흩어지는 마음을 붙잡는 방법
風水渙(풍수환) ䷺
渙, 亨, 王假有廟, 利涉大川, 利貞.
환괘는 형통하다. 왕이 종묘를 두는 데 지극하면 큰 강을 건너는 것이 이로우니 올바름을 굳게 지키는 것이 이롭다.
初六, 用拯馬壯, 吉.
초육효, 구제하려고 하되 말(구이)이 건장하니 길하다.
九二, 渙, 奔其机, 悔亡.
구이효, 민심이 흩어지는 때에 기댈 곳(초육)으로 달려가면 후회가 없어지리라.
六三, 渙, 其躬, 无悔.
육삼효, 민심이 흩어질 때에 그 자신만 후회가 없으리라.
六四, 渙, 其羣, 元吉, 渙, 有丘, 匪夷所思.
육사효, 민심이 흩어지는 때에 무리를 이루는 자라서 크게 길하다. 민심이 흩어질 때 사람이 언덕처럼 모이는 것은 평범한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九五, 渙, 汗其大號, 渙, 王居, 无咎.
구오효, 민심이 흩어질 때에 크게 호령하기를 몸이 땀에 젖어 들 듯이 하면, 민심이 흩어짐에 왕이 왕답게 처신하니 허물이 없으리라.
上九, 渙, 其血去, 逖出, 无咎.
상구효, 민심이 흩어질 때에 그 피(육삼)를 제거하고 두려움에서 벗어나면 허물이 없으리라.
언제부터인가 ‘동・서양의 고전을 읽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학창시절을 돌이켜보면, 나에게 ‘고전읽기’는 의무감이나 숙제 같은 것이었다. 그러니까 특별히 좋아하거나 즐거운 취미생활로 여겨지지는 않았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중년의 나이가 되어 ‘감이당’을 만난 지금은 자주 ‘고전’을 읽게 되었다. 그것도 즐거운 마음으로 말이다. 언제부터 그런 마음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생각해보니 몇 년 전에 세미나를 마치고 책거리겸 뒤풀이 때의 일이 떠올랐다. 당시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수개월동안 같이 읽은 사람들과 마지막 문장을 읽으며 감격(?)해 했더랬다. 우리는 그 여운을 달래기 위해서 함께 저녁자리를 같이 했었다. 막걸리도 한잔씩 하며, 책과 책의 저자에 대한 여러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 중에 내가 ‘스피노자가 어쩌고저쩌고’하고 있다는 사실에 순간 어떤 전율을 느꼈었다. 내 입에서 나오는 말과 그 내용이 평상시 다른 사람들과 나누었던 대화들과는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다. 만나는 사람, 공간, 그리고 콘텐츠가 달라지니 내 말이 바뀐다는 사실이 내 마음에 기쁨이 들게 했다. 그 기쁨으로 인해서 다른 고전들도 읽게 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기쁜 마음이 내 안에 쌓이고 쌓였다. 그렇게 쌓이는 기쁨으로 그동안 마음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던 내 삶의 믿음과 가치를 돌아보게 되었다. 질문과 회의가 생겼고, 그러면서 견고하던 그것이 흩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재밌게도 주역 64괘를 보면, ‘기쁨’을 뜻하는 중택태(重澤兌, ䷹) 다음에 ‘흩어짐’을 뜻하는 풍수환(風水渙, ䷺)으로 이어진다. 이를 서괘전에서는 “태란 기뻐하는 것이니, 기뻐한 뒤에는 흩어지므로, 환괘로 받았다”고 설명하고 있다. 정이천은 “사람의 기분은 우울하면 뭉쳐 응집되고 기쁘면 느긋해지고 흩어지므로, 기뻐함에는 흩어지는 뜻이 있으니, 환괘가 태괘를 이었다”<「주역」, 1148쪽, 글항아리>라고 풀이하고 있다. 기쁨의 감정이라는 것이 사람을 느긋하고 여유 있게 만들기 때문에 마음이 흩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동・서양 고전읽기’라는 즐거움과 기쁨이 내 마음을 흩어지게 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흩어진 내 마음을 되돌아보고,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환괘를 통해서 생각해보려고 한다.
먼저, 괘상을 살펴보면, 환괘는 바람[風]을 상징하는 손괘(☴)가 위에 있고, 물[水]을 상징하는 감괘(☵)가 아래에 있는 모습이다. 물 위에서 바람이 불어오니, 물이 흩어지는 모양을 연상하게 한다. 그래서 흩어진다는 뜻의 환(渙)을 괘명으로 하고 있다. 정이천은 ‘흩어짐’은 “마음의 중심으로부터 시작되니, 사람의 마음이 떠나면 흩어져 떠난다. 흩어져 떠나는 것을 다스리는 것도 사람 마음의 중심인 중(中)에 근본하니, 사람의 마음을 수습하여 합치할 수 있다면 흩어져 떠난 것을 모을 수 있다”<같은 책, 1149쪽>라고 했다. 흩어진 마음을 모으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마음의 중심을 세우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가 괘사에서 말하고 있는 ‘왕이 종묘를 두는 것에 이른다[王假有廟]’이다. 왕이 백성들의 흩어진 마음을 모으기 위해서 종묘를 활용했다면, 흩어지는 내 마음을 모으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을 생각해볼 수 있을까? 환괘의 각 효사에서 나름의 방법들을 제시하고 있는데, 흩어지고 떠나는 때에는 단독으로 처신하기 보다는 서로 의지할 수 있는 관계를 중요하게 보고 있다. 그 중에서 초육효의 건장한 말[馬]이 되어주는 구이효, 그 구이효에게 편안하게 기댈 곳[机]이 되어주는 초육효, 이들 초육효와 구이효가 서로 의지하는 관계라는 점이 눈에 들어왔다. 특히, 중(中)의 자리를 얻었음에도 ‘편안히 의지할 곳’을 찾으려는, 그것도 ‘빨리 달려가서’ 찾으려는 구이효에게 눈길이 더 갔다.
구이효의 효사는 “渙, 奔其机, 悔亡.” ‘흩어지는 때, 편안히 기댈 곳으로 빨리 달려가면 후회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단전에서 구이효와 관련하여 “剛來而不窮”이라고 했는데, ‘강한 양이 구이의 자리로 내려와서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강한 양이 구이의 자리로 내려왔다[剛來]’는 것은 “건괘(☰)에서 원래 사(四)의 자리에 있던 양효인 구(九)가 내려가 감괘(☵)의 이(二)의 자리에 위치”<같은 책, 1163쪽>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건괘의 세 양효들이 응집되어 있다가 흩어지는 모양새이다. 그런 측면에서 환(渙)의 시기를 표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는 마치 중년이 되어 느끼기 시작한 ‘고전읽기’의 즐거움이 그 동안의 견고한 내 마음의 중심을 흩어지게 하고 있는 것에 비견될 수 있겠다. 나에게는 ‘역사의 합법칙성’을 밑바탕에 깔고 ‘시간은 흐른다’, ‘성장과 발전’, ‘오늘보다 나은 내일’이라는 가치관이 있었다. 그런데 중년이 되어 동・서양의 고전을 읽게 되면서, 견고하게 내 마음의 중심에 자리 잡았던 그 믿음과 가치에 대해서 질문하고 회의하게 되면서 그것이 흩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다. 처음에는 그것이 불편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의도적으로 더 흩어지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마냥 그 마음의 중심을 흩어지게만 나둘 수는 없다. 흩어지는 건괘의 맨 아래 양효도 내려와서 이(二)효인 중(中)의 자리에 위치하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게 되지 않는 것[不窮]’처럼 마음의 중심을 다시 잡으려고 해야 한다. 마음의 중심을 잡는 일은 살아가는데 있어 중요하다. 그것은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핵심 가치와 삶의 비전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음의 중심을 잡지 못하게 되면 후회가 생기거나 어려움을 겪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누군가의 생각에 쉽게 휘둘리거나 자기의 삶이 아닌 타인의 삶의 주변부에서 어슬렁거리는 삶을 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 이제 마음의 중심을 다시 잡으려 해야 한다. 그것은 지금 흩어지고 있는 믿음과 가치들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이고, 마음의 중심에 새로운 가치들을 채우려고 하는 ‘기대’이자 ‘의지(意志)’이다. 이전과는 다른 믿음과 가치를 형성하려 하고, 그것에 기반하여 삶의 비전을 세우고 삶을 기획해 나아가려 하는 일이다. 이러한 삶을 생각하는 나에게 ‘고전읽기’는 많은 에너지와 영양소가 되어주고 있다. 세상과 나를 바라보는 눈을 확장시키고, 내 삶과 삶의 변화에 대해서 생각하게 해주는 즐거움이 되어주고 있다.
그런 즐거움을 이어가는 과정에서 ‘편안히 기댈 수 있는 곳[机]’이 찾아지거나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그것은 아마도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멀리까지 갈 수 있도록 의지(依支)할 수 있는 친구나 스승과 관련된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좀 더 풀어보면, 그것은 동・서양의 고전 그 자체일 수도 있고, 그 고전의 저자일수도 있을 것이며, 그 고전 안에 등장하는 인물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그 고전을 함께 읽을 수 있는 현재를 같이 살아가는 사람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 빨리 달려가야[奔] 한다. 여기서 ‘빨리’라는 말에는 ‘신속한’이라는 의미와 함께 ‘과감하게’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기존과는 다른 삶의 태도와 다른 행동 방식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나이를 먹었으니 더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나이와 상관없이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배우고 깨닫겠다는 겸허한 낮은 자세를 가지는 삶의 태도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구이효가 자기보다 낮은 위치에 있는 초육효에 기대에 의지하려고 하는 자세이기도 하다. 이러한 마음과 함께 ‘고전읽기가 내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가’라는 질문을 계속 던지면서 사유의 지평을 넓히고 삶의 비전을 생각하며 살아가려고 한다. 그렇게 친구와 스승을 만나는 고전읽기의 즐거움을 이어가며 편안히 기댈 수 있는 곳을 찾으리라.
글_송형진(감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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