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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 인문의역학! ▽/24절기 이야기

달이 차오른다, 추분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 9. 22.

추분, 달이 차오르는 시기

 

김동철(감이당 대중지성)

 

추분의 시간, 추석의 공간에 드러나다


추분을 기점으로 밤은 낮보다 길어진다. 사람들은 대체로 추분에 관심이 별로 없다. 비슷한 시기에 공교롭게 '민족의 명절' 추석이 있기 때문이다. 추석과 추분은 무르익은 가을의 한복판인 중추(仲秋)에 나란히 속해있다. 추분이 추석에 묻힌 감이 있으나, 둘 사이는 상호보완하는 관계이다. 추분에 밤이 길어지는 우주의 이치는 추석에 인간의 풍속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요컨대 하늘의 원리가 땅에 구현되는 것이다. 무엇이 어떻게 나타난단 말인가? 그 연결고리는 미묘하다. 추석은 말 그대로 가을(秋) 저녁(夕)이다. 왜 그렇게 이름지었을까? 조상들도 그랬고 지금도 여전히 가을 저녁에 무엇을 하는지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달 구경이다. 중국 소설 『홍루몽』의 한 대목을 보라.

 

이 정원을 만들 당시 상당히 신경 쓴게 분명해. 산이 높은 곳에는 불쑥 튀어나왔다고 하여 철벽(凸碧)이라 이름 붙이고 산이 낮은 물가에는 움푹 들어갔다고 하여 요정(凹晶)이라고 이름을 붙였으니 말이야. (중략) 한 곳은 위에 한 곳은 아래에, 한 곳은 밝은 곳에 한 곳은 어두운 곳에, 한 곳은 높게 한 곳은 낮게, 한 곳은 산 위에 한 곳은 물가에 집을 지어 서로 완벽하게 대비가 되면서 특별히 달구경을 위해 만들어 놓은 곳이란 말이야.

 

ㅡ『홍루몽 4권』 439쪽, 조설근, 나남출판사

 

 

예전의 달 구경은 지금의 3D영화를 뛰어넘는 체험이었으리라. 가을 저녁의 달맞이는 단순히 구경거리이기 보다, 달의 기운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일종의 의례가 아니었을까? 『동양학 강의』의 저자 조용헌 선생은 이를 두고, 썬Sun텐과 비교되는 '문Moon텐'이라 불렀다. 태양에 몸을 그을리는 것처럼, 달빛을 듬뿍 받자는 말이다. 위에 언급한 것처럼 달구경을 위한 장소를 공들여 만든 까닭은 최대한 달의 약발(?)을 잘 받기 위한 시도로 풀이된다. 그런 관점에서 추석과 같은 명절에 행하는 여러 풍속은 그냥 생긴게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추석 먹거리를 한번 살펴보자. 추석에는 보통 송편, 토란국, 과일 등을 먹는데, 음식들은 각각 우주의 기운을 상징했다. 송편은 본래 달의 모양을 본뜬 것이다. 둥그렇게 빚으면 보름달이요, 오므려서 빚으면 반달이다. 이처럼 송편은 하늘의 기운을, '흙 속의 알' 토란(土卵)은 지하의 기운을, 과일은 지상의 기운을 의미한다. 추석 상차림 자체를 '우주 밥상(?)'이라 부를 수도 있겠다. ^^ 추석의 달맞이 또한 우주의 기운과 관련 있다. 휘영청 달이 뜬 밤에는 남녀 수십 명이 서로 손을 잡고 원을 그리며 빙빙 돌았다. 중국 소수민족 사회에서 도월(跳月) 놀이라고 하는 이 풍속은 우리의 강강수월래와 유사하다. 놀이 중 눈이 맞은 남녀는 빙빙 돌다 슬그머니 빠져나와 수풀 속에서 사랑을 나눈다. 달이 풍요와 생식을 상징하기에, 보름달이 떠오른 이때는 음양이 교합하기 좋은 시기였기 때문이다.

 

우주의 기운이라 하면 추상적으로 느껴진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우리는 매일 우주의 기운을 받고 있으니까. 무슨 소리냐고? ‘날씨’가 바로 우주의 기운이기 때문이다. 날씨에 따라 우리네 일상은 달라진다. 추분에 밤이 길어지며 열어 놓았던 창문도 닫고, 바깥으로 드러낸 피부도 긴 소매, 긴 바지로 감싸기 시작한다. 추석의 달은 만월(滿月)이다. 꽉찬 보름달은 음기(陰氣)의 상징이다. 또한 음기는 밤을 가리키기도 한다. 앞에서 추분은 추석과 한쌍으로, 추분의 우주적 기운은 추석에 구현된다고 말했다. 요컨대 밤이 길어진 추분 즈음, 어느 가을날 저녁(秋夕)의 달맞이는 시공간상으로 음기를 얻을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다. 달의 기운은 인간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 두둥실 교교히 떠오른 보름달은 태양처럼 강렬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으나 인간 내면의 무엇인가를 살살 간지럽힌다. 성감대를 어루만지는 것마냥, 달을 보고 있노라면 야릇한 감정이 느껴진다. 이태백이 달그림자에 취해 장강(長江)에 몸을 던졌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로, 달은 시인묵객과 예술가들의 오랜 주제였다.

 

달달무슨달?

 

ㅡ영화 <늑대인간> 중.

  


달에 대한 설화, 전설은 꽤 많다. 하지만 달을 조사하기 위해 문헌을 뒤적였으나, 달이 인간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자료는 손꼽을 정도였다. 하다못해 '달의 문화사' 정도의 책은 있을줄 알았는데! 물론 내가 과문한 탓이리라. 아무리 그래도 태양을 바라보는 태도와는 참 대조적이다. 하루 날씨는 보통 태양에 의한 일조량으로 좌우된다. 일상은 태양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달빛의 농도 따위를 신경쓰는 사람이 있을까? 기껏해야 달은 공포영화에서 늑대인간의 모티프로 소모될 뿐이다. 달의 음울함을 뚫고 태양이 저멀리 떠오를때 비로소 괴물들은 몸부림치며 소멸된다. 구원자로서의 태양과 광기어린 달의 현저한 낙차! 눈앞에 존재하지만, 그 영향력이 명확하지 않은 존재들은 규정하기 힘들다는 공통점이 있다. 요컨대 그들은 이성의 합리적 사고로 포착되지 않는다. 그래서 배제되고 나아가 말살당한다. 그것의 대표적 형상이 달이다. 달은 존재하지만 알려진 바가 별로 없다. 알 수 없는 존재는 어떻게 다뤄질까? 서구에서는 달을 광기, 미신, 잔혹함의 아이콘으로 만들었다. 블록버스터 영화의 보름달 또한 그러한 상징조작의 일부분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달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토록 주도면밀하게 탄압한단 말인가?

 

여러 시대를 거쳐 사람들은 달과 여성 사이에 특별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해왔다. 여성으로 하여금 아기를 낳게 해주고, 여성들에게 중요한 모든 것을 돌보아주는 것은 달이었다. 이러한 신앙은 세계 전역에 두루 퍼져 있다.

 

ㅡ『사랑의 이해』 48쪽, 에스터 하딩, 문학동네

 

고대 종교에서는 달의 여신을 숭상했다. 이는 달이 생식과 풍요를 상징했기 때문이다. 원시신앙의 특징 중 하나는 모든 사물에 정령이 깃들어 있다는 토테미즘이다. 나무 한 토막, 돌멩이 하나, 하늘의 별, 달 모두에 해당하는 정령이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감히 그 자연에 손댈 생각조차 하지 못하리라. 그랬다간 정령의 처절한 복수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을에 추수때가 되면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곡물을 거둬야 했다. 곡물 정령의 입장에서 이는 마치 자신을 칼로 자르고 절굿공이로 짓찧는 고문과 같았다. 『황금가지』의 저자 프레이저는 이같은 행위를 '신의 살해'라고 불렀다. 정령을 처절히 죽였으니 그 원한을 어떻게 감당하랴? 그래서 고안된 것이 신을 위로하는 각종 제사와 의례였다. 원시부족들 사이에 다양한 의식과 복잡한 주술이 있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비롯했다.

 

그런데 정령신을 모시는 토테미즘은 인격신의 등장으로 인해 점차 소멸해간다. 달의 여신과 태양신, 즉 남신(男神)간의 투쟁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극적으로 드러난 사례가 헤브라이의 토착신인 바알과 야훼와의 대립이다. 바알은 풍요를 상징하는 신이며, 야훼는 '자신 이외의 신을 섬길 것을 용납치 않는' 새롭게 떠오르는 신이었다. 투쟁의 결과는 야훼의 승리! 이는 곧 달로 상징되는 사물에 깃든 정령의 부정을 의미했다. 이제 사물은 그저 인격신이 창조한 피조물로 격하되었다. 사물의 신성(神性)은 말살되고, 신의 명령이라면 언제라도 사물을 가공하고 파괴할 수 있는 세계관이 열린 것이다. 가부장 질서의 기원은 여기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가부장 질서 수립으로 달의 위상이 급격히 추락함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것은 여성의 종속화뿐만 아니라, 여성성(女性性) 전반에 얽힌 문제였다. 요컨대 음적(陰的)인 모든 것의 굴절이자 패배, 사형선고였다.

 

변신하는 존재, 늑대인간

 

여성성은 단순히 여성 그 자체를 의미하지 않는다. 여성적 속성이라 함은 무엇인가? 번식과 풍요를 상징하고, '포착되지 않는' 특성이 있으며, 뭔가 인간의 깊은 욕망을 건드리는 그것. 여성성은 다름아닌 직관과 무의식 같은 것을 의미하리라. 태양의 합리적 이성체계에서는 모든 것이 정확히 계산되고 예측되어야 한다. 그러나 직관이나 무의식은 애초부터 그런 사유과 전혀 다른 층위에서 작동한다. 이성의 욕망에 포섭될 수 없기에, 이성은 그것을 새로운 카테고리, 즉 '광기' 혹은 '사악한 것'에 넣어버린다. 그로 인해 여자는 마녀로 몰리고, 남자는 늑대인간과 같은 괴물이 된다. 그런데 우리가 그저 공포와 오락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늑대인간은 여성성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이미지이기도 하다. 이 연결고리를 이해하려면, 앞에서 한 얘기를 재검토해야 한다.

 

여성성은 정령 신앙, 즉 토테미즘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말했다. 모든 사물에 정령이 있다는 믿음은,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그 정령이 '되는' 의식을 치르게 했다. 곡물을 수확할 때 불가피하게 '신의 살해'를 저지르는 경우, 제의를 치른다고 한 것을 기억하는지? 그 제의의 내용이 흥미롭다. 추수할 때 마지막으로 곡식을 베거나 타작하는 사람을 곡물정령의 화신(化身)으로 삼아, 그를 곡식단으로 둘둘 말아 욕을 퍼붓거나 물을 끼얹는다. 이같은 행위는 살해된 신을 위로하고, 한편으로 다음해 씨를 뿌릴 때 무럭무럭 잘 자라게 해달라는 소망을 담고 있다. 물을 뿌리는 것은 명백히 농작물에 필요한 비를 확보하려는 의도에서 비롯한다. 원시부족의 제의는 대개 이런 식으로 모방주술 혹은 공감주술의 바탕에서 이뤄진다. 인간일지라도 사물에 깃든 정령의 특징을 흉내내면, 일시적으로 그 정령이 '된다'는 믿음이 있었다. '~되기'는 정령 신앙의 핵심이며 바로 여성성의 특징이기도 하다.

 

"여성되기는 다른 모든 되기의 열쇠이다. … 성은 천 개의 성을 생산하며, 이것들은 모두 통제할 수 없는 생성들이다. 성은 남성의 여성-되기와 인간의 동물-되기를 지나간다." (『천 개의 고원』, 526~528)

 

'~되기'는 간단히 말해 '변신'과 같다. 요컨대 늑대인간은 '늑대 되기'가 가능했던 여성성의 존재를 가리킨다. 이는 카프카의 『변신』에서 어느날 문득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 잠자의 이야기와도 유사하다. 여성성의 특징인 '변신'은 곧 존재의 고정불변성을 가차없이 깨부수는 것으로 작동한다. 내가 '나'라는 개체에 갇히지 않고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으로, 이는 장자(莊子)의 '내가 나비이고, 나비가 나'인 사유로도 이어진다. 이는 현재 우리에게도 실천윤리가 될 수 있다. 사회에선 자신을 소개할 때, 특정 직업이 없으면 자기존재가 위축되는 경향이 있다. 백수가 흔히 겪는 일이기도 하다. 요즘엔 '취업준비생'이라는 그럴듯한 호칭(?)이 만들어진 것 같다. 이렇게 된 배경은 고정된 존재가 되지 않으면 불안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정된 것에 연연하지 않고, 오히려 변신 가능성에 초점을 맞춘다면 어떨까? 생명 차원에서도 고정된 것은 죽음을 의미하고, 살아있는 것은 끊임없이 움직인다. 피가 흐르지 않고 고이면 죽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늑대 되기'였을까? 그 기원은 인류가 수렵생활을 하던 때로 거슬러 오른다. 사냥으로 연명하는 인류에게, 늑대는 강력한 경쟁자이자 적이며 한편으로 스승이었다. 선사시대 사람들은 늑대의 사냥기술을 동경했다. '늑대 되기'는 늑대의 야생성과 민첩한 사냥능력을 획득하려는 소망에서 비롯한 것이리라. 그러나 인류가 점차 채집과 농경사회로 이행하면서 '늑대 되기'의 필요성은 감소한다. 굳이 늑대가 될 필요없이, 오히려 늑대를 잡아 사육하며 기르게 된다. 그렇게 만들어진 종(種)이 바로 개다. 영화에도 등장한 늑대개는 그 중간 과도기를 가리킨다. 인류역사에서 늑대가 개로 이행하는 과정은, 앞서 언급한 다양한 역사적 변천을 압축해서 보여준다. 토테미즘 정령신앙에서 인격신으로, 수렵사회에서 농경사회로, 주술적 사고에서 이성의 합리주의로 바뀌는 여정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서로 맞물린다.

 

봄여름 동안 쉴새없이 앞만 보고 달려왔다면, 이제는 잠시 멈추어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생각해볼 시점이다. 벌려놓은 일이 많으면 그만큼 주워담는 것이 필요하다. 가을에 봄여름에 해오던 식으로 살 수는 없다. 지금까지 당연시 여기던 삶의 패턴에 질문을 던져야 한다. 추분 즈음의 달맞이는 존재의 '변신'을 상기시킨다. 왜 나는 일상에서 '질문'과 '호기심'이 없는가? 우리는 삶에 문제가 있기에 그것을 해명하고 돌파하려는 의식, 즉 문제의식이 생긴다. 지금 삶이 적당히 편안하고 아무 문제가 없는가? 그 삶은 역설적으로 문제를 키워가고 있는 것이다. 툭 불거지지만 않을 뿐, 언제나 터지면 모든 삶이 깔대기처럼 휩쓸리는 본질적 문제. 우리는 매번 진짜 중요한 숙제를 항상 미루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그 숙제는 편안하고 익숙한 곳에선 드러나지 않는다. 결국 달의 여성성, 즉 변신할 수 있는 능력은 자신을 낯설고 불편한 곳으로 인도한다. 그 시공간에서 스스로의 숙제와 마주하게 된다.

 

달이 차오른다~ 가자!

      

 

달을 바라보며, 자신이 망각한 여성성을 떠올려 보라. 다른 존재로의 변이를 기다리고 있는 내 안의 무수한 정령의 거친 숨결이 느껴지는가? 달은 아무 말도 해주지 않는다. 그저 나의 내면에 귀를 귀울일 뿐. 늑대는 원초적인 사냥본능으로 먹이를 쫓는다. 여성성은 무의식이요 직관이다.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잠재해있다. 요컨대 인간은 저마다 자신이 갈 길을 늑대처럼 본능적으로 예지할 수 있다. 다만 개처럼 사육되어 왔기에 그것을 잠시 잃어버렸다. 추분에 달로 상징되는 여성성을 환기한다는 것은, 자신의 직관과 무의식을 사랑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는 무슨 신비주의를 말하는 게 아니다. 낯설고 불편하지만 왠지 마음이 끌리고 통하는 곳으로 길을 활짝 열어두라는 것. 그때 새로운 변신은 시작되리라. 달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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