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야 끝난 거다!
䷪ 澤天夬(택천쾌)
夬, 揚于王庭, 孚號有厲, 告自邑, 不利卽戎, 利有攸往. 쾌, 양우왕정, 부호유려, 고자읍, 불리즉융, 이유유왕
쾌괘는 왕의 조정에서 드날리는 것이니, 진실한 믿음을 가지고 호령하여 위험이 있음을 알게 한다. 자기 자신에서부터 고하되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이롭지 않으며, 나아갈 바를 두는 것이 이롭다.
初九, 壯于前趾, 往不勝, 爲咎. 초구, 장우전지, 왕불승, 위구
초구, 발이 앞으로 나아감에 강건한 것이니, 나아가서 이기지 못하면 허물이 되리라.
九二, 惕號, 莫夜有戎, 勿恤. 구이, 척호, 모야유융, 물휼
구이, 두려워하며 호령하는 것이니, 늦은 밤에 적군이 있더라도 걱정할 것이 없다.
九三, 壯于頄, 有凶, 獨行遇雨, 君子夬夬, 若濡有慍, 无咎. 구삼, 장우규, 유흉, 독행우우, 군자쾌쾌, 약유유온, 무구
구삼, 광대뼈가 건장하여 흉함이 있다. 홀로 가서 상육과 사귀어 비를 만나니 군자는 과감하게 결단한다. 비에 젖은 듯해서 노여워하면 허물이 없으리라.
九四, 臀无膚, 其行次且, 牽羊悔亡, 聞言不信. 구사, 둔무부, 기행차저, 견양회방, 문언불신
구사, 엉덩이에 살이 없으면서 나아가기를 머뭇거린다. 양을 이끌고 나아가면 후회가 없겠지만, 말을 들어도 믿지 않는다.
九五, 莧陸夬夬, 中行无咎. 구오, 현륙쾌쾌, 중행무구
구오, 쇠비름나물을 과감하게 끊어 내면, 중도를 행함에 허물이 없다.
上六, 无號, 終有凶. 상육, 무호, 종유흉
상육, 울부짖어도 소용없으니 끝내 흉함이 있다.
살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결심들을 할까. 내일부터는 일찍 일어나야지, 오늘부터는 다이어트를 해야지, 올해는 제대로 영어공부를 해봐야지, 일주일에 세 번은 꼭 운동을 해야지 등등. 스스로 생각이라는 것을 하면서부터 우리는 수많은 결심들 속에 살아간다. 그리고 그 결심들만큼 수많은 실패들을 경험한다. 그럴 때면 묘한 죄책감 같은 게 올라오곤 한다. 자존감도 떨어진다.
나에게도 수많은 작심삼일의 날들이 있었다. 그런데 돌아보면 그때마다 내가 한 것이라곤 의지박약을 탓하는 게 전부였다. 습관을 바꾸기 위해서는 어떻게 마음의 길을 내야하는지 구체적으로 들여다본 적이 없었던 거다. 그저 막연하게 생각할 뿐이었다. 다음엔 더 굳게 마음을 먹으리라, 아자! 그렇게 매번 하나마나한 또 다른 결심으로 반성은 끝이 났다. 씁쓸한 뒷맛과 함께.
그래서였을까. 공부를 하면서 그 개운치 않은 뒷맛을 없앨 방법들에 눈이 가곤 했다. 철학, 과학, 심리학 등 다양한 분야가 그와 관련된 문제를 다루고 있었다. 왜 아니겠는가. 무언가를 결심한다는 것, 그건 새로운 일상을 꾸리고 싶다는 욕망이다. 기존의 습관을 끊어내고 삶의 새로운 장으로 나아가기. 우리는 그런 결단을 통해 삶의 변곡점을 만들어내게 된다.
『주역』 또한 삶의 이 중요한 시공간을 펼쳐 보인다. ‘택천쾌(澤天夬)’ 괘가 그것이다. 쾌괘(夬卦)의 형상은 특이하다. 맨 아래 초효부터 오효까지가 모두 양효다. 음효는 그 끝에 겨우 하나가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아래서부터 양효가 자라나더니 종국에는 음효 하나만 남겨 놓은 형국인 것이다. “다섯 양효가 아래에서부터 성장하여 극한에 이르려 하고 하나의 음효는 그 위에서 소멸하여 없어지려고 하니, 여러 양효가 위로 나아가 하나의 음효를 과감하게 제거하는 것이 바로 쾌괘다.”(정이천, 《주역》, 심의용 역, 글항아리, 857쪽) 그렇기에 택천쾌 괘는 과감한 척결, 결단을 의미한다.
보통 주역에서 양효는 군자를, 음효는 소인을 상징한다. 이런 면에서 쾌괘는 군자가 자신의 세력을 키워 소인을 척결하는 때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군자와 소인이 이미 결정되어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안에는 군자와 소인이 모두 있다. 그러니까 군자의 마음을 쓰면 군자가 되는 것이요, 소인의 마음을 쓰면 소인이 되는 것이다. 해서 쾌괘는 자신 안에 군자의 마음을 세워나가는 과정이자, 그 속에 남아 있는 소인의 마음 한 자락을 없애는 길을 보여준다. 요컨대 택천쾌의 시공간은 이런 소인의 마음을 끊어내는 지혜를 담고 있다. 삶의 새로운 장, 그것은 과거의 습을 과감하게[決] 끊어낼[斷] 때 열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택천쾌가 말하는 결단의 순간으로 들어가 보자. 쾌괘에서 처음 만나게 되는 결단의 태도는 “양우왕정 揚于王庭, 왕의 조정에서 드날리다”이다. 왕의 조정이란 공적인 장소를 뜻한다. 그러니까 결단은 모든 이들에게 공개된 공적인 장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혼자서 한 결심은 쉽게 무너지는 법이다. 그래서 흔히들 이야기하곤 한다. 고치고 싶은 습이 있다면 주변에 널리 알리라고.
어떤 습을 바꾸려 할 때 우리가 오해하는 지점도 이와 관련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습을 끊어낼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는 큰 착각이다. 우리가 기대고 있는 그 ‘의지’라는 것, 그것은 지금의 내가 가진 의지이며, 지금의 나란 기존의 습들로 이루어진 나인 것이다. 결국 나의 의지란 기존의 습 위에서 작동하는 의지이자, 기존의 습이 가진 방향성을 나타낼 뿐이다. 요컨대, 나의 의지란 내가 끊어버리고 싶은 그 습들의 편에 서 있는 것이다. 하여 의지에 의존하는 한 우리는 기존의 습과 결별할 수 없다. 결단에는 ‘나의 의지’와는 다른 타자의 힘이 필요하다. 나의 방향성을 틀어줄 물리적 배치. 즉, 타자에게 열린 관계의 장이 요구된다. 택천쾌가 말하는 왕의 조정이란 이런 의미다.
연구실 청년들의 공부과정 중에 ‘100일 항심’이라는 것이 있다. 자신이 고치고 싶은 습을 친구들과 나누고 100일 동안 그것을 지켜나가는 것이다. 과자나 초콜릿을 먹지 않는다든지, 야식을 끊는다든지, 저녁에 일찍 자는 습관을 들인다든지, 새벽 운동을 한다든지 각자가 바꾸고 싶은 일상들을 친구들과의 약속을 통해 만들어가게 된다. 물론 100일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온전히 자신의 습이 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100일이라는 시간은 꽤 쏠쏠하다. 자기 일상을 조율하는 실험, 다른 일상을 살아가며 느끼게 되는 여러 감정들, 자신조차 몰랐던 자신의 새로운 모습과의 조우, 그리고 100일의 시간을 오롯이 자신이 만들어갔다는 자존감. 이 모든 경험들의 결정적인 힘이 되어 준 것은 바로 친구들과의 약속이다! 그 약속이 없었다면 처음 세운 그 마음을 지켜나가기란 사실상 불가능했을 게다.
물론 이 과정이 쉽지만은 않다. 자신 안에 올라오는 여러 갈등들과 마주해야 한다. 그러다보면 친구들과의 약속이 억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못하게 하는 어떤 압력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이런 땐 생각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 우리는 친구들 때문에 무엇을 못하고 있는 게 아니라, 친구들 덕분에 무언가를 해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친구들이 아니었다면 열리지 않았을 새로운 삶의 장. 그렇게 조금은 넓어진 삶의 지평. 프랑스의 철학자 푸코가 말했듯, 우리는 친구들을 통해 한 번도 되어 보지 못한 내가 되는 그런 자유를 영위하게 되는 것이다. 결단은 결코 억압이 아니다. 아니, 억압이 되어서는 안 된다. 억압을 통해서는 무언가를 끊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 쾌괘는 “불리즉융(不利卽戎), 군사를 쓰면 이롭지 않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니 결단이 억압이 되는 순간 떠올려보자. 그것을 하지 않음으로써 내게 열리는 세계를, 그럼으로써 어떤 자유가 내게 오는지를. 결단이란 무언가를 하지 못하게 되는 부정적 행위가 아니라 새로운 삶의 길로 가는 출구일 뿐이다.
결단의 또 다른 지혜가 담겨 있는 것은 이효다. 九二, 惕號, 莫夜有戎, 勿恤. 구이, 척호, 모야유융, 물휼. 두려워하며 호령하는 것이니, 늦은 밤에 적군이 있더라도 걱정할 것이 없다. ‘늦은 밤’이란 우리의 몸과 마음이 완전히 풀어지는 때다. 이런 때 적군이 쳐들어온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물론 그 피해 또한 매우 심각할 것이다. 하여 이효에서 말하는 ‘늦은 밤의 적군’이란 가장 무서운 적, 가장 위험한 적을 의미한다. 하나 여기서 명심해야 할 건, 그것이 적군 그 자체의 강함이라기보다는 느슨해진 우리 마음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마음의 긴장을 놓치지 않는 것, 방심하지 않는 일이다. 두려워하며[惕] 경계하고 호령하는[號] 자의 엄한 태도를 지켜나가기. 그렇다면 “늦은 밤에 적군이 있더라도 걱정할 것이 없다”.
택천쾌 괘는 양의 기세가 훌륭하다. 반면 음의 기운은 쇄미하다. 해서 우리에겐 쉽게 방심하는 마음이 일어난다. 하지만 마지막 남은 소인의 마음이야말로 독하디 독하다. 겨울의 끝, 이제 봄이라 여길 때쯤 부는 그 꽃샘추위의 매서움처럼 말이다. 끝에 매달린 음효라고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 하나 뒤에는 맹렬한 욕망이 숨어 있다. 보잘 것 없는 외양을 띄고 있지만 무엇보다 강력한 힘을 가진 마지막 음효. 아니다. 보잘 것 없어 보이기에 가장 무서운 게 바로 그 소인이다.
실제로 우리는 그런 소인의 모습에 곧잘 넘어간다. 새롭게 몸에 새기고 싶은 양식. 하지만 그렇기에 낯설고 불편한 행동들. 그럴 때면 올라오는 마음이 있다. 이제까지 열심히 잘 지켜왔으니 오늘 ‘하루 정도’는, 이번 ‘한 번 정도’는 안 해도 괜찮지 않을까. 달콤하다. 힘들어하느니 잠시 잠깐 나를 풀어주고 다시 시작하는 게 더 나은 듯싶다. 이제 그 말은 달콤함을 넘어 합리적이게까지 들린다. 하지만 그것이 곧 ‘늦은 밤의 적군’인 것이다.
20년 쯤 피워온 담배를 끊으며 난 그 적군의 매서움을 혹독히 겪었다. 금단증상도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고 생각되었을 쯤이었다. 밑도 끝도 없이 이런 마음이 올라왔다. 한 대는 괜찮지 않을까. 한 대만 딱 피고 안 피면 되잖아. 그렇게 난 수많은 ‘딱 한 대’의 담배들을 피웠다. 하지만 그러다 알게 되었다. ‘한 대쯤’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를. 그건 내가 이미 한 개비의 담배도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난 그런 나를 속여야만 했다. 지금 내가 하는 행동이 별거 아닌 것처럼 여겨지길 원했다. 그것이 내 결심을 무너뜨리는 일이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그래서 나온 말, 그것이 ‘한 대쯤’이었다. 그제야 난 사소한 듯 보이는 그 말의 위험을 알았고, 그렇게 담배와의 인연은 정리되었다.
기존의 습관을 끊어나가는 중 누구나 한 번은 만나게 되는 소인의 마음. 대수롭지 않은 일로, 하찮은 일로 위장하며 나타나는 감미로운 말들. 결단의 위험은 거기에 있다. 하여 쾌괘의 이효는 우리에게 경계의 말을 던진다. 사소한 것으로 보이는 마음일수록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고. 가볍게 다가오는 말일수록 엄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오랫동안 살아왔던 삶의 양식과 결별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더욱이 그 마지막은 심히 괴롭다. 하지만 괴로움이 크다는 것은 끝이 멀지 않았다는 소리이기도 하다. 물리학에서 말하는 마찰력의 원리가 그렇다. 정지한 물체를 움직이려고 우리가 힘을 가할 때, 가장 많은 힘을 필요로 하는 순간은 그 물체가 움직이기 직전이다. 내가 물체를 움직이려고 힘을 주면 줄수록, 그에 저항하는 마찰력 또한 커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찰력이 극에 달했다는 건, 이제 곧 물체가 움직일 거라는 증거이기도 한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 상태를 ‘업장’을 가지고 설명한다. 업장이란 간단히 말해 우리가 습관적으로 해 온 행위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업장은 하나의 자기 운동력”을 갖고 있다. 그러니까 업장이라는 놈도 자기 생명력이 있다는 것이다. 해서 업장 또한 소멸되는 것에 저항한다. 끝까지 살아남으려 안간힘을 쓴다. 때문에 우리가 업장을 없애려고 힘을 쓰면 쓸수록 업장은 더욱더 기승을 부리게 된다.
나는 연구실에서 이 업장의 힘을 종종 목격하곤 했다. 나름 새로운 삶의 패턴을 잘 만들어가고 있던 청년들이 어느 날 갑자기 공부에 대한 회의를 토로하며 약속한 글을 써오지 않거나, 관계를 망쳐버리는 사고를 치는 것이었다. 왜 그러는지 이유를 물어보면 나름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하곤 했지만, 그다지 신통치 않은 답변들뿐이었다. 내가 보기엔 그 친구들 역시 자신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명확히 알지 못했다. 그럴 때면 궁금했다. 무슨 귀신이 쓰인 것도 아니고 왜 갑자기 저렇게 돌변하는 것일까? 이제는 알겠다. 우리의 과거의 습들 또한 하나의 존재성을 가지고 있기에 그것 또한 살아남으려 발버둥치는 것이었다.
택천쾌는 마지막 남은 소인의 그 거칠고 사나운 위세를 알았다. 그렇기에 이제는 이룬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가장 위태로운 순간이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세한 이쪽의 힘으로 쇠락한 저들을 척결할지라도, 만일 쉽게 여기고 대비함이 없으면, 예상하지 못하는 후회가 있을 것이다. 이것은 아직도 위태로울 수 있는 이치가 있기 때문이라서, 반드시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어야 근심이 없게 된다.”(정이천, 《주역》, 심의용 역, 글항아리, 859쪽) 모든 일은 끝나야 끝난 거다! 소인은 언제나 사소하고 하찮은 모습으로 그 마지막 위력을 보여준다. 그 앞에서 한 번 더 마음을 단속하는 것. 거기에 삶의 변곡점이 자리한다.
글_근 영(글공방 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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