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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람살라 유학기

[다람살라 유학기] 왕초보 가이드의 다람살라 여행기

by 북드라망 2025. 6. 24.

왕초보 가이드의 다람살라 여행기

박 소 담(사이재)

 

다람살라 유학 생활도 슬슬 익숙해질 때쯤인 반년 차, 어머니가 다람살라에 오셨다. 한국을 떠날 때 누가 제일 먼저 다람살라에 찾아올까 궁금했는데, 많은 연구실 샘들을 제치고 어머니가 첫 방문을 하신 것이다. (물론 그사이에 보라언니가 먼저 찾아오긴 했지만 사전 답사 때부터 함께했던 보라언니는 벌써 다람살라가 세 번째인 베테랑이다^^) 그것도 혼자 짧게 왔다 가는 게 아니라 이모와 사촌 동생을 데리고 장장 한 달가량의 인도 여행을 계획하셨다. 물론 가이드는 준-현지인인 나다. 아무리 여행을 좋아하는 어머니시더라도 인도를 초행자들끼리 오기는 쉽지 않았을 터. 어찌어찌 인도에 살고 있는 나와의 연으로 이모와 사촌 동생도 같이 와 준다고 하니, 제대로 보시하겠다는 마음으로 가이드에 임했다. 그렇게 유학 반년 차에 나는 새삼스럽게 가족들과 다람살라 여행을 하게 되었다. 소담살라(?) 여행사의 짧은 오픈이었다.
 

공항에서의 깜짝(들킴) 환영식. 티벳 문화에서는 환영의 의미로 흰색 카닥을 목에 둘러주는 관습이 있다


어머니 일행은 다람살라에서 일주일 남짓을 머무셨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그 시간 동안 쭐라캉(존자님이 계신 사원), 맥그로드 간지, 도서관, 박물관, 멘찌캉, 노블링카 궁전 등 가볼 수 있는 유명한 곳들은 모두 방문했다. 이제는 좀 더 친숙해진 그곳들을 다시금 다니며 어머니 일행의 감상을 듣는 것도 재밌는 일이었다. 도착한 첫날 방문한 쭐라캉은 마침 존자님이 남인도에 가 계셔서인지 사람도 없이 좀 휑한 모습이었다. 이모와 어머니는 몇 번이나 여기가 정말 존자님이 평소 계시는 곳이 맞느냐고 물었는데, 건물이 생각한 것보다 너무 소박했기 때문이었다. 깨끗하게 관리되고는 있지만 근처의 다른 큰 사원과 비교해 보더라도 결코 더 화려하진 않은 곳이었다. 중간중간 필요에 의해 증축한 흔적은 있지만, 전체적으로 깔끔한 느낌을 주는 사원은 처음 존자님께서 그곳에 정착하셨을 때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기도 했다.

어머니께서는 그래도 세계적인 영적 지도자가 있는 곳이 아니냐며 건물이 그에 걸맞지 않은 것 같아 안타까워하셨는데, 한편으로 나는 여기에서 과연 더 무엇이 필요할까 싶기도 했다. 아마 이곳에 지내면서 티벳 사람들이 이곳을 얼마나 잘 활용하고 있는지를 봐 왔기 때문일 것이다. 쭐라캉은 건물을 꾸미지 않아도 충분히 사람들의 마음이 모이는 곳이다. 존자님이 사원 밖으로 나오시는 법회나 장수기도 때가 되면 이곳은 사람들로 빼곡히 찬다. 개중에는 일생에 단 한 번 존자님을 뵙기 위해 오시는 분들도 있다. 정성스럽게 직접 만든 옷을 입고, 화려하게 단장을 하고, 존자님의 일거수일투족에 주의를 기울이며 때로는 구석에서 눈물을 흘리기도 하셨다.

그들은 과연 무엇을 경배하고 있는 것일까? 다람살라에 처음 도착하고 나면 이곳에 살고 있는 티벳 사람들의 일상적인 종교 활동에 눈이 가지 않을 수 없다. 걷기가 불편하신 노인 분들도 매일 아침저녁으로 꼬라(탑돌이)를 돌고, 염주를 들고 만트라를 외며, 존자님을 포함한 여러 스님들을 극진히 모신다. 혹자는 그것이 환생이니 뭐니 하는 신비스러운 환상에 아직 민중들이 눈을 뜨지 못했기 때문으로도 본다. 이런 숭배는 과연 뭘 모르고 있기 때문에만 나올 수 있는 태도일까? 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것이 공경심을 가질 대상을 잃어버린 자가 떠올릴 수 있는 최선의 그림이라는 생각도 든다.

처음 존자님을 법회에서 뵈었을 때, 어디에서 들었던 이야기처럼 눈물이 터져 나온다거나 전율이 인다거나 하진 않았다. (조금은 기대했었는데!) 그보다는 평소 뻥 뚫려 있던 쭐라캉이 화려한 공양물 탑과 사람들로 가득 차, 마치 콘서트장을 방불케 하는 분위기에 적응하기 바빴다. 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한 곳에 모으는 힘이 존자님께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이들의 마음이 모여 존자님을 위대한 분으로 만드시는 건지 헷갈리는 와중에 운 좋게 카메라를 통해서가 아닌 맨눈으로 천천히 걸어 나가시는 존자님을 뵐 수 있었다. 그때 느낀 왠지 모를 감동은 이제껏 연구실에서 티벳 불교를 배우면서 들어왔던 얘기와도 무관하지 않았다. 이 지구 어딘가에 국가에 갇히지 않고, 민족에 갇히지 않고 진심으로 모든 존재들을 위해 평화를 말하고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에 감동을 받았던 것이다.

티벳 경전의 첫머리에는 부처님이나 보살과 같은 스승들에게 기도하고 예경 드리는 부분이 꼭 포함되어 있다. 처음에는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너무 오버해서 의례를 갖추는 것 같아 이상했는데, 돌이켜보면 그 공경심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닐까. 설령 내가 지금 당장 스승의 경지에 오르지 못하더라도, 의지하고 나아갈 그런 경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한 마음이 드는 것이다. 그렇게 공경심은 무엇보다 자신에게 더 큰 힘이 되어 돌아온다.
 

티벳 도서관에서 열강 중인 초짜 가이드


여담이지만 어머니 일행은 다람살라에서 추위 때문에 꽤나 고생을 했다. 방에 히터가 있는데도 방 전체가 따끈해질 정도로 기능이 좋진 않아 얼른 따뜻한 남인도로 가길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참고로 다람살라 현지에 있는 사람들은 전기 히터를 잘 사용하지 않는 대신 천연 히터를 매우 애용한다. 바로 ‘햇빛’이라고 하는…) 그러나 막상 인도 여행을 끝날 때가 되니 가족들은 다 같이 “그래도 다람살라가 제일 좋았어”라며 뒤늦은 칭찬 일색이었는데, 이유는 다름 아닌 음식 때문이었다. 우리가 즐겨 먹는 잎채소들─배추, 상추, 시금치 등이 다람살라에서는 흔했지만 남인도에서는 거의 취급하지 않아 안 그래도 입맛이 까다로운 이모와 사촌 동생은 남인도에서 위장이 더 고생스러웠다. 역시 타지 생활을 하는 데 있어 제일 중요한 건 위장의 박테리아님(?)이 만족하시느냐다. 새삼 티벳과 비슷한 식문화를 가진 한국에서 태어난 것이 다행스럽다.

어머니 일행이 지내셨던 숙소는 취사가 가능한 곳이라 이모와 어머니는 근처에서 장을 보고 밥을 숙소에서 곧잘 해 드셨다. 그런데 두 K-주부들의 음식 퀄리티가 청년들은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는데, 세상에 여행하는 도중에 김치를 직접 담가 먹는 사람은 처음 봤다. 살림을 한다는 건 이역만리 타지에 와서도 한식 레스토랑을 차릴 정도의 능력을 갖춘다는 것이구나, 라며 감탄했다. 그것도 한창 관광을 하고 와서 피곤한 와중에도 딸내미들을 잘 먹이겠다는 마음에서였으니, 정말이지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은 위대해! 그래서 결국 가이드 일한 것보다도 더 큰 김치통 보시를 받아버렸다는 이야기. 그런 그들의 마음 덕분에 오늘도 다람살라 생활은 더욱 할 만한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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