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요…, 혹시… “도를 아시나요”
노자 가르침의 진수 『노자』
사마천의 『사기』 중 「노자·한비 열전」 편에 실린 노자의 생애는 간략하다. 초나라 사람이었고, 이름은 이이(李耳), 호는 담(聃)이요, 주나라의 장서를 관리하는 사관이었다는 것. 공자가 그를 ‘용과 같은 존재’로 묘사했으며, 한구관(函谷關)에서 관령(關令)의 부탁으로 도(道)와 덕(德)의 의미를 5,000자에 담은 『도덕경』을 지었다는 것 정도다. 사마천은 노자, 장자,신불해, 한비 등을 소개한 뒤 “이들의 학설은 모두 도덕에 그 근원을 두고있지만, 그 가운데 노자의 학설이 가장 깊다”고 평했다. 『노자』는 자연예찬론도, 도덕적인 잠언집도 아니다. 『노자』는 도, 즉 삶의 길에 대한 현자의 깨달음을 담은 텍스트이자, 전쟁이 난무하던 시대를 살아간 어느 지식인의, 불가능한 유토피아에 대한 상상이다.
루쉰에게 무참히 패러디 당하다
중국의 대문호 루쉰은 『새로 쓴 옛날이야기』(故事新編)에 실린 한 단편에서 노자라는 인물과 그의 사상을 무참하게 패러디한다. 여기서 노자는“시든 나무”로 표현된다. 이도 다 빠지고 가진 거라고는 ‘연한 혀’뿐인 ‘늙은 선생’ 노자가 관소(關所)에서 사람들에게 강의 한 자락을 펼친다. “도를 도라고 할 수 있으면 상도(常道)가 아니고…….”
그러나 웬걸. 강의를 듣던 수강생들이 정신없이 조는가 하면, 여기에 한술 더 떠서, 노자의 방언과 새는 발음 때문에 강의를 하나도 못 알아들었다며 투덜거리는 게 아닌가. 5,000자로 된 강의안을 써 주고 쓸쓸히 관소를 떠나는 노자. 그가 떠나자 수강생들의 본격적인 ‘뒷담화’가 시작된다.
혹자는 구역질이 났다고 하고, 혹자는 연애담이나 들으러 갔다가 곤욕만 치렀다고 하고, 또 누군가는 ‘함도 없고 하지 않음도 없다’는 사람이 사랑 같은 걸 해봤을 리가 있냐며 비아냥거린다. 1935년 중국 땅에서 노자의 사상은 이토록 무기력하게, ‘시든 나무’처럼 비틀거리며 사라져 간다. 하지만 루쉰이 노자의 사유 자체를 전면 부정했다고 보긴 어렵다. 다만 그 사유의 현실적 무능력과 오작동을 개탄했을 터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는 『노자』가 어떻게 작동할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떻게 그것을 삶 속의 빛나는 지혜로 ‘전습’ (傳習)할 수 있을까.
마스터 요다: "한번 해보겠다는 걸로는 안돼! 하거나 안하거나 둘 중 하나야. 그저 한번 해보겠다는 건 없어."
도라고 할 수 있는 도는 도가 아니다
『노자』는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즉 ‘도라고 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다’라는 구절로 시작된다. 도는 보려 해도 볼 수 없고, 들으려해도 들을 수 없으며,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다. 도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고정된 것으로 실체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노자』에서 ‘도’는 여러 이미지들로 암시될 뿐이다.
“도는 비어 있어서 아무리 써도 막히지 않고, 깊숙해서 만물의 근원인 것 같다”라든지, “혼돈 속에 생성된 것이 있어 천지보다 먼저 생겨났으니, 고요하고 텅 빈 채 홀로 우뚝 서서 변하지 않으며, 두루 행하지만 위태롭지 않으므로 천하의 어미가 될 수 있다” 같은 구절에서처럼, 도는 만물이 생성되는 일종의 모태(母胎)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의 절대적 기원이나 창조주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도는 “골짜기의 냇물이 바다로 흘러가는 것과 같이” 쉼 없이 운행(運行)하며, 그 과정에서 매번 무언가가 생겨나고 길러지고 스러진다. 도는 ‘어미’요, ‘근원’이지만 자신이 낳은 것에 집착하지 않는 어미요, 매번 새롭게 솟아나는 근원[泉]이다. 이 ‘도’에 최대한 합치되게 살라는 것, 즉 집착하지 말고, 멈추지 말고, 걷고 또 걸으라는 것. 그것이 노자의 가르침이다.
우리가 ‘도’라는 단어 앞에서 멈칫하는 건, 그것을 초월적 진리나 절대적인 법칙과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자』의 도는 가장 평범하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 “단순성과 친근성으로 인하여 숨겨져 있는 것들”(비트겐슈타인)이다. 감이 있으면 옴이 있고,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으며, 꽃 피는 시절이 있으면 꽃이 지는 시절도 있다. 여름은 지나간 봄을 아쉬워하지 않으며, 다가올 겨울을 꿈꾸지도 않는다. 그저 자신이 내딛는 지금의 ‘한 걸음’에 온 무게를 실을 뿐이다. 그러나 이 모든 운행은 지극히 ‘자연스러워서’ 누구도 그걸 의식하지 못한다.
부처, 예수, 공자 같은 성인들의 삶을 보라. 그들이 ‘도’를 펼치는 것은 ‘길’[道] 위에서다. 아니, 그들이 걷는 ‘길’이 바로 그들의 ‘도’다. 나무를 베고, 물을 긷고, 책을 읽고, 사람을 만나는 일상들. 이 일상이 펼쳐지는 길, 그게 바로 도다. 무수한 만남과 장애물, 희로애락이 펼쳐지는 일상을 방기하고서는 단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어려운 일은 쉬운 데서 도모하고, 큰 일은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하나니, 세상의 어려운 일은 반드시 쉬운 데서 일어나고, 천하의 큰 일은 반드시 작은 곳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끝내 큰 것을 꾀하지 않으므로 큰 것을 이룰 수 있다.(63장)
‘도’는 도달해야 할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길’[道] 위에서 펼치는 것인지도...
작위성과 잉여성 배제, ‘소국과민’ 꿈꿔
‘무위’는 『노자』의 핵심 개념 중 하나다. 무위란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 아니라 ‘작위(作爲)하지 않음’, 즉 무언가를 억지로 꾸며서 하지 않음이다. 달리 말하면, 이는 ‘잉여를 남기지 않음’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자연은 특별히 무언가를 하려고 함이 없지만 하지 않는 것이 없다. 모든 것을 하지만 잉여를 남기지 않는다. 반면 인간은 종종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것을 욕망한다.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말과 행위들, 이것이 잉여다. 정치인들의 경우에야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들은 ‘국민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무수한 말을 쏟아내지만, 사실 ‘누구를 대신한다’거나 ‘누구를 위한다’는 말만큼 오만하고 작위적인 것도 없다.
노자가 말했다시피, ‘나라를 잘 다스려 보겠다’는 의도가 오히려 백성을 속이고, 그들을 전쟁터로 내모는 법. 문제는, ‘악의’가 아니라 지나친 ‘선의’가, 주먹구구식의 앎이 아니라 합리적 지식이 더욱 폭력적인 결과를 낳는다는 데 있다. 노자는 이러한 작위성과 잉여성이 철저히 배제된 ‘무위의 정치’를 꿈꾼다. 하지만 그가 꿈꾼 유토피아는 대단히 비관적이다.
나라는 작고 백성은 적으며, 편리한 기계가 있어도 사용하지 않고, 백성들은 죽음을 중히 여겨 멀리 옮겨 다니지 않는다. 배와 수레가 있지만 탈 일이 없고, 무기가 있지만 쓸 일이 없다.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 새끼를 엮어 쓰게 하고 먹던 음식을 달게 여기고 입던 옷을 좋게 여기며, 살던 곳을 편안히 여기고 각자의 풍속을 즐거워하게 하니, 이웃 나라가 서로 바라보이고 닭 울고 개 짖는 소리가 들려도 백성들은 늙어죽 을 때까지 왕래하지 않는다.(80장)
이 유토피아 아닌 유토피아를 흔히 ‘소국과민’(小國寡民)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이건 불가능한 공동체다. 노자가 그걸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자는 소망했을 것이다. 개체의 삶을 온전히 지켜갈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어지고 지워지는 무수한 길[道]들이 펼쳐진 세계를. 노자는 세상의 ‘산’이 아니라 ‘계곡’이 될 것을, 가득 채우기보다는 비울 것을, 단단하고 강한 것보다는 부드럽고 연약한 것을, ‘대의’(大義)보다는 일상의 성실함을, 유용한 지식보다는 무용한 배움을 강조한다.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이보다 더 유용하고 혁명적인 지혜가 있을까. 세상을 구원하는 것은 진리도, 영웅도, 대의도 아니다. 말 없는 가르침을 행하는 것, 자신의 한걸음에 존재의 무게를 싣는 것, 그리하여 매 순간 자신이 걷는 길과 합치되는 것. 그것이 삶의 도요, 그것이 삶의 길이다.
글. 채운(고전비평공간 규문)
※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는 『고전 톡톡』과 『인물 톡톡』으로도 만나실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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