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제(方劑)와 병법(兵法)
연재를 시작하며
감기(感氣)에 걸리면 오한, 발열, 두통, 몸살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 이런 병증들이 일어나는 이유는 몸 안의 정기(正氣)와 밖에서 침입한 외사(外邪) 혹은 사기(邪氣)가 서로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기 때문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때의 아군은 정기이고 적군은 밖에서 들어온 사기가 된다. 한의학에서는 질병과 치유의 구도를 이렇게 정기와 사기의 전쟁으로 설정하는 경우가 많다.
전쟁은 애들 싸움이 아니다. 전쟁에서 이기려면 고도의 전략이 필요하다. 고도의 전략이란 쉽게 말해 ‘속임수’다. 『손자병법』에서는 전쟁을 ‘속임수의 도(道)’라고 까지 했다. 그러나 단순한 속임수가 아니다. 그것은 바둑의 수(數)싸움처럼 상대의 전략을 읽어내서 상대의 허를 찔러야 하는 지략과 모략의 치밀한 계책이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상대의 전략을 읽어내고 허를 찌르는 지략과 모략의 치밀한 계책이 있어야 한다.
질병에 대한 치유의 전략도 그렇다. 질병은 단순한 적(敵)이 아니다. 갑자기 쳐들어와선 태풍 같은 병증을 앓게 한 뒤 어느새 사라지기도 하고, 스파이처럼 몸에 스며들어 천천히 서서히 몸을 잠식하는 경우도 있다. 어느 경우엔 너무 익숙해져서 좀 귀찮은 아군인 것 같을 때도 있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 좀 불편하지만 익숙한 동거를 하기도 한다. 질병은 늘 재발되고 전변된다.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예측하기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질병에 대한 한의학적 치법 또한 병법만큼이나 고차원적이고 치밀하며 다양하다. 무조건 정면승부로 적의 목을 쳐버리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손자병법』에서는 적을 다치지 않게 하면서 승리하는 것이 가장 상책이라고 했다. 질병을 다루는 것도 이처럼 상황에 따라 여러 치법을 써야 한다. 병을 치료할 때는 일반적으로 병사(病邪)를 초전박살 내는 방법만 생각하겠지만 때로는 어르고 달래서 몸에 피해가 적은 방향으로 변하게 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런 점들로 비추어 볼 때, 한의학적 치법(治法)과 병법(兵法)은 서로 결합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연결, 특히 병법을 통해 치법을 본다는 것은 발병과 치료를 서사적으로 구성할 수 있다는 뜻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의학에 무지한 일반인들이 비유적으로나마 질병의 발생과정과 치유의 원리를 터득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한의학의 이론을 이야기 구조로 설명할 수 있다면 의학에 대한 심리적 거리감은 훨씬 가까워질 뿐만 아니라 몸에 대한 인식을 삶의 영역 안으로 끌어들일 수가 있다.
의학에 대한 심리적 거리감은 일반인의 의료행위에 대한 법적 제약과 의학은 어렵다는 오해에서 비롯된다. 이반 일리치가 말한 것처럼 전문가 권력은 인간을 무력하게 만든다. 의사들은 의학을 법적으로 장악했다. 의사가 아닌 자가 의료행위를 하면 처벌을 받게 된다. 이런 법적 구속력은 환자가 자기 몸에 대한 인식을 삶 전체의 인식에서 제외시키는 데까지 이른다. 다시 말해 몸을 빼고 삶을 구상하게 된 것이다. 몸은 의사의 영역으로 예속시킨 채. 하지만 법적 구속력은 임상적인 측면에 한정되어 있을 뿐이다. 몸에 대한 인식은 불법이 아니다.
질병의 발생과정과 치유의 원리를 '이야기'로 설명할 수 있다면
몸에 대한 인식을 삶의 영역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
의학은 공부하기 어렵다는 심리도 거리감을 부추긴다. 그런데 어렵지 않은 학문이 있는가. 그런데 왜 유독 의학만 어렵다고 하는 걸까. 오히려 이해의 측면에선 서양의학도 한의학도 그렇게 어렵지만은 않다. 외울 것이 많아서 그렇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아니다. 내가 경험하기론 의학보다 물리학이나 인문학이 훨씬 더 이해하기 어렵다. 높은 수능점수, 권위의 상징인 하얀 가운, 생명을 다루는 직업 등의 요인들이 의학이 어려울 거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이 아닐까싶다. 물론 전문용어의 홍수 때문에 일반인이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점은 있다. 그래서 서사를 이용하려는 것이다. 한의학은 음양오행이라는 베이스를 깔고 있다. 음양오행은 계열을 달리하면서 의미를 확장시키는 변신의 귀재다. 그런 변신이 가능한 것은 세상이 움직이는 이치와 몸의 원리가 통한다는 자연철학적인 법칙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의학은 분과학의 전문용어를 넘어서 다른 서사와 만날 수 있는 여지가 많다.
치법이 병법과 만날 수 있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이다. 병법의 법칙을 일상의 지혜로 바꿔낸 글이 존재하는 것처럼 치법도 삶의 용법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 다만 적을 타인이 아닌 내 안에 들어온, 혹은 내 안에서 발생된 사기(邪氣)로 규정하는 것이 다를 뿐이다. 다시 말해 아군도 적군도 내 안에 있다. 즉 치법과 결합된 병법은 나를 다루는 전략과 전술이다. 이것이 병법의 서사를 통해 치법을 이해하는 두 번째 의미이고 이 글의 궁극적인 의도라 할 수 있다.
몸은 자기의 생명과 운명을 지속시키는 역동성의 주체다. 밥을 먹고 관계를 하고 일을 하는 건 다름 아닌 몸이지 않은가. 즉, 삶이란 몸을 쓰는 행위다. 그런데 몸을 소외시킨 채로 삶을 해석한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걸까. 삶의 해석은 몸이 관계하는 모든 범위를 포괄하고 있어야 한다. 그 관계의 주체인 몸이 삶의 해석 안에 들어가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기술적인 측면은 법적 규제를 받을 수 있지만 인식의 영역까지 전문가에게 의존해서는 안 된다. 박노해의 말처럼 자기 삶을 스스로 연구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자기를 연구하게 된다. 그 달콤하고 편리한 의존적 소비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평생 알 수 없는 답답함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생명은 스스로 약동하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 답답한 것은 그 본능을 억압하기 때문이다.
자기 스스로를 연구하기!
나는 앞으로 전개될 이 글이 개인적으로도 무척 흥미롭다. 이 글은 내가 그동안 구업을 지으며 사용했던 묵은 언어들에 대한 자체 평가로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연구실에서 ‘도담선생’이라는 별칭으로 불려왔고 지금도 그렇다. 이 타이틀이 만든 아우라는 나의 무지와 어리석음을 감추기에 충분했다. 그 안에서 나는 대체로 안위(安慰)했고 가끔 칼을 갈았다. 물론 칼을 간 것도 안위를 지속시키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하지만 나는 지루해진 논리로는 더 이상 삶을 추동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것이 어떤 멋진 말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나를 재구성했던 사유와 욕망은 나를 또 다시 예속시키는 굴레가 된다. 멋진 굴레는 아우라가 되며 거기서 안위의 욕망이 일어난다. 그건 일종의 고립이며 답답함이고 발병의 출발점이다. 거기서 벗어나야만 운명의 노예가 아닌 주인 노릇을 할 수 있다. 나는 이글을 통해 기존의 나의 언어가 새로운 논리를 만날 수 있는지 확인해보려고 한다. 그렇게 통과된 언어들은 다시 쓰이겠지만 너무 상투적이어서 아무리 새롭게 사유하려해도 지루한 것은 과감히 버릴 것이다. 새로운 사유에는 새로운 논리가 필요하다. 즉, 기존의 논리는 무너져야 한다. 하지만 그건 쉽지 않다. 그런데 병법으로 글을 쓰면 왠지 묵은 논리를 전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병법은 늘 새로운 계략이 필요하다. 『손자병법』에는 “한 번 사용한 계략은 다시 사용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나의 논리를 바꾸는데도 계책과 지략의 구체적인 용법이 필요하다. 병법은 그런 전략에 치밀하고 노련한 방법론이 되어 줄 것 같다.
더불어 새로운 용기도 덤으로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병법에서 계략이 중요하기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계책과 기술을 사용하려는 의지며 용기다. 계략은 계략일 뿐이다. 전장에서는 계략이 통하지 않을 때가 더 많다. 어느 책 제목처럼 전쟁에서의 ‘유일한 규칙’은 규칙이 없다는 것이다. 많은 변수에도 불구하고 전략을 세워 추동할 수 있는 힘이 바로 용기다. 그런데 어떤 경우엔 계략이 용기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계략을 세움으로써 일어나는 전투에의 용기. 그건 사유가 글쓰기로 옮겨지는 것이 아니라 글쓰기를 통해 사유가 재생산되는 원리와 같다. 이것이 이 글에 대한 또 다른 기대감이다. 난 전략적으로 계획되는 다양한 전법을 통해 해묵은 나 자신과 싸울 용기가 새로운 방식으로 일어날 것이라 본다. 물론 그 전법과 용기는 또 다른 한계를 만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에 대한 기대감도 은연중에 일어난다. 예기치 못한 변수들의 충돌과 재해석은 또 다른 계책과 용기를 불러올 테니까. 누구나 그렇겠지만 스스로 일으킨 도전은 짜릿한 법이다. 이 글은 나를 치기 위한 전법이고 계략이며 나에 대한 새로운 도전이다. 그런 점에서 그건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불어 이 글이 독자들에게도 도움이 되길 원한다. 나의 문제의식은 곧 타자의 것이기도 하다. 훌륭한 글이 아니더라도 자기 삶의 촉매로 쓸 수 있다. 그렇게 사용될 수 있으면 좋겠다.
예, 물론이죠!!
끝으로 이 글이 어떤 방식을 취하게 될지 좀 더 구체적으로 소개를 해보련다. 이 글의 큰 제목은 방제(方劑)와 병법(兵法)이다. 방제란 무엇인가? 개별적인 하나의 한약은 ‘본초(本草)’라 불린다. 본초에는 풀만 있는 것이 아니다. 뿌리, 나무껍질, 동물, 광물 등 약이 될 수 있는 자연물 전체가 본초의 대상이다. 이 본초들이 두 가지 이상 모여 하나의 조합을 이룬다. 이것을 ‘방제(方劑)’라 한다.
이 복합약물을 처방하는 원리 중에 ‘군신좌사(君臣佐使)’라는 것이 있다. 군은 군주, 즉 임금이다. 신은 국왕의 사무를 돕는 측근이다. 좌는 견제 세력이다. 대간(臺諫) 같은 감찰 장치라고 보면 된다. ‘사’는 사신 혹은 원로원 같은 역할을 한다. 군신좌사론은 약물들을 국가의 기구에 빗대어 약물을 구성하는 독특한 처방론이다. 이것은 한의학의 원리가 얼마든지 서사적인 구성과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이 연재에서는 방제 한 가지를 병법을 통해 해석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제목이 ‘방제와 병법’이다. 방제는 병법을 통해 더욱 재밌는 이야기로 펼쳐지게 되며, 앞서 밝혔듯이 더 나아가 방제의 치법은 일상의 논리로 확장될 것이다.
글_도담(안도균)
연재를 시작하신 도담 선생님은.
<감이당> 연구원. 연구실에서는 '도담(선생님^^)'이라고 불리우십니다. '인문의역학'을 공부하면서 강의도 하고 글도 쓰십니다. <감이당>을 시작하면서 훌륭한 스승과 도반을 만났고, 글쓰기라는 출구도 찾았다고 하시는데요, <왕초보의역학>과 <횡단의역학> 강의를 통해 많은 학인들을 의역학의 길로 이끄신 스타강사(!!)이시기도 하십니다. 함께 쓴 책으로는 『고전 톡톡』, 『누드 글쓰기』가 있습니다: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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