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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약선생의 철학관

공부는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가? -니체에게 묻다

by 북드라망 2013. 5. 15.

비극의 공부, 몰락의 공부



세상에 공부라 불리는 것은 얼마든지 있다. 아이들이 아침저녁으로 씨름할 뿐 아니라, 엄마들도 그 와중에 골머리만 썩어가는 수능‘공부’. 밥벌이 때문에 밤늦도록 도서관을 떠나지 못하는 서른 실업청년의 애처로운 취직‘공부’. 갓 입사한 청년이 어깨 너머로 힘들게 배우는 업무‘공부’. 물론 이런 것도 있다. 어른들이 들려주는 좌절과 성공이야기에서 전해지는 저 장엄한 인생‘공부’. 사실 이렇게 공부라 불리는 것을 펼쳐 놓으면, 세상에 공부 아닌 게 무엇이 있을까? 하다못해, 인터넷 서핑을 하며 세상살이 요모조모를 알게 되면, 바로 그것도 공부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인터넷 세상‘공부’.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온통 공부의 연속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우주정복'에 숨은 의미가 너무 소박해진 느낌은 기분 탓일까;;



하지만 그렇게 ‘모든 것이 공부!’라고 쉽게 말하고 말면, 공부의 ‘핵심’이 어느 순간 신기루처럼 날아가 버리고 마는 느낌이다. 뭐랄까, 모든 것을 굳이 ‘공부’라고 칭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느낌인 것이다. 그냥 수능‘연습’, 취직‘준비’, 업무‘훈련’이라 말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 같고, 심지어 인생‘공부’조차, 그저 인생 경험담을 귀담아 듣는 정도로 말해도 그리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 같다. 그만큼 공부는 써도 그만, 안 써도 그만인 그런 투명하기 그지없는, 그래서 전혀 무게가 나가지 않는 말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것도 공부, 저것도 공부라고 불리면서, 어쩌면 공부 그 자체는 슬그머니 사라져버리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공부, 공부하고 시끄럽게 떠들어대자, 공부가 자기 몸을 꽁꽁 숨기고, 뭣도 모르고 희희낙락 시간 낭비하는 우리들을 냉소하는 꼴이라니. 그래서 공부의 복수는 아주 비극적이다. 그리고 그런 비극을 주인공들이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더욱 더 비극적이다. 날마다 공부, 공부하면서, 거꾸로 공부와 먼 것을 공부하게 된다는 점에서 우선 비극이고, 아울러 그런 비극을 죽을 때까지 알지 못하고(사실 알고 싶어 하지도 않을 것 같다), 죽어갈 것이라는 점에서 이중으로 비극적이다.
 
그런데 이런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라면, 공부조차도 니체가 말했던 그런 의미에서의 ‘비극’으로 봐야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다시 말하면, 공부의 비극을 ‘비극적으로’ 넘어서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우리가 공부를 통해서 어떤 세계에 들어가는 것은 비극의 관객으로 극 속에 몰입해 들어가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가상의 공부 : 공부는 환영이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보면, 미다스 왕이 디오니소스의 동반자이자 현자인 실레노스에게 이렇게 물어보는 장면이 나온다. “인간에게 가장 좋고 훌륭한 것은 무엇인가?” 실레노스는 지혜가 많은 요정이어서, 그를 붙잡기만 하면 그가 가진 지혜를 빼낼 수 있다고 전해져 왔었다. 실레노스가 대답한다. “가장 좋은 것은 그대에게 불가능하다. 그것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며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무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대에게 차선의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일찍 죽는 것이다.”
 
실레노스의 말대로라면, 우리는 태어나는 것만으로도 고통이다. ‘좋음’의 입장에서 본다면, 존재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존재와 더불어 ‘좋은 것’을 잃어버린 꼴이다. 그리스인들은 그만큼 존재의 공포와 끔찍함을 알고 있었고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니체의 말대로 그리스인들은 어쨌든 살아갈 수 있기 위해서라도, 올림포스라는 찬란한 꿈의 산물을 내세워야만 했다. 이 꿈의 산물이 바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아폴론적인 것’이다.
 
살다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혹시 가상의 세계가 아닐까하는 의심을 품을 때가 있다. 혹시 이 세계가 꿈이 아닐까? 이 꿈같은 장면 속에서 우리는 슬퍼하기도 하고 괴로워하기도 하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오히려 현실을 꿈같다고 여길 수 있기 때문에, 현실에서 솟아나는 공포나 슬픔 같은 것들을 견뎌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현실을 가상이라고 여기게 되는 바로 그 순간, 그것이 슬픔과 고통을 견뎌내는 힘이 되는 것이다. 내 삶과 그 삶이 돌아가는 터전이 누군가의 꿈일 수도 있다는 생각, 바로 그것 자체가 현실을 뚫고 나아가는 어떤 의지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현실은 가상이다. 또 그 꿈속에서 우리는 다시 꿈을 꾸는데, 이를테면 그 꿈은 니체의 말대로 꿈의 꿈, 가상의 가상이다.


… 진정으로 존재하는 근원적 일자는 영원히 고뇌하며 모순에 가득 찬 존재이면서 자신의 지속적인 구원을 위해서 매혹적인 환상이나 즐거운 가상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가상에 사로잡혀 있고 그것으로 성립되는 바, 이러한 가상을 우리는 진정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서, 즉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과율 속에서 끊임없이 생성하는 것으로서, 달리 말해 경험적인 실재로서 느끼지 않을 수 없다. … 우리 자신의 경험적 존재를 세계 일반의 경험적 존재와 마찬가지로 근원적 일자가 매 순간 만들어 내는 표상으로 파악하게 된다면, 이제 우리는 꿈을 가상의 가상으로서, 가상에 대한 근원적 욕망을 보다 고차원적으로 충족시키는 것으로서 간주해야만 한다.


-프리드리히 니체, 『비극의 탄생』,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07, 81p


이 세상에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은 고뇌에 차고 모순에 가득 찬 존재이다. 그런데 그 존재는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서 고뇌와 모순 속에서만 있어서는 안 된다. 존재는 자신의 고뇌와 모순을 넘어서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환상과 가상을 만들어내고야 만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바로 그 고뇌와 모순으로부터 도출된 근원적 일자의 환상(=1차 가상)이다. 그런데 그 속에 살고 있는 우리(=꿈 속의 우리)도 마찬가지로 삶의 공포를 느끼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또다른 꿈을 꾸기 시작한다. 비극 속에서라야만 꿈이 생성된다. 따라서 이 꿈은 근원적 일자에서 보면 ‘가상의 가상’이다. 세계와 우리의 경험적 존재는 근원적 일자의 1차 표상이고, 다시 그 표상 속의 우리가 꾸는 꿈은 표상의 표상, 즉 2차 표상이 된다. 근원적 일자로서의 고통이 ‘현실’이라는 가상을 만들어내고, 다시 그 가상이 꿈을 만들어낸다.


"모든 형식들은 우리의 작품이다—우리는 지금 사물들을 인식해야하는 그런 방식으로 우리 자신에 대해 표출한다." —니체, 『유고 1881년 봄~1882년 여름』, 책세상, 649p



니체는 이 가상의 가상을 아폴론적인 ‘예술’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이것을 ‘공부’로 치환해서 보아도 크게 무리가 없다. 특히나 예술이라는 형태보다 공부를 통해 자신의 수양을 수행해왔던 동아시아 사고방식에서는 오히려 공부라는 프레임을 통해 이해하는 것이 더욱 쉽다. 이런 의미에서 존재의 고통이 만들어낸 아폴론적인 환영 작품이 바로 ‘공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통, 공포 같은 것들 때문에, 그리고 그것들을 통해서만 개인은 '자신을 구원하는 환상'(같은 책, 83p)을 산출한다. 이른바 공부라는 ‘구원의 꿈’을 꾸는 것이다. 공부는 일종의 환영이다.



몰락의 공부 : 공부는 명랑이다


그러나 점점 공부의 세계로 들어가면서, 어쩔 수 없이 예외를 허용해야 하는 경우가 생기기 시작한다. 다시 말하면 지금까지의 인식 형식—인식은 기본적으로 분별하는 통념적인 틀이다—에 대해 신뢰가 깨지기 시작하면서, 갑작스럽고, 엄청나게 큰 ‘전율’이 발생한다. 니체의 표현에 따르면 비극에서의 그것은 '디오니소스적인 흥분'이다. 이 디오니소스적인 흥분은 앞서서 말했던 아폴론적인 가상과 뒤섞이고, 대립하면서 새롭고 보다 힘 있는 탄생물들을 낳도록 자극한다(같은 책, 50p). 디오니소스는 파괴하고, 뒤집어엎고, 새로 만든다.
 
니체가 말하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란 아폴론적인 밝음이나 절도에 대비되는 것이다. 그것은 어둠, 심연, 혼돈, 도취, 황홀경 같은 것을 말한다. 아폴론적인 개별화의 원리, 즉 개체성이 유지되도록 하는 원리에 대비해서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모든 것을 근원적으로 하나라는 것이 강조되는 것으로, 이제 서로 구분되지 않고, 나눠지지도 않는다. 그래서 아폴론적 개체주의 입장에서 보자면 또 다른 공포이다. 니체에 따르면 사티로스 합창단의 노래를 통해서 그런 파괴의 디오니소스는 지상으로 올라온다. 그런데 이 순간이야말로 비극의 본질이다. 사실 이 환희의 순간을 위해서 연극의 가상(=아폴론적 가상)이 진행되었던 것이다. 가상은 이 디오니소스적인 흥분을 위해서 일어난 일종의 착각일 뿐이다.
 

비극은 … 비극적 신화를 통하여 비극적 주인공이라는 인물의 형태로 개별적인 생존에 대한 탐욕스런 충동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며, 경고하는 손으로 다른 삶과 보다 높은 기쁨을 상기시킨다. 투쟁하는 주인공은 자신의 승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몰락에 의해서 이러한 기쁨을 예감하고 준비한다. … [신화가 우선이고 음악이 부차적이라는-인용자] 고귀한 착각의 도움으로 비극은 이제 팔다리를 놀려서 주신찬가에 맞추어 춤을 추게 되고, 아무런 두려움 없이 광란도취의 자유로운 느낌에 자신을 내맡길 수 있게 된다. 비극이 만일 이러한 착각의 도움을 빌리지 않는다면, 음악 그 자체만으로는 감히 이 광란도취의 자유로운 느낌에 젖을 수 없을 것이다. 신화는 우리를 음악으로부터 보호해 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음악에 최고의 자유를 준다. (같은 책, 254~255p)


비극을 통해서 주인공이 겪은 극한의 고통을 우리도 느낀다. 그런 고통의 순간은 지금과는 다른 삶과 보다 높은 기쁨을 상기시키도록 만드는데, 어떤 의미에서 몰락이 기쁨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몰락의 기쁨을 느끼기 위해서 공부한다. 고통으로부터 공부를 시작하고, 끝으로 공부를 통해 몰락한다. 아주 기묘한 경지에 다다르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몰락하기 위해서 공부한다. 이 몰락은 개체성이 사라지는 몰락, 나를 잊어버리는 몰락이다. 이 몰락은 오히려 우리들에게 기쁨과 환희를 일으킨다. 왜냐하면 이 몰락을 통과하는 순간, 개체로서 지니는 모든 짐으로부터 해방되기 때문이다. 몰락은 해방을 준다. 명랑성은 이런 의미에서의 가벼움이다. 명랑성은 결코 고통과 몰락 없이는 오지 않는다.  


"삶이 내게 가장 어려운 것을 요구했을 때 삶은 내게 가장 가벼워졌다." -니체, 『이 사람을 보라』, 책세상, 373p


 
그래서 비극의 공부, 몰락의 공부는 기꺼이 실패를 향해 나아가는 공부이다. 죽기밖에 더하겠냐는 생각으로 위험한 외나무로 즐겁게 올라간다. 마치 이것은 작곡자가 오선지에 다양하게 써내려가는 음표들과 같다. 그것들은 수많은 음들을 만들어내면서 사라진다. 수없이 떠오르는 착상들을 아무 사심 없이 오선지에 펼쳐놓는 것처럼, 삶의 오선지에 자신을 펼쳐 놓는다. 공부는 몰락을 향해 오선지 위에 자신을 내던지는 일인 것이다. 매번 고통을 돌파하며, 환영을 구성하고, 그 환영 속에서 자신의 몰락을 경험하는 것. 그래서 비극적으로 공부를 한다는 것은 삶을 매 순간의 고통 위에서 미적 현상으로 꽃피게 하는 명랑성이다. 그것은 몰락을 피하지 않는 명랑성이다. 아니 오히려 몰락을 향하는 명랑성이다. 공부의 기쁨은 그렇게 몰락과 함께 찾아온다.


 
_약선생(감이당 대중지성)


비극의 탄생 - 10점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박찬국 옮김/아카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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