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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 인문의역학! ▽/24절기 이야기

서리가 내린다, 상강 혹은 마지막 가을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 10. 23.

상강, 슬픔 '다시 보기'

 

김동철(감이당 대중지성)

 

동작 그만!


가을단풍이 절정으로 치닫는 시절이다. 절정은 퇴락과 맞닿아있다. 꼭대기까지 올라간 롤러코스터에게 남은 것은 거침없는 하강 혹은 추락이다. 탑승객들은 그 현저한 낙차에서 현기증과 쾌감을 동시에 체험한다. 가을단풍은 요즈음 경험할 수 있는 절정과 퇴락의 현장이다. 사람들은 단풍놀이를 하며 상반된 감정을 느낀다. 아름다움과 쓸쓸함이 그것이다. 울긋불긋 단풍이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낙엽을 밟을 때의 멜랑콜리한 기분은 더해간다. 화려한 자태를 뽐내던 단풍 또한 한 순간에 낙엽이 되어 스러지는구나! 그러니 뭔가 허무하기 그지없다. 그럴 때 사람들은 보통 이렇게 말한다. ‘나 요즘 가을 타나 봐’. 가을을 탄다고? 아무 생각 없이 내뱉는 말은 종종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한다. 가을을 탄다고 말하는 이는 ‘가을’이라는 롤러코스터에 스스로 올라 탄 것과 비슷하다. 정확히 말하면 가을의 여러 면면 중, 절정과 퇴락 사이에서 오는 쾌감에 탐닉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괜스레 우울하고 쓸쓸한 기분에서 허우적거리고 싶을 때, ‘동작 그만!’을 외치는 시절이 도래한다. 상강이다.



상강은 가을에서 겨울로 접어드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다. 가을의 낭만으로 흔히 포장되는 멜랑콜리한 마음은 자기도 왜 그런지 잘 모를 때가 많다. 이런 쓸쓸함은 겨울에 와서 더욱 심해질 수 있다. 겨울은 가을에 비해 침잠하는 기운이 보다 강력해지기 때문이다. 겨울은 낭만과 거리가 멀다. 우울하게 축 처진 마음가짐으론 살아남을 수 없는 혹독한 시절이다. 바짝 군기가 들어야 겨울 동안 씨앗을 온전히 묵혀, 봄에 다시 발아할 수 있다.


요컨대 상강은 월동준비를 재촉하는 이, 군대로 치면 행정보급관 정도 될 것이다. 좋은 말로 해서 되겠는가, 아마 그 말투는 ‘호통’이리라. 그래서 상강에 내리는 서리는 다른 말로 추상(秋霜) 혹은 서릿발이라는 표현으로 쓰이기도 한다. ‘추상 같은 호령’, ‘서릿발 서린 눈빛’ 같은 말은 모두 상강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런데 상강의 ‘호통’은 소리를 바락바락 지르는 화기(火氣)의 성질과는 거리가 멀다. 한마디 나직이 내뱉고 지긋이 바라보는 것에 더 가깝다. ‘농구대통령’ 허재 감독의 ‘레이저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冷氣)라 할까?


음양오행으로 볼 때 가을에 해당하는 감정은 슬픔 혹은 근심이다. 이렇게 보면 가을에 느끼는 우울함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문제는 계절마다 느끼는 감정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냐 하는 점이다. 우울함을 느낀다는 것은 달리 보면 가을의 시공간이 내뿜고 있는 기운과 찐하게 접속함을 의미한다. 우주의 가을과 소통하는 자, 당신은 우울한 사람! 그러니 우울함 자체를 나쁘게 볼 필요는 없다. 하지만 기운은 흘러야 제대로 쓰일 수 있다.


우울함은 ‘울결(鬱結)’ 즉 뭉치려는 속성이 있으며, 울결된 것은 화기(火氣)를 일으킨다. 화기가 치솟으면 분노가 폭발한다. 그것이 바로 울화(鬱火)다. 우울함을 호소하는 이들이 갑자기 울컥하는 것은 이런 까닭이다. 우울함이 불 기운과 상응하는 것은, 조울증에서 극명히 드러난다. 한마디로 우울 아니면 오버하는 극단적인 패턴의 반복이다. 이를 어찌할 것인가? 슬퍼하되 지나치지 않는다라는 애이불비(哀而不悲)의 냉철한 마음가짐이 요청된다. 그것은 다름아닌 슬픔을 다르게 볼 수 있는 인식의 전환에 달려 있다.


갑갑하다 갑갑해~~!! 우울한 이 기분, 치밀어 오르는 이 분노. 어떡하지?^^ 현대인의 만성병, 우울증은 이제 어디 명함도 못 내밀만큼 친숙해졌다. 헌데, 우린 그 병이 어디서 어떻게 오는지 잘 모른다. 병의 길, 마음의 길을 잘 모르는 탓이다.


가을을 슬퍼하는 이유

조선시대의 문인 이옥은 사람들이 유독 가을을 슬퍼하는 까닭을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이미 노인이 된 자는 어찌할 수 없다고 여겨서 다시 슬퍼하지 않을 것인데 사십 오십에 비로소 쇠약해짐을 느낀 자는 유독 슬픔을 느끼는 것이리라! 사람이 밤은 슬퍼하지 않으면서 저녁은 슬퍼하고 겨울은 슬퍼하지 않으면서 유독 가을을 슬퍼하는 것은, 어쩌면 또한 사십 오십 된 자들이 노쇠해감을 슬퍼하는 것과 같으리라!

 

ㅡ이옥,『이옥 전집 1권』, 「선비가 가을을 슬퍼하는 이유」, 휴머니스트

 
윗글을 가만히 읽어보면, 이미 늙은 자들은 노쇠함을 슬퍼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직 늙지 않은 이들이 다가올 노쇠함을 한탄한다. 한마디로 현재를 즐기지 못하고 ‘사서 고생’하는 셈이다. 이런 식이라면 노화를 더욱 재촉하는 꼴이다. 결국 ‘가을 타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했나 보다. 이때 탄식하며 흔히 쓰는 말이 인생무상(人生無常)이다. 어떤 느낌이 드는가? 뜻을 잘 몰라도, 이 단어를 읊조리고 있으면 허무함과 허망함의 느낌이 마치 세트처럼 딸려 나온다. 한마디로 ‘지금 이 순간도 다 지나가겠지’ 혹은 ‘흩날리는 꽃처럼 우리도 죽어 땅에 묻히겠지’ 라는 감정이다. 그런 상념에 잠겨 있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공연히 비감해진다. 인생무상=슬픔이라는 공식은 너무도 자연스러워 보인다.


인생무상, 공수레공수거. 한번 온 인생이 다 그런 것! 흩날리던 꽃도 여름의 화려함도 가고 이젠 가을의 서릿발 같은 바람이 부는구나~~. 잠이라도 자야지^^


과연 그런가? 인생무상의 근본 원리는 ‘변화’이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데 초점이 있다. 거기에 좋고 나쁨이라는 가치판단은 근본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변할 뿐이다. 그런데 변화를 모두 슬픔이라는 하나의 깔때기로 흐르게 한다는 데 함정이 있다. 앞에 예시한 문구는 무엇인가를 감추고 있다. 다시 한번 살펴보자. ‘지금 이 (좋은) 순간도 다 지나가겠지’ 혹은 ‘흩날리는 꽃처럼 우리도 (좋은 시절을 뒤로 하고) 죽어 땅에 묻히겠지’가 보다 정확하다. 요컨대 변화를 슬픔으로 환원하는 습관은, 좋은 것만을 누리려는 마음이 숨어 있음을 의미한다. 좋은 것이 변해 더 이상 누릴 수 없으니 슬플 수 밖에. 한없이 좋은 것, 즉 쾌락의 느낌만 얻으려 하면 그것을 잃었을 때의 낙차감은 현기증을 유발할지도 모른다. 그러한 현기증에서 상실감은 더욱 크고, 나아가 비탄의 감정에 스스로를 몰아넣게 된다. 인생무상이라 함은 과연 이렇게 유치한 것일까?


인생무상, 내 삶의 동력


살아가는 와중에, 괴로움의 나날을 겪고 있다고 하자. 그럴 때 ‘인생무상’의 개념은 아주 효과적이리라. ‘지금 이 (괴로운) 순간도 다 지나가겠지’로 인식의 틀을 바꾸면 어떨까? 이 분야의 지존은 새옹(塞翁)이다. 그래, 새옹지마 고사의 ‘변방의 늙은이’ 맞다. 그는 인생무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알려주었다. 그런데 후세 사람들은 그것을 곡해하여, 무슨 일이 있든 간에 ‘이래도 흥~’ ‘저래도 흥~’ 마치 삶을 냉소와 자포자기의 마인드로 살라는 것으로 여기게 했다. 아마 여기에서부터 인생무상의 의미가 왜곡된 듯 하다. 무상함을 체득함은 삶을 다르게 바라보는 혜안을 얻음이요, 그럼으로써 다른 삶을 살 수 있도록 한다. 이때 무상함은 슬픔으로 한없이 가라앉는 것이 아니라, 삶의 동력으로 비로소 작동하기 시작한다. 지금 이 순간을 즐기되 흐르는 대로 놓아버리는 게다. 어차피 변화 자체는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변화가 아니라, 변화를 바라보는 스스로의 관점과 태도뿐이다. 그것이 곧 운명을 바꾸는 관건이다.


상강에 인생무상을 ‘다시 보기’하는 까닭은 겨울과 연관되어 있다. 상강에 서리가 내리면, 초목의 생장발육은 멈춘다. 아니 소멸되어 간다. 그런데 이 소멸이라 함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준비를 의미한다. 겨울에 응축된 씨앗이 봄에 새싹으로 돋아나는 원리이다. 종자는 ‘밀도’가 있어야 한다. 봄에 아무리 공들여 빛을 쪼이고 거름을 줘도, 종자 자체가 성글면 소용없다. 밀도 있는 씨앗은 겨울을 임하는 마음가짐에서 비롯한다. 수확이 끝나가는 이 시점에, 역설적으로 그대의 한 해 농사는 지금부터 다시 시작이다. 가을의 마무리인 상강에 마음껏 슬퍼하되, 냉철하게 슬퍼하라. 그럼 그 슬픔은 겨울의 씨앗을 만드는 삶의 동력이 될 수 있으리라.


울어라, 세상이 너와 함께 울 것이다. 웃어라.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연암이 말했다던가. 울음이야말로 가장 원초적인 것이라고. 이 가을, 좀 울고 싶다...^^


※ 임진년 상강의 절입시각은 10월 23일 오전 9시 13분입니다.

※ 갑오년 상강의 절입시각은 10월 23일 오후 8시 57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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