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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방제와 병법

'기허'를 극복할, 형세를 능동적으로 다루는 마지막 전략! : 사군자탕 下

by 북드라망 2015. 5. 13.


병법에 빗대보는 병의 발생과치료 : 방제와 병법

사군자탕  :
‘세(勢)’를 다루는 존재론적 보기(補氣)





(勢), 적에게 달린 승리의 기운

사군자탕의 필승 전략은 인삼이 활약하는 조건을 최적화하는 데 있다. 백출, 복령, 자감초가 그 역할을 한다. 이 약재들은 전쟁을 치르기 전 갖춰야 할 필승의 조건인 도(道), 천(天), 지(地), 장(將), 법(法)의 장치와 같은 맥락에 있다. 이 장치는 전투와 관련된 모든 상황을 아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고 아군의 전투력을 최대화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그러나 필승을 위한 이러한 전투준비는 사실상 절반의 승리일 뿐이다. 나머지 절반은 실제 전투에서 벌어지는 변수에 의해 결정된다. 무술의 세계에 입문해서 오랫동안 기본기와 품세를 익혔어도 상대의 변칙 기술에 속절없이 무너지는 경우가 많다. 기본기만으로는 실전의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그만큼 실전의 변수는 승리의 중요한 요건이다. 사군자탕에서의 전략도 그 절반의 효과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비장의 습기(濕氣)를 제거하고 기운을 설기하면서 보기(補氣)를 위한 최적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인삼이 가장 잘 활약할 수 있는 가장 최적의 조건이 된다. 하지만 인삼이 제 능력을 발휘하려면 이런 환경 이외에도 몸 상태가 항상적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삼은 실전에서 제 역할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다. 예컨대 사군자탕을 복용할 때 과음과 과식, 심신의 과로 등 몸의 기운을 과도하게 소모하거나 습기를 정체시키는 환경이 새로 만들어지면 인삼이 최적의 효과를 발휘할 수 없다. 준비는 철저했지만 실전에서의 변수 때문에 졸전이 되어버린 것이다.


일상생활의 보기(補氣) 과정도 이와 같다. 식사조절과 운동은 몸 안에 무거운 습기를 제거한다. 이는 음식이 최적의 기운을 생산할 수 있는 조건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훌륭한 조건을 갖춘다 해도 기운이 과도하게 소모된다면 잘 먹어봐야 별 소용이 없다. 기운을 소모시키는 중요한 요인은 심신의 과로와 산만한 생활이다. 과로는 음식으로 얻은 기운을 쉽게 낭비한다. 뿐만 아니라 소화 기능도 떨어뜨려서 음식의 양을 늘려 소모된 기운을 채우기가 어렵다. 만들어지는 기운은 더 적어지고 소모되는 기운은 더 커진다. 운동을 통해 좋은 조건을 만들었으나 실전에서 낭비되는 기운 때문에 준비된 기본기가 무용지물이 된 것이다. 즉, 절반의 승리가 나머지 절반의 승리로 이어지지 못하게 되었다.




준비된 절반의 승리는 자기가 이루어낸 실력이고 기본기가 된다. 나머지 절반의 승리는 기본기와 실력이 운과 변수의 여러 힘들이 아군에게 유리하게 작용되어야 한다. 손자병법에서는 전자를 ‘형(形)’이라 하고, 후자를 ‘세(勢)’라고 하는데, 보통은 ‘형세(形勢)’라 합쳐서 부른다. 손자병법에서는 형과 세를 이렇게 구분한다.


승리하는 군대의 전쟁은 마치 천 길 높은 계속에 모아둔 물을 일시에 터뜨리는 것과 같으니, 필승의 조건을 마련한 뒤에 싸우는 것, 이것이 바로 형(形)이다.

- 손무, 『낭송 손자병법/오자병법』, 손영달 풀어 읽음, 북드라망, 43쪽


전쟁을 잘하는 자가 기세를 만들어 내는 것은, 마치 둥근 바위를 천길 높은 산 위에서 굴리는 것과 같으니, 이것이 기세(勢)이다.

- 같은 책, 48쪽


두 개의 글에서 형과 세를 명확히 구분하기란 쉽지 않다. 리링은 두 문구의 차이를 ‘모아둔’과 ‘굴리는’에서 찾았다. 우선 첫 번째 글에서 “저자가 강조한 것은 ‘모아둔’ 상태이지 ‘터뜨린’ 상태가 아니”(리링, 『유일한 규칙』, 임태홍 옮김, 글항아리, 209쪽)라는 것이다. 즉, 기운이 잠재된 상태가 곧 ‘형’이다. 물을 모으는 일은 인위적인 노력의 결과다. 승리를 위해 준비하는 기본기와 같다. 이것은 자신에게 자신(아군)에게 달려 있는 일이다. 그러나 두 번째 글에서 언급된 ‘둥근 바위를 굴리는 일’은 산세(山勢)에 달려 있다. 산세에 따라 굴러가는 바위의 향배가 결정된다. 물론 모아둔 물의 양에 따라, 바위의 둥근 정도와 크기에 따라 쏟아지고 구르는 힘의 차이가 있다. 축적된 물이 많을수록, 바위가 둥그스름할수록 그 세는 강하게 작용한다. 그러나 중간에 넓은 웅덩이가 있으면 터뜨린 물이 흐르다가 고이게 되고, 나무가 많으면 바위가 구르다 멈추게 된다. 결국 이것은 자신(아군)에게 달린 문제가 아니라 산세(적군)에 달린 문제다.



나는 곧 나의 적이다

엄밀하게 보자면 사군자탕은 적과 싸우는 전사라기보다 정기(正氣)를 북돋는 후방의 지원이라고 하는 편이 낫다. 기허(氣虛)는 정기(正氣)가 쇠약해져 생기는 병증이므로 싸워야할 특정한 외사(外邪)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기(邪氣)는 꼭 외부에서 침입한 경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정기가 미치지 못하는 혹은 정기를 압도하는 모든 기운을 사기로 볼 수도 있다. 이렇게 사기의 의미를 확장한다면, 사군자탕은 다시 전사로 거듭나게 된다. 정기의 북돋움이 곧 사기의 제압에 해당되니 말이다. 그렇게 되면 사군자탕은 아군이 되고 내 안의 사기는 적군이 된다. 사군자탕을 복용하는 순간 그 기운은 내 것이다. 또한 내 안의 사기도 나의 존재의 일부이다. 그러니 내 안에서 아군도 적군도 있다. 다시 말해 나는 곧 나의 적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형(形)’과 ‘세(勢)’는 모두 나에게 달려 있다. 사군자탕과 일상의 보기(補氣) 과정은 준비된 ‘형’에 속한다. 도(道), 천(天), 지(地), 장(將), 법(法) 등 전쟁 이전의 장치를 통해 필승의 조건을 구비하는 것처럼, 백출, 복령, 자감초의 물밑작업에 의해 인삼의 작용을 최적화 한다. 또한 운동과 음식조절의 계책에 의해 음식이 보기의 최대 효과를 발휘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단지 절반의 승리일 뿐이다. 기허를 보충하는 일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기운의 낭비를 최소화하는 다른 ‘세’에 달려 있다. 기를 아무리 보강한다 해도 기운을 낭비하면 밑 빠진 독에 물붓기가 될 것이다. 그렇지만 기운을 쓰는 일도 나에게 달려 있다. 기존의 쓰던 습관을 조절하기란 여간 쉬운 일은 아니지만 어찌 됐건 적에게 달려 있는 ‘세’도 나의 몫이 된다.



바로 그대 자신의 몫!




존재의 기허(氣虛)와 보기(補氣)

이제 내 안의 세를 다루는 법, 즉 기운을 쓰는 얘기를 해보자. 전편에서 얘기한 대로, 기(氣)가 허(虛)했을 때 양기를 보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평소에 기운이 쉽게 빠져나가지 않게 잘 사용하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몸에서 기(氣)는 여러 모습으로 존재한다. 기초대사를 순환시키는 에너지이기도 하고, 근력을 움직이는 동력이기도 하며, 목소리를 내는 힘이기도 하고, 사유와 감정, 욕망, 직관 등의 정신활동이기도 하다. 이런 활동이 적절하게 일어나지 않으면 기운의 소모가 커진다. 이는 마치 자동차의 경제속도와 비슷하다. 차에 따라 다르지만 경제속도는 대개는 80km 전후가 된다. 이보다 빨리 달리거나 느리게 가면 연료가 더 많이 소모된다. 기운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너무 과도하게 쓰는 것도, 잘 쓰지 않는 것도 기운의 소모를 더 크게 한다.


우선 이것저것 산만하게 일을 벌이지 않는지 살펴야 한다. 산만한 욕망은 정기를 분산시켜 몸을 지치게 하고 삶을 공허하게 만든다. 욕망도 기(氣)와 다름 아니다. 별로 큰 기운이 아니라고 생각하겠지만 소소하게 새는 것이 무서운 법이다. 기운만 빠질 뿐 제대로 해내는 것도 없다. “산만한 정신은 아무것도 깊숙이 받아들이지 못하고 모든 것을 마치 억지로 집어넣는 양 도로 토해”(세네카, 『인생이 왜 짧은가』, 천병희 옮김, 숲, 24쪽)낸다. 모든 일을 다 잘 할 순 없다. 특히 능력이 출중한 사람들이 모든 일을 다 잘하려고 하면 남아나는 기운이 없다.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 좋다. 능력이 설기되어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면 자기의 능력도 가장 최적의 효능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즉, 복령의 역할을 이용하자는 것이다.(전편 참조) 그것이 기허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사람들과 더 친해질 수 있고 크게는 조직을 더 이롭게 한다. 그러나 오버해서 일하던 습관을 쉽게 고치긴 어렵다. 그럴 땐 시간을 정해 놓고 일을 하는 것을 권한다. 잘 하든 못 하든 그 시간 안에 최선을 다 해 주어진 일을 끝내야 한다. 물론 애초에 너무 빡빡한 스케줄을 잡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 시간 안에 다 하지 못할 일은 다른 사람의 몫으로 남겨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워커홀릭들은 쉬는 시간을 정해 놓고 가끔 멍 때리는 시간을 갖는 것도 괜찮다. 신경생리학적으로 멍 때리는 동안 뇌는 휴식을 통해 새로운 에너지를 얻는다고 한다. 일종의 명상효과라 볼 수 있다.


기운을 산만하게 쓰지 말고, 가끔 멍 때리는 시간을 갖는 것도 좋다.



육체적 정신적 과로로 기를 과도하게 소모시키는 것도 문제지만 몸을 너무 움직이지 않아도 기허(氣虛)를 초래한다. 동의보감에서도 “피로하고 노곤한 증상은 이유 없이 생길 때가 있는데, 꼭 일을 열심히 해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한가한 사람에게 이런 병증이 생기는 경우가 많다.”(허준, 『동의보감』, 직접 옮김, 「내경편(內景篇)」, ‘기문(氣門) : 氣逸則滯’, 구선(臞仙))고 했다. 그런 점에서 과로와 탈진 사이를 오가며 비경제적으로 기를 소비하는 생활 패턴은 만성기허를 유발하게 될 것이다. 결국 욕망을 조절하고 마음을 고요하게 하되 부산하지 않게 활동하는 것이 기허에 이르지 않게 예방하는 일이다.


기운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존재의 변화에 대한 흐름을 방해하지 않아야 한다. 기의 본성은 변화다. 기는 몸을 움직이게 하고, 음식을 소화시키며, 사람들과 대화를 이끌고, 일을 하게 한다. 이 모든 것이 변화의 과정이다. 몸을 움직이는 것은 근육과 뼈에 새로운 운동성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고, 소화는 음식물이 몸 안에서 분해되어 흡수되고 배설되는 변화를 거친다. 마찬가지로 정신활동의 변화도 일어난다. 사람들과 말을 하고 관계를 갖는 것도 상황에 따른 사유와 감정의 추동이 일어나야 가능하지 않는가. 그래서 기가 충만하면 존재의 변환이 일어난다. 몸이 변하고 정신이 변하면 존재의 변환이 일어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중학생이 된 후 초등학생일 때의 자신과 비교해보면 자기가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느낀다. 초딩 때의 그 유치찬란한 기억에 어찌 몸서리치지 않을 수 있는가. 학년이 올라가면서 그 몸서리침은 계속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 몸서리침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 때가 온다. 이제 어른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그 현상은 이제 좁디좁은 유아적 시선에서 탈피 했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더 이상 존재의 변혁이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는 또한 양기가 쇠약해졌다는 기허의 증상이면서 동시에 많은 기운을 존재를 변화시키는 자연스러운 흐름을 멈추게 하는 데 소모했다는 뜻이다. 양생의 초식은 자연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 그래야 기운의 소모를 최소화한다. 자연의 흐름이란 시간에 따른 변화를 말한다. 따라서 존재의 변환을 멈추는 일은 많은 기운을 소모시킨다. 기존의 가치와 습관, 오래된 감정과 직관을 고수하면서 그 틀 안에 존재를 구겨 넣으려는 모든 시도야말로 자기도 모르게 기운을 낭비하게 되는 가장 흔한 상황이다. 


몸의 변화들은 개별적으로 일어났다가 잊혀지는 독립사건이 아니다. 모든 것은 종합적으로 일어나며 하나의 변화는 전체의 함수관계를 바꿔 놓는다. 그래서 좀 심하게 말하면 밥을 한 끼 먹는 것도 존재를 변이시키는 사건이 된다. 어쩌면 우리는 매 순간 존재가 변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매번 다른 호흡을 하고 있으며 흡기를 통해 들어온 천기(天氣)가 우리 몸을 변하게 하고 있으니 말이다. 다만 이 변화의 기운을 순간순간 감지하기는 어렵다. 몸이 변하는 것을 감지하려면 한 절기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 약 15일이다. 이 기간은 인간이 자연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는 인식의 최소 단위다. 몸의 변환이 일어남을 감지할 수 있는 최소 단위도 15일 정도다. 그러므로 15일마다 몸의 변화를 느낄 수 없다면 기허의 일반적인 증상이 없다 하더라도 기허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존재의 기허’라고나 할까. 그러므로 기가 충만한 사람은 15일에 적어도 한 번은 사유와 감정의 변화가 나타나야 한다. 감정의 변화란 기쁨과 슬픔 등이 교대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습관적인 감정을 더 이상 반복하지 않는 것이다. 사유의 변화는 크고 작은 깨달음이다. 그것은 단순히 새로운 정보를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감정을 구성하고 있던 언어가 새로운 배치로 탈바꿈하는 인식의 전환이며, 묵은 언어로 구성된 존재의 프레임에 균열을 일으키는 존재론적 변환이다. 그것이 존재의 기허에 대한 보기(補氣)라 할 수 있으며 기운의 손실을 최소화하는 근본적인 방법이다. 


그러나 모든 전략, 즉 ‘형’과 ‘세’가 내 안에서 모두 이루어진다 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아군의 전략인 ‘형(形)’을 준비하거나 적이 개입된 ‘세’를 조정하는 일을 스스로 조종할 수는 있지만 그 어떤 것도 의지가 지속되지 않으면 소용없다. 의지의 지속은 의지를 지속시킬 수 있는 또 다른 의지의 발동이 연쇄적으로 일어나야 가능하다. 그런데 그 의지란 것은 대개는 시간이 흐르고 상황이 변해감에 따라 변이를 일으킨다. 상황이 급박해지면 더욱 강하게 일어나지만 살만해지면 대부분 기억에서 사라진다. 그래서 ‘형세’를 만들고 승리를 가져올 노력을 포기해버린다. 그러다가 또 상황이 급박해지면 다시 의지를 발동시키지만, 조급한 실천과 쉬운 포기를 반복하면서 존재는 수동적으로 구성된 기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결국 내 안에서 형과 세를 일으켰던 의지 역시 기존의 습관과 상황의 변화라는 또 다른 복병을 만나게 되어 있다. 기운을 만들고 사용하는 일(형과 세)이 나에게 달려 있으나 내 맘대로 잘 되지 않는다. 이렇듯 나를 다루는 일이란 쉼 없는 전쟁의 연속임을 각오해야 한다. 나의 의지조차 믿을 수 없는 그 전쟁터에서 승리를 하건 실패를 하건 형세에 대한 책임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그 책임감이 ‘형세’를 능동적으로 이끌 수 있는 마지막 전략일지도 모른다.


글_도담(안도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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