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에게 빌려온 자기
현자는 또, 운명을 두려워할 이유도 가지고 있지 않아. 왜냐하면 현자는 자기의 노예나 재산이나 지위뿐만 아니라, 자기의 몸이나 눈과 손, 무릇 인간에게 생활을 애착하도록 만드는 모든 것, 아니, 자기 자신까지도 모두가 허락을 받아 잠시 맡겨진 것으로 헤아리고 있기 때문이며, 자기는 자신에게 빌려서 가져온 것이고, 돌려 달라는 요구가 있으면, 한숨짓거나 슬퍼하지 않고 돌려주는, 그런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이야. 그러므로 또, 현자는 자기를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 왜냐하면 자기는 자기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 모든 것을 부지런하게, 또 용의주도하게 하겠지 - 마치 신을 우러러보며 신을 믿는 자가, 신탁 받은 재산을 지킬 때에 하는 것처럼. (「마음의 평정에 대하여」, 262p)
또 그들이 가끔 죽고 싶어 할 때도 있지만, 그것으로써 그들이 오랜 삶을 보내고 있다고 인정할 증거는 되지 않는다. 그들은 무지한 까닭에 불안한 마음을 일으킴과 동시에, 그들이 두려워하고 있는 것 자체로 뛰어들려고 하는 마음이 생겨 괴로워한다.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들은 때때로 죽고 싶어 하는 것이다. (「삶의 짧음에 대하여」, 299p)
파울 클레, <별들과 함께>
'자기'라는 말을 한다는 자체가 우리 스스로 ‘자기가 아닌 자기’를 부지불식간 염두에 두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원리상 ‘자기가 아닌 자’만이 ‘자기’를 대상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니까. ‘나’는 밥을 먹는다, ‘나’는 책을 본다라는 행동뿐 아니라, ‘나’는 상상한다, ‘나’는 이해한다는 생각까지, 그것들을 수행하는(=경험하는) 그 '나'를 '나'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또 다른 그 '나'란 누구인가? 과연 우리가 스스로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을 때, 그 '자기 자신'은 누구여야 하는가?
'자기는 자기의 것이 아니'라는 세네카의 눈으로 본다면, ‘자기’에는 행동하고 느끼고 생각하는 ‘자기(경험하는 자기)’와 그것과 다른 ‘자기’, 즉 앞의 ‘자기’를 빌려준 또 다른 ‘자기(경험하는 자기와는 다른 자기)’로 분할된다. 두 개의 자기가 공존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묘하게도 생각하고 행동하는 ‘자기’와 그와 다른 ‘자기’가 각기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들의 ‘자기’들은 구분 불가능하게 뒤섞여있다. 아마 우리는 그런 구분 불가능하게 출몰하는 순간을 한 덩어리로 몰아세워 ‘주체’라 부르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세네카는 이것들 간에 식별을 요청하면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자기’(경험하는 자기)는 단지 또 다른 ‘자신’으로부터 빌려온 것일 뿐이라고 선언한다. 나는 빌려온 존재이다.
그런데 ‘자기 이외의 것’은 생각하고 행동하는 자기가 아니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순간, 그것은 불가피하게 ‘타자(=자기가 아닌 자)’여야만 한다는 묘한 전회에 이른다. 되돌아갈 자기 자신 = 돌봐야 할 자기 자신 = 타자. 결국 타자가 ‘자기’를 빌려 주었다. 나에게 나를 빌려준 자는 타자들이다. 오직 이런 의미에서만 자기는 자기의 것이 아닐 수 있다. 어쩌면 그 ‘타자’는 자연 혹은 신이기도 할 것이다. 아니면 그 ‘타자’는 공동체의 조상 혹은 이웃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기타 등등 어느 경우에도 나는 나의 것이 아니다. 더 나아가, 이 입장에서 본다면, 죽음이란 타자가 빌려준 것을 거두어 가는 사태일 뿐이다. 따라서 죽음은 타자에게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타자에게 되돌려줄 자신을 부지런히 가꾸고, 용의주도하게 다루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앙리 마티스, <폴리네시아의 바다>
결국 삶이란, 타자에게 빌린 ‘나’를 잘 간직하고 가꾸는 것이다. 삶은 빌린 ‘나’를 가꾸어 되돌려주는 과정이다. 바로 여기서, “나는 없다”라는 주체 없음과 “나를 가꾼다”는 주체 생성이 통일되는 장면을 바라본다. 나는 없다. 그러나 나는 나를 잘 돌려주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가꾼다. 어쩌면 불교의 연기론적 사유는 스토아 철학의 핵심 깊은 곳에서 자기자신과 똑같은 형상을 만나고 있을지 모르겠다.
_약선생(감이당 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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