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바다를 동경했던 담대한 소년, 최남선의 글과 삶

‘문명’에 굽힌 지조, 지식인의 숙명인가
신문화운동의 기수, 최남선



1906년 3월, 17세의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은 일본 와세다대 고등사범부 지리역사과에 입학하기 위해 바다를 건넜다. 초행길은 아니었다. 이태 전인 1904년에도 일본을 다녀간 적이 있었다. 그는 대한제국 황실유학생단의 최연소 유학생이자 반장이었다. 당시 열다섯이었던 소년의 눈에 비친 일본은 이전까지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 듣던 과거의 일본이 아니었다. 그곳은 눈부신 신세계였다. 그 신세계의 거리에서 소년은 서점 유리창 너머로 매달 쏟아지는 수십 종의 잡지들에 매혹당했다. 소년에게 그것은 문명의 상징이었다.


소년 최남선에게 비친 새로운 빛!



두 차례에 걸친, 그리고 남들보다 비교적 일찍 시도된 그의 유학 생활은 모두 짧게 끝이 났다. 도쿄부립 제1중학에서의 첫번째 유학은 조선유학생들의 무질서와 준비 부족 때문에 석 달 만에 중단되었다. 하지만 두번째 유학은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갑작스레 파국을 맞았다. 문제의 발단은 와세다대 법정학부 학생들의 모의국회였다. 망해 버린 조선왕이 일본을 방문한다면 어느 정도의 의전을 갖추어야 하는가를 주제로 했던 것. 이 사건은 당시 일본에 유학 중인 조선유학생들에게 심한 굴욕감을 안겨 주었다. 최남선은 조선유학생 대표로 문제를 일으킨 일본 학생들의 총퇴학을 주도하는 등 강경 대응했지만, 결국 학교를 자퇴해 버렸다(1907).



대륙 중심의 패러다임 바꾼 『소년』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학업은 중단될 수밖에 없었지만 문명에 대한 열망은 그후로도 오랫동안 최남선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소년은 스스로를 ‘신보잡지광’(新報雜誌狂)이라 자처했다. 얼마 후, 소년은 신세계로부터 최신 인쇄기를 구입하고 인쇄를 위한 전문 식자공까지 대동하여 그렇게 바다와 함께 귀국했다. 신문명의 메카임을 자부하는 인쇄소 겸 출판사 신문관(新文館)은 이렇게 탄생되었다. 1908년 11월 1일, 바다 건너편의 것이었던 문명은 지금 이곳에서 최초의 근대적 잡지 『소년』(少年)이 되었다.

『소년』은 최남선 1인 잡지였다. 일본을 경유한 새로운 지식들은 편집자 최남선을 거치면서 또 한번 선별되고 분류되어 마침내 전파되었다. 이 시기 최남선은 그 자체로 근대 지식의 매체(미디어)였다. 최남선은 일본 유학 시절 구입한 많은 신간 서적들과 당대 잡지들에 등장하는 담론들을 번역했을 뿐 아니라, 필요하다면 그만큼의 글을 썼다. 문명은 그렇듯 지식을 통해 식민지 조선으로 유입되었다.

창간호에 실린 「해(海)에게서 소년에게」는 도래하는 문명의 힘과 미래에 대한 최남선의 태도와 각오가 잘 드러나 있다. ‘텰썩 텰썩 텩 쏴’ 하는 파도와 함께 밀려오는 바다의 위력 앞에서는 ‘큰 산이나 거대한 바윗돌’ 같은 무엇도, ‘아무리 권세를 가진 누구’도 힘없이 쓸려 버리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돌이킬 수도, 저항할 수도 없는 시대의 조류이기에 끝내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중요한 건 그 어마무지한 새 기운이 대륙이 아닌 바다로부터 온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유사 이래 수천 년간 대륙만을 바라보고 있던 반도 조선의 정수리를 내리치는 근본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이었다.



만주건국대학 교수직 수락


지조냐 학자냐의 양자 중 그 일을 골라잡아야 하게 된 때에 대중은 나에게 지조를 붙잡으라고 하거늘 나는 그 뜻을 휘뿌리고 학업을 붙잡으면서 다른 것을 버렸다. 대중의 나에 대한 분노가 여기서 시작하여 나오는 것을 내가 잘 알며 그것이 또한 나를 사랑함에서 나온 것임도 내가 잘 안다.


─최남선, 「자열서」自列書


신문관 창립 이후 3·1운동까지 10여 년간, 최남선은 자타가 공인하는 신문화운동의 기수였다. 하지만 「기미독립선언서」의 작성자로 3년여의 수감 생활을 마친 후 그는 지조와 학자의 길 사이에서 학업을 선택한다.


지조 대신 선택한 학문이란 무엇이었을까. 최남선은 『조선역사통속강화』(1922)를 시작으로 『불함문화론』(1925), 「단군론」(1926), 『살만교차기』(1927) 등 굵직한 역사 연구 저술들을 잇달아 발표했다. 이들은 모두 ‘단군에 기원한 조선 역사’라는 그의 민족주의 역사학을 구성하는 중요한 뼈대였다. 동시에 그는 『풍악기유』(금강산, 1924), 『심춘순례』(지리산, 1925), 『백두산근참기』(1927), 『금강예찬』(1928) 등 조선의 산천을 둘러보고 이에 대한 기행문을 남겼다. 그에게 있어 기행문은 여행의 기록이라기보다는 종교적 순례기였다. 민족은 그에게 이념이었고, 그는 이념에 입각한 자신의 이러한 작업을 조선학(朝鮮學)이라고 불렀다.


최남선, 그가 바라던 문명은 제국주의의 다른 이름이었다. 결국 그가 선택한 길은 새로운 지반을 탐사하는 학자의 길이었다.



그렇다면 대체 그가 버린 지조란 무엇이었을까. 대중들이 열망했던, 그리고 그 자신이 지켜오던 지조란 바다를 통해 흡수하려던 문명이었다. 하지만 그 문명은 일본제국주의의 다른 이름이기도 했다. 그는 더 이상 바다를 맞이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다시 눈을 돌려 대륙을 바라볼 수도 없었다. 지조를 바칠 만한 어떤 것도 없는 현실. 그렇기에 최남선은 지조 있는 학자가 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지조 그 자체를 “휘뿌리고” 학자의 길을 택한다. 그가 가고자 했던 학자의 길은 바다도 대륙도 아닌 새로운 지반에 대한 탐사였다. 모든 지조가 사라진 자리, 그 자리에 세울 새로운 시공간. 학자란 새로운 시공간의 발굴자들이었다. 최남선은 지조가 불가능한 현재를 버리고 과거 속으로 침잠한다. 문명화되어야 할 미래의 민족을 등지고, 대륙 바라기 조선의 시간을 넘어 순정한 시간, 그 태초의 시간인 단군으로 그는 깊숙하게 달려 들어갔다.

어느 순간 최남선은 그 태초의 시공간 속에 갇혀 옴짝달싹할 수 없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순정한 지반이란 건 현실 위에서는 세워질 수 없었다. 문명이란 바다를 통해 조선을 덮치던 제국주의의 시대. 그 바다 앞에 쓰러져 간 ‘큰 산이나 거대한 바윗돌’처럼, 그의 세계는 무력했다. 바다를 동경했던 ‘담 크고 순정한 소년’. 그 담대함으로 바다를 버리고 순정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소년. 하지만 그 소년이 도착한 곳은 결국 바다의 친구였다. 1939년 4월, 최남선은 만주 건국대학의 교수 자리를 받아들인다.



노년엔 민족주의와 결별


최남선은 그가 도착했던 태초의 시간에서 한발 더 나아가고자 했다. 그는 샤먼(살만교) 및 민족주의와 결별한다. 그리고 1955년 최남선은 가톨릭에 귀의했다. 어쩌면 최남선에게 그곳은 샤먼과 민족 등이 없는 시공간, 아니 모든 시공간이 탈각된 지각 불가능한 무엇은 아니었을까.


오른쪽이 최남선, 왼쪽이 정재용. 1954년 탑골 공원


최남선은 말한다. “민족이란 본질적으로 필요한 것도 아니며, 당연히 있어도 안 될 것이요, 다만 ‘대립’의 의식으로만 성립된 것”이다. 민족 개념은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며 인류의 평등한 평화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니다. 지금 필요한 건, 진실한 마음에 입각하여 이전의 가치를 완전히 쓸어버리는 민족혁명이다. 갈등과 대립을 일으키는 모든 지조를 쓸어버릴 것! 그에게 가톨릭은 “평화가 아닌 칼을 통해 불의를 없애고 정의를 세우는 교문(敎門)”이었다.

최남선은 식민지 시기를 포함한 일생 동안 단 한순간도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던 예외적 인물 중 하나였다. 좋은 의미에서 그는 현실에 충실했고 직분에 성실했던 지식인이었다. 지식인이란 무엇인가. 지식인은 미래를 창조하는 예언자가 아니다. 지식인이 종종 현실을 뛰어넘는 가치를 창출하는 것은 그들이 예언자여서가 아니라 거꾸로 그들이야말로 가장 민감하게 현실을 포착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또한 이 때문에 지식인은 현실에 가장 쉽게 포획되는 사람들에 대한 이름이기도 하다. 뚫고 나가거나 포획되거나!



글. 문성환(남산강학원)



※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는 『고전 톡톡』과 『인물 톡톡』으로도 만나실 수 있습니다. ^^

인물 톡톡 - 10점
채운.수경 엮음/북드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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