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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주역 시즌 3

[내인생의주역시즌3] 천화동인, 야(野)! 울타리를 치지마!

by 북드라망 2024. 6. 19.

천화동인, 야(野)! 울타리를 치지마!

 

䷌ 天火同人(천화동인)

同人于野, 亨, 利涉大川, 利君子貞.
동인괘는 사람들과 함께하기를 넓은 들판에서 하면 형통하니, 큰 강을 건너는 것이 이롭고, 군자가 올바르게 행동하는 것이 이롭다.

初九, 同人于門, 无咎.
초구효, 문을 나가서 사람들과 함께하니, 허물이 없다.

六二, 同人于宗, 吝.
육이효, 자기 집안에서만 사람들과 함께하니, 부끄럽다.

九三, 伏戎于莽, 升其高陵, 三歲不興.
구삼효, 병사를 수풀에 감추어 두고 높은 언덕에 올라가서 엿보지만 3년 동안 일으키지 못한다.

九四, 乘其墉, 弗克攻, 吉.
구사효, 담장에 올라가지만 구오를 공격하지 못하니 길하다.

九五, 同人, 先號咷而後笑, 大師克, 相遇.
구오효, 사람들과 함께하는데 먼저 울부짖다가 나중에 웃으니, 크게 군대를 써서 이겨야 육이와 서로 만나게 된다.

上九, 同人于郊, 无悔.
상구효, 교외에서 사람들과 함께하니 후회할 일이 없다.

 

 

회사를 그만두던 날(정확히는 회사에서 잘린^^ 날), 나는 기뻤다. 그동안 주말에만 공부하러 다니던 연구실, 이젠 더 자주 갈 수 있겠구나! 좋은 사람들과 흥미로운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는 곳에서 내 리듬에 맞게 실컷 공부해야지! 그렇게, 당장 백수가 되는 상황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전혀 불안하지 않았다. 앞으로 내 삶이 어떻게 변화될지 상상조차 안 됐지만, 공부하고 싶다는 마음과 그것을 할 수 있는 곳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신나고 든든했다.

주역의 천화동인(天火同人)괘를 공부하면서 나는 내가 연구실 생활을 시작하던 때부터 최근까지의 일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동인은 ‘함께 어울림’의 때다. 동인(同人)의 동(同)은 ‘같다(equal 또는 데칼코마니)’라는 뜻이 아니다. ‘함께’라는 뜻이다. 즉. 동인은 나와 같은 사람―배경, 성향, 취향 등등이 같은―이 아니다. 나와 전혀 다른 사람이어도 그와 ‘함께 어울림’을 이루는 것이 동인의 때이다. 이 ‘함께’라는 의미를 동인괘의 괘사에서는 야(野, 들판)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들판, 그곳은 울타리가 없는 곳이다. 누구든 올 수 있고, 누구든 갈 수 있는 곳.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공간이다. 연구실과 공부하는 삶을 알기 전까지 나는 오직 직장 다니는 삶만 알았다. 그런데 그곳을 떠나 공부하는 백수의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연구실이라는 들판이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공부하고자 하면 언제든 갈 수 있는 곳. 현재 이곳에서 나는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삶을 살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들판에 울타리가 쳐지는 사건이 벌어졌다. 다름 아닌 나에 의해서.

작년 여름, 나의 두 마리 반려묘 중 첫째가 하늘나라로 가버렸다. 14년 동고동락한 녀석을 이렇게 보내다니…. 살다 보면 언젠가 죽음이 있게 마련이다…….라고 이성적으로는 이해가 됐지만, 마음은 여전히 괴로웠다. 그 마음은 고스란히 13살짜리 둘째 고양이한테로 옮겨갔다. 이 녀석도 갑자기 보내게 되면 어떡하지 싶고 걱정이 되었다. 차차 마음을 추스르고 서서히 일상을 되찾아 갔지만, 불안감은 마음 한쪽에 계속 남아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둘째 고양이를 홀로 두고 2주간 집을 떠나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내가 코로나에 확진이 된 것이다. 당시 코로나 방역 방침은 확진자들이 모두 치료센터에서 격리되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갈 수 없었다. 내가 격리시설에 가면 고양이가 굶어 죽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보건소 직원이 내 상황을 이해해 주었다. 내 컨디션과 상황 등을 살펴 가면서 입소 날짜를 하루 이틀씩 미뤄주었다. 그렇게 시간은 지났고, 나의 의무 격리 기간은 끝났다. 다행이고 감사한 마음이 컸지만, 2주간의 격리 기간은 내게는 불안의 연속이었다.

코로나라는 병 또한 나를 매우 혼란스럽게 했다. 증상은 일반 감기와 비슷했지만, 단시간에 죽음으로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쉽게 완치되지도 않았다. 증세가 완화된 후에도 계속 피로했고 깨어 있어도 멍한 상태로 지내야 했다. 게다가 이 병의 강한 전파력도 놀라웠다. 이 병으로 아파도 병원이나 약국조차 갈 수 없는 희한한 상황을 만들어냈다. 이틀 이상 집에 있어 본 적이 없던 나였다. 그런데 집 밖으로 못 나간다니, 너무 답답했다. 거기에 돌봐줄 사람도 곁에 둘 수 없었다. 온전히 나 혼자 이 병을 겪어내야 했다. 너무나 낯선 병. 병으로 인해 몸이 아픈 것보다 그것이 가져온 낯섦이 나에게 더 큰 충격을 주었다. 나는 신체적, 정신적, 감정적으로 너무 괴로웠다. 다시는 이런 병에 걸리면 안 된다는 마음이 생겼다. 

결과적으로는 여하튼 고양이 문제도 잘 해결되었고, 내 몸도 회복되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연구실로 출근했다. 당시 연구실 상근자들 여럿이 같은 시기, 같은 병에 걸렸었다. 나와 함께 공부하는 상근자들은 대부분이 청년이다. 전염병 이전부터 나는 그들과 함께 공부하고, 밥해 먹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공부공동체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은 내 삶의 가장 중요한 중심축이었다. 게다가 이렇게 이상한(?) 병까지 함께 겪었다고 생각하니 나는 청년 상근자들에 애틋함과 전우애가 느껴졌다.

상근자들 격리기간 동안 연구실은 문을 닫았었다. 연구실이 자율적인 공부공동체 활동을 시작한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공부하고자 하는 모든 이에게 항상 열려 있는 들판. 그랬기에 우리는 세계적인 팬데믹 상황을 맞아 우리의 공부를 이어 나갈 최선의 방법을 모색해야 했다. 결국 우리는 일시적으로 연구실의 운영방식을 바꾸기로 했다. 모든 수업과 세미나를 온라인으로 전환했다. 상근자들은 동선을 집과 연구실로 단순화했다. 비상근자 선생님들께는 연구실 출입 자제를 부탁드렸다. 

 

이렇게 공지를 했음에도 종종 연구실에 직접 나오고 싶다는 분들이 있었다. 나는 그분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는 병으로부터 우리를 지키기 위해 아무 곳도 안 가고 조심하고 있는데…. 그분들은 가고자 하는 곳 다 다니시면서 왜 연구실에까지 나오려는 것이지? 외부에 계시며 바이러스에 노출되셨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것이 우리에게 다시 퍼지면 어떡하지? 그랬다. 그 순간 내게 비상근자 선생님들은 외부가 되었다. 나는 우리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모든 것을 ‘외부’로 규정하고 그 ‘외부’를 미워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잠깐, 이건 뭔가 이상하다. 이 미워하는 마음은 어디서 나타난 걸까? 연구실 상근자들이 코로나에 걸리기 전까지 나는 비상근자 선생님들과 공부하는 것을 무엇보다도 좋아했다. 나를 비롯한 상근자들은 공부를 중심으로 삶을 꾸려나간다. 비상근자들은 직장이나 가정에 삶의 기반을 두고 공부를 그것과 엮어나간다. 우리는 모두 공부를 통해 삶을 변화시키고자 한다. 비상근자들은 사회에서 부딪히며 겪는 경험을 나에게 나눠준다. 그렇게 삶에 대한 다른 면모를 볼 수 있게 해준다. 그런데 그들을 ‘외부’로 규정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는 데까지 나아간 것이다.

앞서 말했듯, 연구실은 나에게 들판이었다. 내가 새로운 삶의 길을 만들어 갈 때 그 바탕이 되어주었다. 내가 그러했듯, 공부로 새로운 길을 내는 사람 누구에게나 열려 있고 접속할 수 있는 곳이다. 그렇게 오신 분들을 나는 늘 환영했다. 우리 모두 함께 모여 어울리는 곳이 바로 우리 연구실이다. 문제는 그 ‘함께 어울림’이라는 것이 그리 쉽게 되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동인괘의 효사는 이를 잘 보여 준다. 효들은 함께 어울림이 어떤 좋은 모습인지를 알려줄 것 같지만, 오히려 그 반대다. 동인을 하는 것에 얼마나 많은 방해물이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내가 이 들판에 울타리를 친 것도 바로 그 효들이 보여 주는 모습과 들어맞는다. 

2효는 이렇게 말한다. 자기 집안에서만 사람들과 함께하니, 부끄럽다. (동인우종, 린. 同人于宗, 吝.) 자기 집안(宗)은 가족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가족을 포함하여 내가 내 사람이라고 느끼는 사람들―친구, 동료 등―을 지칭한다. 나의 경우 청년 상근자들과 일상을 나눈다. 하지만 세미나나 수업을 들을 때 상근자와 비상근자의 구별은 없다. 함께 공부하고 있음만이 중요했을 뿐. 그러나 나에게 괴로움이었던 일(코로나 격리)을 겪으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어느 순간 청년 상근자들이 나의 집안(宗)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되자 비상근자들은 적이 되었다. 내 집안을 보호해야 하니 외부인들은 오지 마시오! 나는 들판에 울타리를 쳐놓았다. 

 



나는 청년들에게 나를 투사하면서 그들을 나의 집안의 사람으로 만들었다. 내가 힘들었던 기간 동안 그들 또한 그랬을 것이라 단정했다. 최근에 물어보니 당시 격리 생활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외부인은 막아야 한다고 말했지만, 그 뒤에는 내가 병에 다시 걸리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있었다. 

나에게 ‘병’은 낯선 존재이다. 살아오면서 큰 병에 걸려본 적이 없었을뿐더러 아프더라도 하루 이틀 앓고 나면 ‘원래’ 내 몸 상태로 돌아왔다. 그러나 코로나라는 병. 이것은 2주가 넘도록 나를 ‘원래’의 상태로 돌아오지 못하게 했다. 거기에 고양이 걱정까지 더해진 것이다. 이때 나에게 ‘병’이란 매우 안 좋은 일이라는 정의가 세워졌다. ‘병! 나의 괴로움은 모두 너 때문이야. 다신 내 근처에 오지 마!’

그런데 과연 우리는 병을 피할 수 있을까? 병과 죽음은 우리 삶의 일부이다. 그런데도 왜 이런 생각을 품는 것일까. 삶의 기본 원리를 받아들이기 싫어서라는 생각이 든다. 삶을 산다는 것은 새로운 상황을 만나고 그것에 맞춰 새로운 리듬을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그렇게 살아왔다. 2~30대까진 그것이 재미있었고 삶에 활력을 주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나는 그 원리를 잊었다. 나에게 익숙한 ‘원래’의 상태만을 유지하고 싶었다. 코로나가 그토록 안 좋은 일로 다가온 것도, 비상근자 선생님들을 미워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병 때문이든 노화 때문이든, 우리 몸은 변한다. 그런데 나는 그것을 잊고 내가 가장 활발하게 살았던 30대의 몸 상태를 나의 ‘원래’라 고정해 놓고 있었다. 그 몸이 변하지 않기를 바랐다. 나는 새로운 몸에 적응하기가 싫었다. 중년이 되니 나는 내가 익숙한 상태로 계속 있고 싶어졌다. 평생 변화에 맞추었는데, 이쯤 했으면 쉬어도 되지 않을까 싶고 지치기도 했다. 이제 세상도 좀 알 것 같고, 나 자신도 이해하게 된 것 같고. 그냥 이대로 유지하고 싶어졌다. 

몸이 30살에 머무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세월이든 병이든 각종 사건을 만나야만 한다. 그런데 사건들을 통해 내가 변하기 싫으니 나는 울타리를 친다. 그 울타리가 나를 유지해주길 바라면서. 그리고 울타리 밖의 것들은 나를 침범하는 적이 된다. 그러니 그들이 미워질 수밖에~ 

들판에는 그 어떤 울타리도 없다. 아니, 울타리가 없어야 들판이다. 나라는 들판도, 연구실이라는 들판도. 누구나 올 수 있고 누구와도 함께 어울릴 수 있던 곳이 새로운 것들을 만나 변화하지 못하고 그것을 막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서 울타리가 쳐진다. 울타리 안은 내 마당, 밖은 외부. 그렇게 내 것이 생기고 나의 집안(宗)이 생긴다. 함께 어울려야 하는데 나를 유지하는 것을 고집하니 부끄럽기가 그지없다. 

비상근자의 연구실 출입을 일시적으로 멈춘 이유는 그곳이 들판의 기능을 계속하기 위해서였다. 비록 물리적으로 만나지는 못하더라도 공부라는 일상을 계속 이어 나가고자 한 것이다. 펜데믹이라는 새로운 사건에 맞춰 새로운 방식으로 공부의 길을 만드는 것이 바로 삶이니까. 들판이 기능하지 못하게 하는 바이러스를 막아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연구실을 이전처럼 유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전례 없던 상황에서 새로운 삶을 만드는 길이다. 

이는 내가 친 울타리와는 완전히 다른 마음에서 나온 출입 제한이었다. 난 이번에 알게 되었다. 어떻게 순식간에 들판이 집안이 되어버리는지를.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동인의 길을 잘 알지 못하는 것 같다. 하지만 순간마다 그 울타리를 치는 마음을 삼가고 조심해야겠다는 마음을 놓치지 않아야 함을 동인괘를 통해 배웠다. 

 

 

글_줄 자(글공방 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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