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중에 겪는 증상들을 ‘생의 선물로’
- 자학, 감기, 자현 -
자학: 여름은 여름답게
임신부가 학질(瘧疾)에 걸려 오한(惡寒)과 신열(身熱)이 나는 것을 ‘자학(子瘧)’이라고 한다.
─「잡병편」, 부인, 법인문화사, 1,673쪽
자학은 '뒤끝'이 있는 병이다. 임신부가 보낸 여름을 몸이 기억해 뒀다가 가을바람과 만나면 그 기억을 끄집어내서 학질이라는 혹독한 병으로 뒤늦게 책임을 묻는다. ‘나는 지난여름 네가 한 일을 알고 있다.’며.
『동의보감』에서는 “앓는 증상이 사람을 견디지 못하게 학대한다고 하여 학질이라 한다.” 고 병명의 유래를 밝힌 다음, 그 증상을 자세히 묘사해 놓았다. “학질이 처음 발작할 때는 먼저 솜털이 일어나고, 기지개를 켜고 하품이 나며, 한기가 들고 떨려서 턱이 서로 부딪치고, 허리와 등이 다 아프다. 한기가 멎으면 겉과 속에 다 열이 나면서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고 갈증이 나서 찬물만 마시려고 한다.”(1,428쪽) 흔히 ‘학을 뗀다.’고 할 때 ‘학’이 바로 ‘학질’을 일컫는다. 그만큼 혹독한 병이다.
학을 떼다;;;
학질의 원인은 다양하다. 여름철에 더위에 상하면, 서사가 영기(營氣)나 위기(衛氣) 속에 들어와 잠복한다. 그러다가 가을에 찬바람이 불면서 풍한(風寒)의 사기(邪氣)가 침입하여 이와 뒤섞이게 되면 학질이 된다. 이때 뒤섞인 사기가 영, 위기와 함께 인체를 돌면서 안으로 들어가면 오한이 들고 밖으로 나오면 열이 난다.
또한 여름에 땀이 많이 나고 주리가 열렸을 때, 차가운 수기(水氣)나 한기(寒氣)를 받으면 그것이 피부 속에 잠복한다. 그러다가 가을이 되어 다시 풍사에 상하게 되어 학질이 되기도 한다. 이때 양기(풍사)가 음기(한기)보다 성하면 열이 나고 음기가 양기보다 성하면 오한이 든다.
또한 여름이라면 어느 정도는 땀을 흘려야 열을 흩어주게 되는데 서늘한 곳만을 찾아다니면 열사가 몸에 잠복해 있다가 가을에 풍한을 만나 학질을 일으키게 된다. 요컨대, 여름에 만난 서사(暑邪)나 한기(寒氣), 열사가 몸속에 잠복해 있다가 가을에 써늘한 바람을 만나서 생기는 병이 학질이다. 임신부가 학질에 걸렸을 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극심한 오한과 발열이 번갈아 일어난다는 것이다. 찬 기운과 뜨거운 기운이 서로 부딪쳐서 태(胎)를 상(傷)하게 하고, 이로 인해 태(胎)가 동(動)하여 낙태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름을 어떻게 보내야 ‘학을 뗄’ 일을 겪지 않을까? 학질은 '더위에 상하거나 수기나 한기를 받거나 서늘한 곳만을 찾아다니는' 데에 그 원인이 있다. 한 마디로 여름을 제대로 보내지 못해 생기는 병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은 각기 다른 기운과 리듬을 갖고 있고 우리는 이 리듬을 타며 살아간다. 그 리듬을 잘 타지 못할 때 우리 몸은 엇박을 낸다.
계절의 리듬을 잘 타야 한다!
여름에는 겉은 덥지만 속은 차다. 이는 더운 열기가 몸속 깊이 침범하는 걸 막기 위한, 다시 말해 우리 몸이 뜨거운 열기로부터 자신을 지키려는 현상이다. 이런 이치를 모르면 당장 눈에 보이는 것, 내가 느끼는 것만이 전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속이 찬 줄도 모르고 덥다고 찬 음식을 먹어대니 속은 더 차게 된다. 뿐만 아니라 하루에도 몇 번씩 찬물 샤워를 하거나 선풍기를 끼고 살며, 에어컨을 스물네 시간 마구 틀어 열이 바깥으로 발산되지 못하도록 하니 그 열이 사기가 되어 피부 속에 숨어버린다. 그래서 학질이라는 무서운 놈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적당하게 땀도 흘리고, 속이 차지 않도록 따뜻한 음식도 먹고 잠자리나 옷차림도 소홀하게 하지 않으면서 여름을 여름답게 겪어내는 것, 그것이 학질이라는 뒤통수를 맞지 않는 비법이다.
비단 학질만 그렇겠는가? 우리가 살아가면서, 때에 맞춰 겪어야 할 일을 건너뛰었을 때 그것은 “건너뛴 시간만큼 장성하여 돌아와 어느 날 내 앞에 무서운 얼굴로 선다.”(박노해, ‘건너뛴 삶’)는 걸 수없이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 ‘자학’을 통해 이러한 인생사의 이치를 엄마와 태아가 몸에 새길 수만 있다면 혹독한 시련이 생의 선물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감기: 때를 기다리며 돌아가는 지혜를
임신부가 한사(寒邪)에 상하였다면 산전(産前)에는 안태(安胎)시키고, 산후(産後)에는 보혈(補血)하는 것을 위주로 한다. 치료법은 위기(胃氣)와 상초(上焦)·중초(中焦)를 상하지 않게 해야 하고, 땀을 내는 것, 설사시키는 것, 소변을 나오게 하는 것 등 세 가지는 금해야 한다.
─「잡병편」, 부인, 법인문화사, 1,673~1,674쪽
부른 배를 안고 기침으로 힘들어하는 임신부를 보는 건 흔한 일이다. 특히 임신 초기에는 면역력이 급격히 떨어져 감기게 걸리기 쉽다. 그리고 뱃속에 태아가 아직 단단하게 자리를 잡지 않은 상태라 약을 함부로 쓰기도 어렵다. 그래서 임신부의 감기가 쉬 낫지 않고 오래 가는 경우가 많다.
감기는 한사(寒邪)가 들어와 몸의 균형을 잃은 상태다. 감기는 맨 처음 태양경으로 들어온다. 이 경맥이 인체의 맨 바깥을 돌고 있기 때문이다. 면역력이 부족해서 태양경이 감기를 막아내지 못하면 감기는 점점 더 깊숙이 들어온다. 감기가 태양경으로 들어오면 오한과 발열이 있다. 이는 인체가 사기와 싸우면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때 일반적으로는 땀을 내서 사기를 몰아내거나 설사나 소변으로 사기를 내보내는 치료법을 주로 쓴다.
그러나 임신부의 경우 땀을 내자니, 땀은 진액이고 진액은 혈이라 가뜩이나 태아를 기르느라 부족한 혈이 더욱 모자라게 되고, 소변이나 설사로 사기를 내보내자니, 사기와 함께 태기까지 내려버릴 수 있어 그 또한 어렵다. 그래서 『동의보감』에서는 임신부가 감기에 걸렸을 때, 땀을 내는 것·설사시키는 것·소변으로 내보내는 것, 이 세 가지를 금하고 있다.
임산부가 감기에 걸렸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그러면 임신부가 감기에 걸렸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이미 들어온 사기를 몸 밖으로 빼내려고 하면 태아가 위험에 처할 수 있다. 그러니 사기가 더는 몸속 깊이 들어와 태아에게까지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하라는 게 『동의보감』의 처방이다. 다시 말해 사기가 들어온 지금 그 상태에서 모체의 자체 방어력을 키우라는 것. 그 구체적인 방법이 “위기(胃氣)를 상하지 않게” 하고 “상초(上焦)·중초(中焦)를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먼저 위기를 상하지 않게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소화 흡수가 잘 되는 음식을 골고루 먹어서 혈을 충분히 만들어 사기로부터 태아를 지킬 힘을 기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상초와 중초를 상하지 않게 한다는 것은? 상초에는 심장과 폐가 있다. 심장은 만들어진 피를 온몸으로 순환시키는 역할을 하고 폐는 기를 주관한다. 그러니 마음을 편안히 가지고 호흡을 고르게 해서 기혈을 충실하게 하여 그것이 온 몸에 제대로 순환하도록 하라는 것이다. 중초에는 간·담·비·위가 배속된다. 그러니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서 간담을 상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지나친 걱정이나 쓸데없는 생각으로 비위를 상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것이다.
요컨대 임신부가 감기에 걸렸을 때는 이미 들어온 사기를 쫓아내는 데만 몰두하다 보면 태아를 위험에 처하게 하는 더 큰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 그럴 때는 전방에 나가 정면으로 승부하지 말고, 슬그머니 물러나 후방(태아)을 지키며 적이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도록 하는 전술을 쓰라는 것. 그러면 보급로가 끊긴 적이 스스로 물러가게 될 것이므로. 살다 보면 때를 기다리며 돌아가는 지혜도 필요한 법. 임신부의 감기는 이런 지혜를 기를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자현: 자신을 알며 삼갈 줄 아는 지혜를
임신 때 태기(胎氣)가 고르지 못하여 위로 치밀어서 명치끝이 불러 오르면서 그득하고 아픈 것을 ‘자현(子懸)’이라고 한다.
─「잡병편」, 부인, 법인문화사, 1,673쪽
앞에서 말한 자학과 감기가 외부의 기운에 의해 일어나는 증상이라면, 자현(子懸)은 임신부의 몸 자체의 기운 조절에 문제가 생겨 일어나는 증상이다. 자현의 현(懸)은 ‘매달다’는 뜻으로 태아의 기운이 엄마의 명치끝에 매달린다는 의미이다. 그 원인은 신장이 간직하고 있는 정기(精氣) 부족이다. 타고난 정기가 부족한 사람이 임신 후에 태아를 기르는 과정에서 정기가 더욱 고갈되면 이런 증상이 나타난다. 또한 임신 중에 음식을 조절하지 못하고 주거 생활과 활동을 적절하게 하지 못해 후천적으로 음기가 손상되어도 역시 자현 증상이 나타난다.
선천적인 이유에서든 후천적인 이유에서든 자현은 음을 주관하는 신장의 기운이 약한 데 원인이 있다. 태아는 양기이다. 음기인 신장의 정기가 충분해야 양기인 태기를 잡아주어 태아가 안전하게 자랄 수 있는데, 이것이 부족하여 기가 위로 뜨면 태기도 함께 위로 뜨게 된다. 태기가 위로 뜨면 명치끝이 불러오면서 그득해지고, 치밀어 오른 태기가 폐를 압박하면 호흡이 가빠지고, 부족한 음기로 인해 심장의 화(火)가 지나치게 성해져서 가슴이 답답하고 불안초조해지는 증상이 나타난다.
위에서 자학과 감기는 외감으로 인한 증상이고 자현은 몸 자체의 문제로 생기는 증상이라고는 했지만, 몸이 허약하면 외기에 쉽게 상하기 때문에 결국은 맞물려 돌아간다. 몸 안의 정기가 튼튼하다면 아무리 열사, 한사, 풍사가 들이닥쳐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그러나 정기가 약하다면 가벼운 외기의 침입에도 타격이 클 수밖에. 그러므로 선천적으로 약한 정기를 타고났다면 거기에 맞춰 일상의 리듬을 만드는 지혜를 터득해야 한다.
일상의 리듬을 잘 만들어야 한다.
소화력에 비해 지나치게 많이 먹어도 에너지가 소모되고 적게 먹어도 에너지가 모자란다. 운동을 지나치게 해도 지나치게 움직이지 않아도 역시 정기의 손상을 가져온다. 선천적으로 약한 몸을 타고 난 사람은 그런 자신을 인정하고 모든 것에 지나침이 없도록 하는 것, 그것이 태아와 모체가 함께 사는 길이다. 그리고 선천적으로 정기가 튼실한 사람이라도 임신 중 생활을 절제하지 않으면 역시 정기의 고갈로 태기가 위로 뜨는 자현 증상을 겪을 수 있다. 그러니 어떤 경우이든 자신의 처지를 알고 지나치지 않게 삼가는 자세. 그것이 자현에 가장 좋은 처방이다.
결국 임신 중에 겪는 자학, 감기, 자현 등은 임신부와 태아를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다. 그러나 엄마와 태아가 어떻게 겪어내는가에 따라 이러한 증상들을, "생의 선물로 바꿀 수 있는 능력”(고미숙, 『동의보감 몸과 우주의 비전을 찾아서』, 그린비, 309쪽)을 기르는 기회로 삼을 수도 있다.
글_오창희(감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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