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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람살라 유학기

[다람살라 유학기] 다람살라에서 티벳어 배우기

by 북드라망 2025. 7. 15.

다람살라에서 티벳어 배우기

이 윤 하(남산강학원)

 

 

3월 중순, 긴 겨울방학이 끝나고 티벳 도서관(정식 명칭은 Library of Tibetan Works and Archives)에서의 수업이 다시 시작되었다. 나와 소담언니는 다람살라에서의 티벳어 공부를 이곳에서 처음 시작했다. 우리처럼 많은 외국인들이 티벳어나 티벳불교를 배우기 위해 이곳에 온다. 도서관은 티벳 망명정부 내에서도 교육적으로 중요한 거점이다. 외국인 학생들에게 영어를 기반으로 수업을 제공하는 것뿐 아니라, 글쓰기와 번역, 강의와 출판, 연구 등의 학술 활동(현대과학 교육을 포함하여)을 활발하게 하기 때문이다. ‘도서관’으로서 책과 경전을 보관하고, 스캔과 아카이빙 작업도 한다. 이곳의 관장님은 당연하게도 게셰 스님이시다(티벳 망명정부에는 의회에도 스님이 계신다. 국회의원이신 것이다. 처음엔 우리 도서관 관장님뿐 아니라 고위공직에 스님이 계신 것이 생경했는데, 지금은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그분들의 지혜를 사회가 쓰지 못한다면 오히려 아까울 것이다. 그 지혜가 세속에 충분히 응용 가능하고, 세속이 그 영성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종교적 지혜의 깊이와 티벳 사회의 성숙함을 가늠해볼 수 있다).

 

티벳 도서관 본관의 건물 입구. 개들이 이곳에서 낮잠을 자곤 하는데, 아침이면 출근하는 수위분께 쫓겨났다가 곧 다시 돌아와서 잔다. 해가 쨍쨍한 봄여름 낮시간에는 수위분도 봐주시는 것 같다

 

비오는 날 도서관 법당 지붕 아래로 비를 피해 웅크린 개들


요새는 집에서부터 도서관까지 주말을 제외하고 매일 등교하는 일상을 보내고 있다. 집에서부터 급경사의 오르막을 15분가량 오르면 도서관이 나온다. 날이 쌀쌀한 날에는 몸을 예열하고 수업에 들어갈 수 있고, 더운 날에는 땀을 식히며 시원하게(?) 수업에 들어갈 수 있다. 작년과 올해 주로 공부하는 것은 티벳어다. 주된 시간을 언어 공부에 쏟으며 지내기는 인생에서 처음이다. 스페인에서 줌으로 나의 영어 선생님이 되어주었던 해완언니는,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이 스스로의 새로운 인격을 만나는 일이기도 하다고 말해주었었다. 아직은 구멍 난 티벳어를 구사하고, 알아들은 단어 몇 개로 문장을 상상하는 수준에 있기에 나의 새로운 인격은 어린이에 머물러있다(이 친구가 어서 어서 성장했으면 좋겠다).

말이 서툴다는 것의 재밌는 점은 구업을 짓기 어렵다는 것이다. 거짓말, 거친 말, 쓸데없는 말, 이간질 하는 말이라는 4가지의 구업에 ‘꽃, 밥, 시계’ 등의 단어로는 도달하기 꽤나 어렵다. 나를 어린이의 인격에 가두는 티벳어는 내가 모르는 새에 구업을 짓는 것조차 못하게 해준다. 반대로 말을 정말 잘했으면 좋겠다 싶은 순간들도 있다. 상대의 슬픔을 위로하고 싶을 때, ‘고마워’ 말고 더 많은 말로 감사의 마음을 전달하고 싶을 때, 대놓고 말고 언뜻 걱정이나 배려를 비치고 싶을 때 등등이다. 이렇게 미묘하고 섬세해야 할 때 나의 말은 아직 너무 입자가 굵다.

말이라는 게 사람들 사이에서 왜 생겨났는지 여러 가지 설이 있겠지만, 심지어 뭐 우리 호모 사피엔스의 조상들이 거짓말과 뒷담화를 통해 비상해졌다는 말도 있지만, 나는 티벳어를 배우면서 말이라는 게 어떨 때 필요한지 종종 느낀다. 한강 작가의 말처럼 언어는 우리의 마음을 이어주는 일을 하는 것이다. 티벳어로 위로를 하려면, 한 번쯤은 티벳어로 위로를 받아봐야 한다. 나이가 들어서 다른 누군가에게 ‘조심히 가세요’라는 말을 들었던 순간이 기억난다. 헤어지는 순간에 상대가 갈 길을 걱정하는 말을 할 수 있음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조심히’와 ‘가세요’라는 단어는 알지만, 그것을 조합한 말 속에서 내가 쓴 적 없는 마음을 배웠다. 말은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해지고, 사람이 사람에게 쓰는 마음에 의지해있다. 그래서 다른 언어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며, 새로운 인격이 자란다.

 

작년의 티벳어 교실 풍경

 

 

교실 안을 엿보고 있는 원숭이


티벳어를 배우면서 하게 되는 특별한 경험들이 있다. 모국어가 아닌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다른 문화의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길을 걷는 것 같다. 언어를 배우기로 한 순간, 그들을 3인칭이 아니라 2인칭으로 보게 된다. 물론 그 거리를 마치 1인칭처럼 좁히는 것은 아주 소수에게만 허락되지만, 그 길을 계속해서 걸으며 0으로 수렴하고자 하는 것이다. 얼마 전에 한 티벳 행사에서 마주친 친구가 어딜 가든 너희가 있다는 이야기를 웃으면서 했는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는 정말 모든 행사에 끼어보려고 하곤 한다. 이 언어를 배우고 있는 사람으로서 의무 같은 것을 느끼는 것 같기도 하다. 이런 저런 상황을 잘 알지 못하면서 말을 ‘사용’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는 조심스러운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이런 건 영어를 배우면서는 하지 못한 경험인데, 이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의 특수한 상황 때문이기도 할 것 같다.

또 한편으로, 이 언어를 배운다는 것만으로도 환영받는 경험도 많이 하게 된다. 다람살라에서 티벳어를 배우는 외국인이 한 둘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내가 티벳어를 할 줄 안다는 걸 알면 무척 기뻐하는 티벳 분들을 만나곤 한다. 한 마디라도 더 알려주려고 하는 분도 있고, 갑자기 내 수준을 한참 윗도는 티벳어로 긴 이야기를 시작하시는 분도 있다. 티벳에서 인도로, 인도에서 호주로 망명하신 뒤, 다시 인도로 순례를 오신 나이 지긋한 티벳스님을 나란다 대학 터에서 만난 적이 있다. 내가 티벳어를 한다는 것을 아시자 마자 기쁘게 웃으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스님은 영어가 어렵다고 하셨다. 스님과 함께 온 순례단도 모두 영어권 친구들이었다. 평생의 수행과 생활이 기대어 있는 언어를 놓고, 반강제적으로 외국어를 써야하는 그 생활은 어떤 것일까. 오랜만에 온 인도에서 한 외국인이 티벳어를 알아들으니 적잖이 기쁘셨던 것 같다(황급히 어떤 때보다 눈치 안테나를 길게 뽑아 비언어를 통해 언어를 알아들어냈다).

 

3 10 민중봉기의 날을 기리는 행사에 참여한 티벳 사람들


티벳어는 ‘티벳’이라는 지역을 넘어서는 언어이다. 티벳을 통해 전해진 인도 불교를 믿는 주변국 사람들은 티벳어에서 파생된 방언을 쓴다. 적어도 티벳 글자를 통해 경전을 읽는다. 지금은 그 지역들이 ‘중국’, ‘인도’, ‘몽골’, ‘부탄’이라는 국경 안에 갇혔지만, 그들은 여전히 티벳의 문화(그 문화는 불교와 분리될 수 없다)속에 있고, 달라이 라마 존자님을 가장 위대한 스승으로 섬긴다. 그러나 티벳 본토에서는 중국에 의해 티벳 문화와 언어가 비상식적이고 비인도적으로 억압받고 있다. 스스로의 문화와 언어를 지키기 위해 사람들은 고향 땅에서 ‘탈출’해 나와 전세계(주로 미국과 유럽, 호주, 인도)로 흩어졌다. 그들은 각지의 공동체 속에서 티벳의 문화를 이어가려고 노력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삶에 적응한다. 그들에게는 티벳어뿐 아니라 영어와 힌디어(그리고 프랑스어 등)도 생존을 위한 ‘모어’다. 아이를 영어 중심의 학교에 보내야 할지, 티벳어에 집중하는 학교에 보내야할지는 어려운 선택이다. 그런 와중에 티벳의 문화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세계의 사람들이 티벳어와 접속하고 있다. 그들의 언어에 담긴 마음이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없는 특별한 것이면서, 또 (모든 인간을 이어주는)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티벳어가 가지고 있는 이런 지형은 티벳어를 배우고 가르치는 곳·관계를 독특하게 만들어준다. 매일의 수업, 매년의 수업이 겉으로는 사이클처럼 굴러가지만 누구도 ‘일’을 하고 있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언어를 가르치는 것이 단지 언어를 가르치는 일이 아니라 사회와 정치의 층위에, 동시에 영적인 층위에 놓여있음을 선득 알게 되는 순간에 그렇다. 하나의 사건을 보는 여러 층위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반복되는 일상의 잔잔한 표면 뒤에는 풍랑 같은 마음이 있고, 그 뒤에는 내생과 전생, 나와 너를 잇는 아득한 우주가 있다. 아주 조용한, 여느 때와 같은 교실에서 그런 순간이 번뜩 나타났다가 잔잔한 표면 아래로 사라지곤 한다. 학생이 질문한 단어 하나에 또 다른 하나, 둘, 서넛이 이어져 책을 벗어나 한참을 돌아가곤 하는 수업 시간, 티벳 사회로부터 받은 것을 티벳어를 가르치는 것으로 사회에 돌려준다고 하는 선생님의 말, 어렸을 때 본토에서 배운 티벳어가 불교를 배우는 외국인들에 의해 타지에서 생계가 되는 구조. 또, 당신이 공부를 열심히 해서 당신의 나라로 돌아가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거라고 선생님이 굳게 믿어주는 순간, 당신이 쌓는 공덕이 곧 스승의 공덕이 됨을 서로 알아차리는 순간. 당장의 내 눈앞만 보고 사는 나에게 티벳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연결감(곧 영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의 깊이는 내가 여기에서 배우고 싶은 것 중에 하나이다.

도서관에 대해 쓸 이야기는 한 바가지이지만, 쓰다 보니 결이 안 맞아서 그만 둔다. 대신 얼마 전 감이당에서 하는 티벳어 동아리에서 한 선생님이 하신 질문이 다시 떠올랐다. 티벳어를 배우는 것으로 수행이 되느냐는 질문이셨다. 글을 마무리하다보니, 언어를 배우는 것이 내 안의 새로운 인격을 만드는 혹은 만나는 것이라면, 티벳어를 배우는 것도 수행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티벳어를 배우는 것은 불법에 진심을 다하는 (현재의 그리고 과거의)사람들, 시공간과 넓고 깊은 연결감을 가진 사람들과 마음이 이어지는 일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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