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택규,
어긋난 ‘버튼홀스티치’를 완성하려면?
1983년 어느 봄, 나는 시골의 작은 중학교 교실 책상에 앉아 있었다. 흰 무명천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좋아하는 녹색 실을 바늘에 꿰어 한 땀 한 땀 정성스럽게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이것저것 직접 만들어 보는 ‘가사 시간’, 왁자지껄 떠들어대던 소녀들의 감각기관은 일제히 자신이 수놓고 있는 흰 무명천으로 쏠렸다. 선생님은 책상 사이를 천천히 돌아다니면서 소녀들의 손놀림을 지켜보았다.
“선생님, 이렇게 하면 돼요?”
여기저기서 선생님을 붙잡고 바느질한 천을 들이밀었다. 소녀들은 우르르 몰려가 선생님의 손놀림을 주시했다. 나는 소녀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육중한 엉덩이 힘을 내리누르며 그대로 앉아 있었다. 흰 무명천에 녹색 실이 꼬물꼬물 형태를 만들어 가는 것을 내려다보면서, 처음 해보는 바느질 솜씨에 스스로 감탄했다.
‘어쩜, 이리도 이쁠까? 나무가 하나둘 가지를 뻗고 있네.’
녹색 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줄다리기를 벌이듯 나의 가슴도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녹색 실의 결속력이 너무도 감동적이어서 나는 순간적으로 벌떡 일어났다. 어느새 선생님은 교탁에 와 있었다. 흰 무명천을 들고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이럴 때 우리는 흔히 위풍당당하다는 표현을 쓴다.) 교탁에 이르자, 선생님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가슴을 더욱 부풀리며 선생님을 향해 미소를 날렸다. 그리고 들고 있던 흰 무명천을 자랑스럽게 들이밀었다. 칭찬받을 게 뻔했지만 윤리 시간에 배운 겸손의 미덕을 잊지 않았다. 다른 소녀들처럼 수줍게 물었다.
버튼홀스티치, 이렇게 하면 돼요?
“선생님, 이렇게 하면 돼요?”
나는 선생님의 입에서 나올 감탄사를 들을 만반의 준비태세를 갖췄다. 귀를 있는 힘껏 활짝 열어젖혔던 것이다.
“…….”
선생님께서 너무 감격하셨나? 아직 말이 없으셨다.
“…….”
어떤 칭찬을 해주실지 고르고 계신 건가? 나의 가슴은 쿵쾅거렸다.
“이게 아니잖아, 틀렸잖아. 이건 버튼홀스티치가 아니잖아. 그렇게 설명했는데도 이렇게 엉뚱하게…. 왜 하라는 대로 하지 않는 거야. 다시 한번 해 볼 테니까 똑똑히 보고 이대로 해. 제발!”
선생님의 절규가 아스라이 멀어졌다. 나는 시뻘게진 얼굴로 후들거리는 다리를 천천히 옮겨 나의 안식처로 돌아왔다. 내가 수놓은 ‘버튼홀스티치’는 어긋나 있었다. 온 정성을 다 기울여 수놓았건만 어긋남의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 버튼홀스티치. 버튼홀스티치는 주로 단춧구멍이나 가장자리의 실이 풀리는 것을 막기 위해 휘갑쳐 뜨는 바느질이다. 아직 여자가 되기에는 먼, 미숙하지만 용기백배해 있던 소녀에게 버튼홀스티치는 자신을 버튼홀스티치 해야 할 만큼 큰 단춧구멍을 남겼다.
화택규(火澤睽)는 어긋남의 괘다. 위에는 불(火), 아래는 못(澤)이 있다. 불은 불대로 위에서 놀고 못은 못대로 아래에서 논다. 이렇게 따로 놀고 있으니, 서로 만나지 못한다. 만나지 못하면 통하지 못하고, 통하지 못하면 합하지 못한다. 주역에서는 이렇게 합하지 못한 상태를 어긋났다고 한다. 그래서 ‘어긋날 규(睽)’ 자를 써서 규라고 부른다. 나에게 있어 어긋남은 버튼홀스티치라는 바느질기법으로 다가온다. 누구나 살면서 어긋날 때가 있다. 화택규는 그 어긋남을 어떻게 이끌고 있을까? 그리고 나는 어긋나버린 버튼홀스티치를 어떻게 했을까?
화택규 괘사
睽 小事 吉(규 소사 길)
규는 작은 일은 길하리라.
彖曰 睽 火動而上 澤動而下 二女 同居(단왈 규 화동이상 택동이하 이녀 동거)
단전에 이르길 규는 불이 움직여서 위로 오르고, 못이 움직여서 내려가며, 두 여자가 한곳에 같이 살고 있으니
其志 不同行(기지 부동행)
그 뜻이 같이 행하지 아니하니라.
說而麗乎明 柔 進而上行(열이리호명 유 진이상행)
기뻐해서 밝은 데에 걸리고 유(柔)가 나아가 위로 행해서
得中而應乎剛 是以小事吉(득중이응호강 시이소사길)
중을 얻어 강(剛)에 응함이라. 이로써 작은 일은 길하니라.
天地 睽而其事 同也 男女 睽而其志 通也(천지 규이기사 동야 남녀 규이기지 통야)
천지가 어긋났어도 그 일은 같으며, 남녀가 어긋났어도 그 뜻은 통하며
萬物 睽而其事 類也 睽之時用 大矣哉(만물 규이기사 유야 규지시용 대의재)
만물이 어긋났어도 그 일은 같으니 규(睽)의 때와 씀이 크도다.
象曰 上火下澤 睽 君子 以 同而異(상왈 상화하택 규 군자 이 동이이)
상전에 이르길 위에는 불 아래에는 못이 규니, 군자가 이로써 같되 다르게 하느니라.
화택규괘는 불괘가 위에 있다. 불은 움직여 위로 올라가 버린다. 또 못괘는 아래에 있다. 못은 움직여 아래로 내려가 버린다. 이렇게 서로 어긋난 상태에서 큰일을 도모하는 것은 위험을 자초한다. 이럴 때는 작은 일을 하면서 소소한 기쁨을 누리는 것이 낫다.
여기서 소사(小事)는 음(陰)을 이르는데, 군왕 자리에 있는 다섯 번째 효, 육오가 음이니 소(小)이다. 육오가 음이다 보니 대사(大事)는 길할 수 없고 소사는 길하다고 한 것이다. 또 기뻐한다는 것은 안으로 늘 기쁜 마음을 갖는 것이고, 밝은 데 걸린다는 것은 밖으로 모든 일을 대할 때 늘 밝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 작은 일을 기쁜 마음을 가지고 밝게 해나가면 만물이 어긋났어도 그 진실함에 이르게 된다. 어긋나 있다고 그냥 내버려두지 말고 그때를 잘 써야 한다는 것. ‘時用 大矣哉(시용 대의재)’라 한 것은 험한 것도 필요에 따라 잘 이용하면 좋은 것이니 그 쓰임이 큰 것을 찬탄한 것이다. 하여 군자는 규괘를 보고 어긋난 대로 그냥 보고 있지 않는다. 어긋난 것을 화합하려고 하되, 휩쓸리지 않는다.
작은 일을 하면서 소소한 기쁨을 누릴 것!
어긋나버린 버튼홀스티치는 어떻게 되었을까? 자리로 돌아온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진정시킬 수 있었다. 꼭 부여잡고 있던 흰 무명천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단단하게 결속력을 보이던 녹색 실을 한 땀 한 땀 다시 풀어냈다. 녹색 실의 가장자리는 이내 너덜너덜해졌다. 선생님의 손놀림을 떠올리며 다시 바느질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소녀들은 다시 시끌벅적해졌다. 가사 시간은 실습을 해서 그런지 여느 수업시간과 같은 50분이 주어졌는데도 불구하고, 늘 수업시간이 짧게 느껴졌다. 버튼홀스티치를 다시 수놓고 있는 나에겐 더욱 그러했다. 나는 이 어긋남을 탁월함으로 바꾸지는 못할지언정 완성이라는 최소한의 목표를 향해 아낌없이 시간을 할애했다.
화택규 효사
初九 悔 亡 喪馬 勿逐 自復(초구 회 망 상마 물축 자복)
초구는 뉘우침이 없어지니 말을 잃고 쫓지 아니해도 스스로 회복함이니
見惡人 无咎(견악인 무구)
악한 사람을 보면 허물이 없으리라.
象曰 見惡人 以辟咎也(상왈 견악인 이피구야)
상전에 이르길 악한 사람을 보는 것은 허물을 피함이라.
화택규는 양이 맨 처음에 있어 초구다. 초구는 서로 응(應)하는 구사와 만나 이 어긋난 상황을 해결해야 한다. 자리로 보면, 초구는 백성의 자리이고 구사는 대신의 자리인데 정치를 하는 대신과 정치를 돕는 백성이 서로 만나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타고 갈 말(馬)을 잃어버렸으니 당장은 만날 수가 없다. 그러나 잃어버린 말을 쫓아가 찾을 필요가 없고 쫓지 않아도 잃어버린 말이 스스로 돌아온다고 했다. 이때 말을 타고 구사를 찾아가면 된다. 그러니 초구는 후회가 없다고 하였다. 조금만 지나면 말이 스스로 돌아와 갈 때가 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악한 사람을 봐야만 한다. 여기서 악한 사람은 초구가 구사를 만나러 가는 도중에 지키고 서 있는 육삼이다. 초구가 육삼을 거쳐 가야만 허물이 없다. 점을 쳐서 이 자리가 나오면 내가 아주 싫어하는 사람을 지나치지 않고는 만나려는 사람을 만날 수 없다.
완성을 향해가는 마음은 속이 타는 법이다. 짧은 쉬는 시간을 보내고, 나의 손에는 흰 무명천이 여전히 들려 있었다. 가사 시간은 이미 과거 속으로 사라졌고, 사람의 도리를 배우는 윤리 시간이 도래했다.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고 싶었으나 차마 무명천을 놓을 수가 없었다. 나는 책상 밑에서 꼼지락거리며 버튼홀스티치를 수놓고 있었다. 초구가 악한 사람을 만나야 한다면 나는 악한 시간을 만난 것이다. 윤리선생님은 1학년 때 나의 담임이셨다. 참다못한 선생님은 소리쳤다.
“영희야, 너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수업 듣기 싫으면 밖에 나가!”
九二 遇主于巷 无咎(구이 우주우항 무구)
구이는 주인을 후미진 곳에서 만나면 허물이 없으리라.
象曰 遇主于巷 未失道也(상왈 우주우항 미실도야)
상전에 이르길 주인을 후미진 곳에서 만나는 것이 도를 잃지 않음이라.
양이 두 번째에 있어 구이다. 구이는 자신과 응하는 육오를 만나야 한다. 헌데 때는 마침 어긋나 있다. 이 어긋난 세상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구이가 남이 보는 앞에서 떳떳하게 자신과 응하는 육오를 만나면 안 된다. 그렇게 되면 더욱 어긋나고 어려워지니 남의 눈을 피해 후미진 곳에서 만나야 한다. 자리가 인군에 해당하는 육오를 후미진 곳에서 만난다는 것은 규괘에서만 해당한다. 어긋난 때는 그렇게 만나도 도를 잃는 것이 아니니 허물이 없다고 하였다.
복도로 쫓겨난 나는 정신이 퍼뜩 들었다.
‘지금 내가 왜 이러고 있는 거지?’
윤리선생님은 나의 몰입을 중단시켰다. 아무도 없는, 차가운 공기만이 감돌고 있는 복도에서 잃어버린 예의를, 깊고 구석진 마음을 알아차렸다.
六三 見輿曳 其牛 掣 其人 天且劓(육삼 견여예 기우 체 기인 천차의)
육삼은 수레를 당기고 그 소를 막으며 그 사람이 하늘하고(머리를 깎이고) 또 코를 베임을 보게 되니
无初 有終(무초 유종)
처음은 없고 마침은 있으리라.
象曰 見輿曳 位不當也 无初有終 遇剛也(상왈 견여예 위부당야 무초유종 우강야)
상전에 이르길 수레를 당기는 것은 자리가 마땅치 않음이요, 처음은 없고 마침은 있다고 하는 것은 강함을 만나기 때문이라.
음이 세 번째에 있어 육삼이다. 어긋나 있는 상황이니 육삼은 자신과 응하는 상구와 만나야 한다. 육삼을 보니 수레바퀴가 구르지 못하게 뒤에서 구이가 잡아끌고, 소가 수레를 끌고 가는데 구사 때문에 뿔이 받친다. 이것은 육삼 음(陰)이 음의 자리가 아닌 양(陽)의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어떻게든 만나려고 하니, 머리를 깎고 코를 베이는 벌을 받게 된다. 이렇게 해서 서로 만나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상구를 만날 때가 있다. 그래서 처음은 없고 마침은 있다고 하였다.
잠시 후, 선생님은 나의 교실입성을 허락하셨다. 교실로 돌아왔건만 나는 선생님을 쳐다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언제나 나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고 북돋워 주신 선생님이셨는데, 이 어긋나버린 신뢰를 복구할 수 있을까? 복도로 내쳐진 벌보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번민이 엄중했다. 어느새 버튼홀스티치는 사라지고 없었다.
어디서부터 어긋난 것일까?
九四 睽孤 遇元夫 交孚 厲 无咎(구사 규고 우원부 교부 여 무구)
구사는 규가 외로워서 원부(元夫)를 만나 미덥게 사귐이니, 위태로우나 허물은 없으리라.
象曰 交孚无咎 志行也(상왈 교부무구 지행야)
상전에 이르길 미덥게 사귀어 허물이 없는 것은 뜻이 행해지리라.
양이 네 번째에 있어 구사다. 초구와 구사가 만나서 어긋난 것을 해결해야 한다. 원부는 초구를 말한다. 초구는 양으로 중(中)을 얻지는 못했지만, 양이 양자리에 있고 강함(陽剛)을 얻어 현명한 원부다. 이 원부 초구를 구사가 만나야 한다는 것! 허나 지금은 어긋난 때라서 불신이 팽배해 있다. 이런 때일수록 믿음으로 사귀어야 한다. 믿음으로 사귀어야 서로의 불신이 없어져 해가 될 일이 없다. 비록 미덥게 사귀어도 모함을 받아 위태로울 수 있다. 그러나 미덥게 사귀기 때문에 허물이 없다. 믿음으로 잘 사귀어 허물이 없는 것은 초구를 만나 어긋남을 해결하고자 하는 뜻이 행동으로 옮겨져 잘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마침 종소리가 울리고 선생님은 교실을 나가셨다. 친구들은 내 책상으로 몰려들었다.
“한번 보자. 어떻게 바느질을 한 거야.”
풀고 다시 놓기를 반복하느라 커다랗게 구멍이 뚫린 천을 내놓았다.
“방향이 틀렸잖아. 반대방향으로 바늘을 당겨서 매듭을 만들어 봐 ”
나는 친구들이 이끄는 대로 바늘을 움직였다. 한 매듭, 두 매듭 연결되면서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의 흔적이 되살아났다. 가사 선생님의 버튼홀스티치가 똑같이 재현되었다.
六五 悔亡 厥宗 噬膚 往 何咎(육오 회망 궐종 서부 왕 하구)
육오는 뉘우침이 없어지니 그 종당이 살을 씹으면 나아감에 무슨 허물이리오.
象曰 厥宗噬膚 往有慶也(상왈 궐종서부 왕유경야)
상전에 이르길 종당이 살을 씹으며 가서 경사가 있으리라.
음이 다섯 번째에 있어 육오다. 육오는 구이와 응하는 자리다. 육오가 같은 일족에 해당하는 종당, 구이를 만나려고 해보니까 응해오는 것이 순순히 잘 응해 와서 살을 직접 씹는 것처럼 퍽퍽 먹혀들어간다는 것이다. 종당이 살을 씹는다는 것은 그렇게 서로 의사소통이 되고 서로 마음이 맞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육오가 구이를 만나러 갔기 때문에 온 나라에 경사가 있다.
버튼홀스티치가 완성되자, 나는 따뜻한 마음으로 박수를 쳤다. 친구들도 따라 박수를 치며 즐거워했다. 그제야 내가 어느 부분에서 틀렸는지, 어떻게 부주의했는지 세심하게 볼 수 있었다. 나의 실패는 지나친 열중에 기인한 것이었다.
上九 睽孤 見豕負塗 載鬼一車(상구 규고 견시부도 재귀일거)
상구는 규가 외로워서 돼지가 진흙을 짊어진 것과 귀신을 한 수레 실은 것을 보느니라.
先張之弧 後設之弧 匪寇(선장지호 후탈지호 비구)
먼저는 활을 베풀다가(당기다가) 뒤에는 활을 벗겨서, 도적이 아니라
婚媾 往遇雨 則吉(혼구 왕우우 즉길)
혼인을 하자는 것이니, 가서 비를 만나면 곧 길하리라.
象曰 遇雨之吉 群疑 亡也(상왈 우우지길 군의 망야)
상전에 이르길 비를 만나면 길하다는 것은 뭇 의심이 없어진 것이니라.
양이 맨 위에 있어 상구다. 육삼이 마침내 상구에게 오는데, 상구에게 보이는 육삼의 모습은 돼지가 진흙을 지고 귀신을 한 수레에 가득 실은 것처럼 험상궂어 보인다. 상구는 이 모습을 보면서 육삼이 자기를 해치러 오는구나 하고 공연히 의심을 품는다. 상구는 의심하여 전쟁을 일으키려 먼저 활을 베풀었다. 베푼다는 것은 쏘려고 활을 잡아당기는 것이다.
일촉즉발의 순간, 가만히 보니 육삼은 싸우러 오는 게 아니다. 상구는 다시 활을 벗겨 다시 활집에 넣고 전쟁을 하지 않는다. 육삼은 상구를 해치러 온 도적이 아니라 혼인하러 온 사람이다. 상구가 가서 육삼을 만나는 것을 비(雨)를 만난다고 했다. 주역에는 양이 음을 만나는 것을 우우(遇雨)로 표현했다. 상구가 가서 육삼 음의 비를 만나면, 만나는 즉시 길하다.
하늘과 땅, 음양화합이 잘되어야 비가 온다. 비가 내리면 땅은 축축해지고 만물이 생겨난다. 남녀음양도 합하면 역시 비가 내린다. 그래서 남녀가 합을 이루는 것을 운우지정(雲雨之情)이라고 하였다. 음양이 만나서 비를 내리면 터무니없는 모든 의심이 다 없어지고 어긋남은 해결된다.
비를 만나면 길하리라~
수업이 모두 끝나고 담임선생님도 종례하고 나가셨다. 나는 교무실을 기웃거렸다. 이번에는 배를 두둑하게 부풀린 채 교무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맨 안쪽 창가에 있는 책상 앞에서 발을 멈췄다. 고개를 숙이고 열심히 볼펜을 놀리던 뒤통수가 나를 향해 얼굴을 들었다.
“영희네. 무슨 일이야.”
너무도 부드러운 음성과 눈빛에 나는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윤리선생님한테 하고 싶은 말은 천 가지 만 가지도 더 됐지만, 눈물 콧물이 범벅되어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터져 나왔다.
“됐어. 고만 됐어.”
선생님은 나의 등을 두들겨 주셨다.
화택규는 어긋남의 괘다. 이 어긋남의 연속성에서 다른 누군가에게는 사소해 보일지 모르지만 내게는 무척 중요한 사건을 배치시켰다. 이렇게 하면서 나는 조금 다른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너무나도 사소해 보이는 것에서 배움이 일어나면 그 어떤 것에도 배울 수 있다는 사실. 그래서 화택규의 어긋남은 무궁무진한 이야기로 변주될 수 있다는 사실. 나아가 주역이라는 텍스트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스토리텔링의 화수분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 글을 쓰면서 흰 무명천에 녹색 실로 버튼홀스티치를 다시 놓아보았다. 어쩜, 그리도 예쁜지, 나무가 하나둘 가지를 뻗고 있었다.
글_이영희(감이당)
'출발! 인문의역학! ▽ > 주역서당' 카테고리의 다른 글
덜어낼 때에는 정성을 다해서 - 산택손 (4) | 2015.05.07 |
---|---|
풀어주고 자유롭게 하라! 그 속에 시간의 춤이 있다 - 뇌수해 (2) | 2015.04.23 |
어려움이 새로운 시대를 연다! - 수산건 (3) | 2015.04.09 |
각자의 자리에서 온 마음을 다하라 - 풍화가인 (2) | 2015.03.12 |
성인에게 배우는 난세를 사는 법 - 지화명이 (2) | 2015.02.26 |
밝은 불이 땅 위로 나오다 - 화지진 (0) | 2015.02.0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