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임 사회, 광주리와 양을 찾아서
雷澤 歸妹(뇌택귀매) ䷵
歸妹, 征凶, 无攸利.
귀매괘는 섣불리 나아가면 흉하니 이로울 바가 없다.
初九, 歸妹以娣, 跛能履, 征吉.
초구효, 잉첩으로 시집보내니 절름발이가 걸어가는 것이나 그대로 나아가면 길하리라.
九二, 眇能視, 利幽人之貞.
구이효, 애꾸눈으로 보는 것이니 차분하고 안정된 사람의 올바름을 지키는 것이 이롭다.
六三, 歸妹以須, 反歸以娣.
육삼효, 시집가기를 기다리는 것이니 돌이켜 낮추어서 잉첩으로 시집보낸다.
九四, 歸妹愆期, 遲歸有時.
구사효, 시집갈 혼기가 지난 것이니 시집가는 일이 지체되는 것은 때가 있기 때문이다.
六五, 帝乙歸妹, 其君之袂, 不如其娣之袂良, 月幾望, 吉.
육오효, 제을이 어린 누이를 시집보내는 것이다. 본처의 소매가 잉첩의 소매보다 아름답지 못하니, 달이 거의 차오르면 길하다.
上六, 女承筐无實, 士刲羊, 无血. 无攸利.
상육효, 여자가 제수 담을 광주리를 이어받았으나 내용물이 없고 남자가 희생양을 칼로 베지만 피가 나오지 않으니 이로울 바가 없다.
이전 회사에서 겪었던 상사와의 일화가 하나 떠오른다. 어느 날 아침, 죽상을 하고 출근해서 한숨을 내리 푹푹 쉬다가 나한테 건넨 말이 바로 와이프가 계획에도 없던 셋째를 덜컥 임신했다는 소식이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생명이 얼마나 귀하냐며 진심 어린 축하의 메시지를 전했지만, 앞으로의 비용 지출에 대해 푸념만 늘어놓는 그의 반응에 내심 놀랐다. 내가 아이를 안 낳아봐서 냉엄하고 혹독한 육아의 현실을 모르는 걸까? 임신 소식을 들은 당사자가 이런 반응이라니, 그리고 이런 걱정을 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세상이라니, 뭔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 이런 태도는 우리 자신과 앞으로 태어날 세대들에게 있어서 괜찮은 것일까? 우리는 임신과 출산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 것인가? 아주 복잡하고 조심스러운 화두이지만, 이 괘를 가지고 어떻게든 이야기를 풀어볼 수 있을 것 같다. 바로 뇌택귀매 괘다.
남녀의 결합이나 부부관계는 모든 인사의 시작이자 끝이기 때문에, 우주 만물의 변화를 논하는 주역에서도 혼인을 주제로 삼는 괘들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단전에서 인간사의 처음과 마지막을 남녀의 결합으로 꼽는 뇌택귀매 괘 또한 여기에 포함된다. “하늘과 땅이 교제하지 않으면 어떤 것도 일어나지 않으니, 시집가는 일은 인간사의 시작과 끝이다.”<주역>, 정이천, 글항아리, 1069쪽
귀매 괘의 특징은 바로 앞 순서인 풍산점 괘와 비교했을 때 두드러진다. 법과 예를 갖춘 적절한 만남을 뜻하는 풍산점 괘와는 반대로, ‘잘못된 만남’이라는 뜻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애꾸눈이 보듯, 절름발이가 걷듯 조심하고 자중하라는 효사가 초장부터 이어지다가, 제일 윗자리의 상육효에 이르러서는 ‘불임’이라는 화두를 꺼내 든다. 남녀가 혼례를 치러야 하는데 여자는 과일 하나 없이 텅 빈 광주리를 물려받았고(女承筐无實), 남자는 제사를 지내기 위해 제물인 양의 목을 찌르지만 피 한 방울 나지 않아서(士刲羊无血), 이로울 것이 하나도 없다(无攸利). 뭔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된 상황. 열매가 없는(无實) 것과 피가 나오지 않는(无血) 것 모두 가리키는 바가 같다.
바야흐로 귀매 괘 상육효에 딱 맞아 떨어지는 불임과 저출산의 시대, 광주리가 비었고 희생양이 쓸모없어진 시대다. 임신 소식을 듣고도 웃을 수가 없는 지경이니, 출산율이 바닥을 치는 것이 당연지사다. 우리는 왜 이렇게 되었을까? 나에게 셋째 소식을 전하며 우울해했던 상사는 저녁 늦게 퇴근하고 집에 들어가서 육아에 지친 아내 대신 설거지를 하고, 주말마다 아이들을 데리고 멋진 교외를 찾아 나들이를 가는 헌신적인 아빠였다. 스크루지 영감처럼 쫀쫀하기만 한 가장은 아니었고, 오히려 그 반대였던 셈이다. 자식 하나를 키울 때 얼마만큼의 정성과 돈을 들여야 하는지 너무 잘 알고 있었기에, 그 높은 기준값이 셋째 소식을 두렵게 만든 것이었다. 이것 참, 너무한 아이러니다. 어쩌면 많은 사람이 내 상사가 보여준 태도에 적극 공감을 표할지도 모른다. 돈만 충분하고 여유 있고 양육환경이 허락된다면 임신 소식을 기뻐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냐고.
임신은 귀한 생명의 탄생이니 무작정 기뻐만 하라는 말이 아니다. 또 마냥 즐겁고 기뻐하는 게 능사도 아니다. 놀랍게도 귀매 괘는 기쁨에 대해 참으로 색다른 지점을 짚는데, 하괘인 연못(택:澤)은 ‘기뻐하는데 이치를 모르는 기쁨’을 말한다.<주역>, 정이천, 글항아리, 1070쪽
그래서 위태롭다. 택괘는 기쁨을 상징하기에 그저 좋은 기쁨이겠거니 생각했건만, 참된 기쁨의 조건은 이치를 아는 것이라고 주역은 말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내 몸 좋을 대로 무작정 좇아가는 잘못된 기쁨이 되기 때문이다. 설사 현실적 조건이 전부 허락되어 넘쳐나는 기쁨으로 아이를 낳고 기른다 치더라도, 이치를 모른다면 그 기쁨은 진정한 기쁨이 아니다. 아이를 만남에 있어서 갖는 기쁨 또한 이럴진대, 걱정과 불안으로 전전긍긍하는 상황은 말할 것도 없다. 이치를 모른다면, 열락(悅樂)조차도 엇나간 것이 된다. 알 듯 말 듯 떨떠름한 선언이다. 제대로 된 기쁨을 누리기 위해, 또 만남과 임신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본질적인 앎이 필요하다는 뜻인데, 그게 대체 뭘까? 내 생각에는 귀매 괘의 상육효가 말하는 광주리와 양이라는 상징을 통해 그 이치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광주리는 여성이 시집와서 집안의 제기를 물려받는 살림 도구 혹은 제사에 필요한 과일을 담는다. 이는 선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총체적 지속성을 뜻하는 것이다. 희생양은 하늘에 바치는 제물로서, 남녀의 결합과 다음 세대의 생산에 있어서 필요한 죽음이다. 선대에서 후대로 영원히 이어지는 계보, 그 과정에서 반드시 수반되는 희생. 마치 생명 프로세스를 움직이는 근본 원리를 사물에 빗대어 보여주는 것 같다. 이와 비슷하게, 대상전 또한 이렇게 말한다. “군자이, 영종지폐(君子以, 永終知敝)”. 귀매 괘의 군자는 두 가지를 조율해야 하는데, 생명이라면 응당 이어나가야 할 지속을 계속하는 것(永終) 그리고 그와 동시에 폐하고 버려야 할 것을 정확히 아는 것(知敝)이다. 이렇게 영종(永終)과 지폐(知敝)는 각각 꽉 찬 광주리와 피가 흐르는 양으로 빗댈 수 있다. 남녀가 결합하고 아이를 낳는 과정은 영원한 생명 프로세스의 지속과 함께 자신 혹은 누군가가 완전히 사라지고 해체되는 소거의 뜻도 동시에 함축한다. 그래서 임신과 출산은 어쩌면 쉽게 잊고 돌아서는 문명 사회의 인류에게 있어서 자연과의 연결고리를 일깨워주는 가장 최후의 보루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알아야 할 이치는 바로 여기에 있다. 생명에 대한 지혜, 삶의 존속과 연결을 말하는 광주리의 이치는 물론이요, 이것이 후대로 계속 이어지기 위해 모든 사물에는 끝이 있고 마침내 사라짐을 아는 희생양의 이치 말이다. 광주리와 양은 마침내 이런 질문으로까지 승화된다. 그렇다면 무엇을 지속시킬 것인가? 또 무엇을 내려놓을 것인가?
이렇게 범위가 확장된다면 만남의 이치를 고민하는 것, 임신과 출산에 대한 태도를 고민하는 것은 아이를 낳았거나 낳을 예정인 남녀에게만 해당하는 문제가 아니다. 다양한 배경과 맥락을 품고 있는 인간 모두에게 귀매 괘는 아주 현실적인 화두를 던지는 것이다. 이들이 생명에 관한 본질적 문제를 사유하지 말라는 법은 없으며, 이 문제는 스스로 삶과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를 정확히 반영하기 때문이다. 나 또한 앞으로 결혼을 하거나 아이를 낳을 마음이 전혀 없기에, 귀매 괘를 쓰면서 내가 쓸 수 있는 말이 너무 제한적이라고 생각했다. 하필이면 제일 나랑 안 맞는 괘와 ‘잘못된 만남’을 한 게 아닌가 싶은 당혹스러움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남녀의 만남과 탄생이라는 화두에서 자신 있게 거리 두기를 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는 걸 귀매 괘의 상육효 공부를 통해 서서히 깨달아 가는 중이다. 역이 가르치는 것은 한 마디로 생생지위역(生生之謂易)이다. 오직 만날 뿐! 끊임없이 낳을 뿐! 이 영원한 프로세스에 어떻게 참여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질문으로 들여다보면 주역과의 현대의 만남은 참으로 적절한 결합이다. 오히려 만남과 임신이 희귀해지고 있는 요즘이야말로 생명 탄생에 관한 적극적이고 새로운 담론을 왕성하게 ‘낳을’ 수 있는 적기가 아닐까? 광주리와 양의 이치를 베이스로 삼는다면 각자의 생생지위역이 나올 수 있을 터다. 아이를 낳는 자들에게는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앎으로, 다른 이들에게는 그 이치를 투영해 역에 동참하는 상상력을 발휘하는 공부로 말이다.
결혼과 임신은 인간사의 알파이자 오메가이며, 이에 대한 사유가 인간 삶의 총체적 행위와 앞으로의 족적을 결정할 것이다. 그렇기에 이 주제를 두고 새로운 담론을 생성할 수 없는 사회는 정신적 불임과 지성적 난임을 지독하게 앓을 수밖에 없다. 불임 사회는 단순히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 사회만을 이르는 것이 아니다. 상육효의 결론 그대로 무유리(无攸利)한 사회다. 이것은 단순히 무리(无利), 이로움이 없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유(攸)’가 굳이 첨가된 것은 이 글자가 장소와 방향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로울 바가 없다는 것은 발 디뎌야 할 곳과 움직여 가야 할 방향을 잃는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진정 이롭지 않음은 끊임없이 낳고 기르는 천지 만물의 경이로움을 알고 기꺼이 동참하며 그 과정을 탐구하는 통찰을 망각하는 데서 나온다. 21세기 현대사회에서 특히 우리가 주역을 공부하는 이유는 바로 내재적인 네비게이션을 다시 일깨우고 새롭게 인식하기 위함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불임 사회의 도래라는 시대 상황 속에서 뇌택귀매 괘가 던져주는 메시지는 더욱 뜻깊다. 자신의 광주리와 양을 찾아라! 낳고 기르는 역의 구현은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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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_오찬영(감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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