겼으며, 매백은 죽어 소금에 절여졌습니다. …… 그런고로 군자는 말하는 것을 어렵게 여기는 것입니다. 더욱이 지극한 말은 귀에 거슬리고 마음에 맞지 않아 현인과 성인이 아니라면 바로 듣지 못합니다.

-『낭송 한비자』, 북드라망, 22쪽


한비자는 소통이 되려면 듣는 사람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상대가 듣지 않으면 소통 불가하다고 말이다. 어떻게 보면 너무나 당연한 말이다. 소통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닌 다른 사람과 같이 하는 것이니 말이다. 우리의 몸을 봐도 그렇다. 소화를 할 때 모든 오장육부들이 하나의 리듬으로 움직여야 한다. 그래야만 음식물을 소화시키고 배설을 할 수 있다. 그런데 만일 오장육부가 따로 따로 움직인다면, 아무리 좋은 음식을 먹어도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된다. 이것처럼 소통이란 타자와 내가 하나의 리듬을 타며 움직이는 것이지 않을까.


하나의 리듬, 한 팀!



그런 점에서 한비자가 법을 설파한 이유를 알 수 있을 듯하다. 법이란 공통의 약속이다. 만일 약속한 법을 지키지 않으면 신뢰와 리듬이 깨진다. 그만큼 법이란 다양한 타자들이 하나의 신체가 되기에는 아주 좋다. 곧 한비자는 법으로서 소통하고 하나의 신체성을 가지려고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법이란 하나의 신체성, 소통하는 것이 핵심이지 않을까?


글_김한라


낭송 한비자 - 10점
고미숙 기획, 한비 지음, 구윤숙 옮김/북드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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