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다람살라 유학기

[다람살라 유학기] 초보 불법러의 불법 여행기

by 북드라망 2025. 5. 27.
새 연재를 시작합니다! 남산강학원과 사이재의 청년 두명(윤하, 소담)은 인도 다람살라로 유학을 가 있지요. 다른 익숙한 곳도 아니고, 다람살라로의 유학이라니?! 그들은 무엇을 보고 어떤것을 배우러 그 먼 곳으로 떠난 것일까요? 앞으로의 연재에서 그들의 이야기가 차근차근 펼쳐집니다. 기대해주세요!

 

 

초보 불법러의 불법 여행기

 

이 윤 하(남산강학원)


일주일 다섯 번, 매일 얼굴을 보고 인사하며 정들었던 도서관 친구들과 종강파티를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누고(내년에 봐! 혹은, **에 가면 연락할게! 혹은, 다음 생에 봐! (우리는 깨닫지 못하고 윤회할 게 분명한 가보다)), 집으로 돌아와 종강파티 포틀럭으로 삼각김밥을 싸느라 난리가 된 주방을 치우고, 남인도로 갈 준비를 했다. 냉장고에 있는 것은 위장으로 비우고, 청소도 하고, 노트북을 집에 놓고 가기 위해 회계와 영상 작업도 마쳤다. 남인도에서 입을 여름옷과 북인도에서 입을 겨울옷을 한 가방에 넣어 짐을 싸고, 다음날 저녁, 델리로 가는 슬리핑 버스에 올라탔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멀미가 날 정도로 꺾으며 내려와(뒤에 앉으신 스님은 검은 봉지에 구토를 두 번이나 하셨다. 그리고 나서도 잠깐 속도를 늦춘 버스의 앞문으로 가 밖으로 봉지를 슬쩍 던지고 자리로 돌아오시는 얼굴이 너무 밝으셔서 처음엔 옆 스님이 토하신 것을 대신 버려주신 줄 착각했을 정도였다) 도로다운 도로를 한참 달린 뒤, 추위를 느끼며 담요를 여미고 불편한 허리를 비틀다가 어느새 꾸벅꾸벅 졸다가 동이 트기 직전, 소리치는 인도 아저씨의 목소리에 졸린 눈으로 길 한복판에 갑자기 내리면, 델리다. 인도의 거의 모든 곳으로 뻗어갈 수 있는 기차와 비행기를 탈 수 있는 곳. 그만큼 북적이는 인구밀도와 탁한 공기, 끊이지 않는 소음과 음식냄새를 자랑하는 곳!

함께 간 스님과 짜이를 한 잔 마시고, 공원산책도 하고, 심지어 걸으며 지니TV 회의도 하고, 미미한 접촉사고도 당한(?) 뒤, 몇 시간만에 델리를 떠날 수 있었다. 이제 여행 시작이다. 이 짧은 글에 한 달 남짓한 여행 중 어느 장면을 담아야 하는지 고민이었다. 다녀온 지역만 해도 겔룩파 스님들의 공부+수행 성지인 남인도 데풍 사원, 부처님이 깨달으신 보드가야, 첫 설법을 하신 사르나트, 가르침을 펼치셨던 마가다국의 영취산, 인도 대승불교의 영광을 간직한 나란다 대학의 터, 디쿵 카규를 비롯한 여러 티벳 종파의 교육기관이 있는 데라둔, 이렇게나 많다(네 자랑입니다!). 그리고 길 위에서 정말 많은 분들께 받은 마음과 도움들, 말씀들, 이야기들, 떠오르고 스러졌던 생각들, 돌아보면 요약하거나 빼도 좋을 것이 하나 없다. 글재주가 있다면 여행기라도 썼으면 좋았겠다 싶다.

델리의 좌판에서 짜이를 기다리는 중


그렇지만 길면서도 지루하지 않게 쓸 재주가 없기 때문에, 두 장면만 골라볼까 한다. 첫째는 남인도 데풍 사원이다. 그곳은 겔룩파의 아주 많은 스님들이(계신 스님의 수는 잘 모르겠는데, 왜냐하면 티벳어 소통의 오류로 알아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는 적어도 오백 분, 많게는 천 분 이상의 스님이 거주하실 수 있는 공간이었다.) 졸업까지 무려 약 20년간을 공부하시는 사원이다. 사원 안에는 어린 스님들이 다니시는 학교와, 부처님을 모시는 큰 법당, 과학관, 스님들이 지내시는 거주 공간, 병원, 스님들이 직접 운영하시는 카페와 가게, 식당이 있었고, 사원 주변으로는 망명 티벳분들이 지내시는 거주구역이 있었다.

그곳에 있으면 마치 게임을 하다가 ‘스님 맵’에 들어온 것 같이 느껴졌다. 카페에 가도, 길을 걸어도, 어디로 고개를 돌려도 붉은 옷을 입은, 크고 작은 스님들이 계셨다. 붉은 색이 아닌 옷을 입은 사람은 일주일간 열리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해 그곳에 갔던 나와 소담언니를 포함한 우리 팀 사람들뿐이었다(거의). 나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불교라는 것을 하나의 거대한 세계관으로 느꼈다. 다시 말해서 내가 ‘불교한다’면,(이라고 불교를 동사화시켜본다면) 앱을 하나 깔게 되는 게 아니라 시스템 운영체계(윈도우와 맥 같은)가 바뀌는 일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지난 겨울 그 운영체계를 가진 무수한 사람들 속에 들어가게 된 것이었다.

 

스님이 가득한 데풍 로셀링 카페


다람살라에 처음 도착했을 때, 나는 이전까지 불상 앞에서 절해본 적도 없었을 뿐 아니라, 등산할 때 지나친 절 말고는 가본 절도 없었다. 다람살라의 메인 템플에 가면 국적뿐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이방인이라는 느낌에 어색했다. 나는 불자가 되고 싶은 건가, 아니면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 건가? 하는 요상한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이제는 그 고민이 두 가지 보리심 혹은 두 가지 번뇌에 관한 내용임을 이해할 수 있다). 데풍 사원에서 나는 불교가 아주 논리적으로 세운 운영체계이기 때문에, 공부를 진지하게 할수록 불자가 될 수밖에 없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사실 모든 공부가 이런 식이고, 이런 식이어야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불교가 유독 이렇게 느껴지는 것은 그것이 ‘종교’라고도 불리는 이유와 같을 것이다. 죽음과 삶을 따로 말하지 않으며, 표면적 삶 너머에 있는 것들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우리 팀은 사원에서 매일 오전부터 저녁까지 ‘계-정-혜’로 구성된 세 가지 공부를 했다. ‘혜’ 수업이 끝나면 사원에서 공부를 마치신, 혹은 곧 마치실 스님들이 오셔서, 질문에 답을 해주시는 그룹 대화가 진행되었다. 티벳어는 물론이고 프로그램의 통역어인 영어 역시 서툰 바람에 많은 내용을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종일 앉아 다르마를 듣는 것은 왜인지 정말로 기쁜 일이었고, 그런 기회를 얼떨결에 얻게 된 연유가 참으로 오묘하다고 생각했다. 전생에 절에 사는 개라도 되었던 걸까? 그것을 전해주시는 스님들은 우리에게 법을 잘 전해주고, 밥을 잘 먹이는 것 말고는 바라는 게 없으셨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외국인들을 초대하여 이렇게 많은 시간과 힘을 쏟아 법을 베풀어주시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나는 이곳에서 티벳스님들을 뵐 때마다 주고 베푸는 것 말고 이 생에 할 것이 더 없는, 충만함을 가진 마음을 느낀다. 그런 마음이 되는 것이 수행의 결과이자 수행이라면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수업 마지막 날(깜짝 게스트 존자님)



두 번째 장소는 보드가야다. 그곳은 성지이자 관광지이고, 과거의 유적이자 현재의 수행터이며, 보시하는 사람과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함께 걷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성지란 과거의 영광이 늘 새롭게 성스러워지는 곳이며, 순례란 앞선 사람의 마음을 지금 이곳에 다시 나타내는 일임을 알았다. 성스러움은 깨끗함이 아니라 개부터 사기꾼, 수행자와 관광객, 가난과 욕심과 자비심, 모든 것을 들이는 모양으로 표현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분별없음이야말로 성스러움이다, 나는 그곳에서 가짜로 스님 옷을 입고 구걸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작은 지폐를 한 장씩 나누어주시는 티벳 아주머니를 보았다). 보드가야는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으신 곳이고, 그것을 기념해 후대에 세운 탑이 그곳의 상징이다. 탑 옆에는 부처님이 그 밑에서 깨달으셨다는 보리수도 있는데, 들은 바로는 부처님이 앉으셨던 보리수의 아들 격이라고 한다. 전세계에서 온 스님들과 불자들이 이 아래에서 명상과 기도를 한다. 이렇게 후대의 사람들이 그 성지의 성스러움을 이어간다.

대탑은 매일 새벽 다섯 시에 열리고, 밤 아홉시에 닫힌다. 탑을 둘러싼 세 개의 길은 탑돌이를 하는 사람들로 무척 붐빈다. 세 개의 길 사이에는 오체투지를 하시는 나무판과 매일 와서 수행하시는 분들의 텐트가 세워져 있고, 길 바깥 잔디밭에는 함께 자리를 잡고 ‘쌍’ 연기를 피우며 예불을 올리는 스님들이 계신다. 가장 탑과 가까운 안쪽 길에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하고, 처음 방문이라 실수한다면 인도 경찰이 신발을 벗으라고 소리를 쳐준다.

 

 

부처님이 앉아계셨던 나무의 아들 격(?)인 보리수나무

 

 

목갈라나 존자가 수행했다는 동굴. 추운 날씨였는데도 동굴 안은 따듯했다


이곳은 나에게 첫 ‘순례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전까지 나에게는 순례를 할 곳도, 성지라고 할 곳도 없었다. 그래서 어떤 공간과 그런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신기한 일인지 생각하게 된다. 그가 살아있는 사람도 아닌데, 밟기 조심스러워 절로 신발을 벗게 되고, 들어갈 때는 조심스럽고 조용해지며, 경건한 마음이 되어 머리를 숙이고 앞서 그 길을 가셨던 분에 대해 감사함과 찬탄을 일으키게 되니까 말이다.

사람들은 대탑 주변에는 꽃과 물, 음료수 등으로 공양을 올리고, 대탑 안으로는 불상 앞에 바칠 과일이며 꽃, 불상에 두를 빛나는 천을 가지고 들어간다. 그래서 대탑의 풍경은 계속 달라진다. 매일 다른 색색의 꽃, 다른 페트병이 새로운 곳에 올려져 있고, 오늘과 내일 다른 언어의 기도와 음악이 들려오기 때문이다. 대탑 안의 불단은 새로운 사람들이 바구니를 들고 올 때마다 새로 치워지고, 부처님(불상)은 정말 자주 옷을 갈아입으신다. 보드가야의 부처님이 전세계의 부처님들 중 가장 패셔니스타가 아닐까 싶다. 불단에 올려 졌던 과일이나, 부처님이 입고 계셨던 옷은 성스러운 것이 되어 그것을 처음 바쳤던 사람이 아니라 그 뒤에 온 사람에게 간다. 이렇게 자연스러운 재분배라니. 물건과 음식은 처음보다 더 좋은 것이 되어 흘러간다. 보시하는 자도, 보시 받는 자도, 보시된 것도 없다는 말이 딱이다.

 

날란다 대학터. 두 개의 구멍은 무려 샨티데바와 다르마키르티의 방 문이다. 둘은 옆 방을 쓰는 사이였다!

 

사람들은 왜 순례를 떠날까. 구도와 구법도 마찬가지이고, 나 역시 어쩌다 이전에는 한 번도 오리라고 생각한 적 없는 인도까지 와있는 것일까. 사르나트에 있는 유일한 한국 절에서 비구 스님을 한 분 뵈었다. 그분께 정말 좋은 말씀들을 많이 들었다(뿐만 아니라 직접 찻잎으로 내리신 녹차로 시작하여, 직접 담그신 약 5종의 김치와 된장국으로 점심밥을 얻어먹고, 내려주신 커피까지 얻어마셨다). 그중 한 말씀이 ‘밖에 나온다고 더 좋은 건 없다’는 것이었다. 내가 불교를 공부하고 싶어 하는 것에는 기뻐하셨으나 그것이 티벳 불교라는 것에 약간 눈살을 찌푸리시며 하신 말씀이셨다. 외국 것이라 더 좋아보일 수 있으나 그렇지 않다고 하신 것이다. 몇 년 전 감이당에 한 번 오셨던 청전스님께서도 내게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 ‘거기 가도 똑같아, 다 사람 사는 곳이야.’ 그렇다면 더 좋은 것을 찾고, 더 좋은 곳을 찾아서 멀리 가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무언가 찾으려고, 만나려고 떠난다. 앞으로 찾거나 만날 것은 내가 있던 곳에서 얻을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아닐 것이다. 보리수 아래에서 하는 명상과 집에서 하는 명상이 다르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면 무언가를 찾으려고 하고, 만나려고 하는 그 마음이 중요한 것이다. 찾으려고 할 때만 찾아지니까. 나는 무엇을 찾아서 왔을까? 찾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래서 나는 무언가를 만나면 알아차릴 것이다. 순례자들이 순례지에 도착하면 자기 마음이 저절로 조복되는 것을 느끼듯이.

 

 

사르나트의 한국절에서 뵌 불탑의 부처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