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로, 기적과 만나는 시간
송혜경(감이당 대중지성)
어느날 사기꾼같이 생긴 사람이 나타나서 당신에게 딱딱하고 작은 물체를 들이민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있는 과일을 가리키며 일 년 뒤에는 이게 저렇게 된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만약 당신이 알고 있던 정보 즉 식물이 씨앗에서 발아해 자라고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깡그리 잊는다면, 그 사람이 하는 말은 전부 거짓말처럼 들릴 수밖에 없다. 이런 코딱지 같은 것에서 사과가 생긴다고? 배가 열린다고? 밥 한 그릇이 된다고? 오~노우~ 언빌리버블! 이건 분명 사기다. 그런데 한로(寒露)가 되면 사기꾼의 거짓말이 진실로 밝혀진다. 씨앗은 어느 새 달콤한 사과로, 배로 그리고 밥 한 그릇이 되어 나타난다. 실제로 우리는 이 사실에 놀라지 않는다. 이 오곡백과들이 어디서 뿅!하고 나타난 게 아니라, 우리도 같은 무대에서 그들과 함께 자라 성숙했기 때문이다.
참새가 큰물에 들어가 조개가 된다?!
아주 간단한 산수를 해보자. 일 년을 24등분한다. 24개의 마디를 각 3등분 한다. 그러면 전체는 몇 조각? 딩동댕!! 총 72개의 조각이 만들어진다. 그런데 이 계산에서 72라는 답을 도출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눈여겨봐야 할 것은 계산 과정이다. 즉 일 년은 24마디마다 질감이 다르고 또 각 마디의 3묶음마다 질감이 다른 게 총 72묶음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72절후다. 한로(寒露)라는 절기 안에도 3개의 마디가 숨어 있다. 초후에는 기러기가 와서 머물고, 이후에는 참새가 큰물에 들어가 조개가 된다.(?!) 말후에는 국화꽃이 누렇게 핀다. 초후와 말후는 그렇다치고, ‘이후’의 사태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조류가 갑자기 어패류로 퇴화(?)하는 이 사태!
이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서 우선 한로(寒露)가 어떤 절기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로는 가을 절기 ‘이슬 시리즈’ 중 하나다. 백로(白露)와 한로(寒露), 상강(霜降)이 그것이다. 이 ‘이슬 시리즈’는 양기에서 음기로 주도권이 넘어가는 무형의 움직임을 유형적 차원에서 확인할 수 있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 양이 밤에 슬쩍 음과 통한 것이 흰 이슬(백로)로, 추분을 기점으로 양이 음에게 주도권을 갓 넘겨준 모습이 찬 이슬(한로)로, 마지막으로 음의 득의양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게 서리(상강)다. 맞다. 우리도 몸으로 느끼고 있듯이 앞으로 추워질 일밖에 남지 않았다. 한로는 양에서 음으로의 전환,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는 절기인 것이다.
그렇다면 한로에 왜 참새가 조개가 된다는 거지? 참새는 날아다니기 때문에 오행 중에 화(火)기에 해당한다. 반면 큰물에 있는 딱딱한 조개는 금(金)기운에 가깝다. 상상해보자. 고대 중국인이 어느 날 아침, 짹짹거리던 참새소리가 사그라진 것을 기이하게 여겼다. 그리고 참새의 행방을 궁금해 하던 중 갑자기 바다에 조개가 많아진 것을 발견했다면? 그 사람은 참새가 조개가 되었다고 인과를 만들 것이다. 이것은 있는 그대로 보려했던 중국식의 순박하고도 진지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거다. 미스터리가 조금은 싱겁게 풀렸다고? 중요한 것은 고대의 중국인의 시선이 절기의 변화와 함께 같은 방향으로 이동했다는 것이다. 하늘에서 땅으로, 양에서 음으로! 즉 우리가 구성하는 인과도 ‘절기력(節氣力)’에 영향 받는다는 것! 갑자기 그동안 ‘이성적으로’ 충분히 고민하고 판단하고 행동했다고 믿었던 것들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그래, 인정한다. 때론 날씨가 좋아서, 때론 기분 탓이었던 적도 많았다. 믿고 싶진 않지만, 전혀 예기치 못한 부분에서 아마 우리도 고대인들처럼 참새를 조개로 만들고 있을 거다.^^
참새가 조개가 되는 시간. 24절기의 시간은 늘 그렇게 갑작스럽고 뜬금없는 변화로 시작되고 마무리된다. 뚜렷하게 보이는가 하면 다음 절기와 맞닿아 있어 어스름해보이고 어스름해보이는가 싶으면 뚜렷이 보인다. 시간이란 원래 그러한 것인가.
가을걷이, 기적을 손에 넣다!
혹시 봄을 기억하시는가? 입춘부터 곡우까지 총 6절기가 있었지만 입춘은 너무 추웠고 곡우는 거의 여름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더웠다. 우리가 생각했던 봄의 모습을 보여줬던 것은 다섯 번째였던 청명(淸明)의 15일 정도였다. 가을도 마찬가지다. 가을의 다섯 번째 절기인 한로(寒露)에 이르러야 우리가 생각하는 가을의 정취를 비로소 볼 수 있다. ‘가을’하면 떠오르는 것들을 마음껏 나열해 보자. 황금들판, 가을걷이, 단풍놀이, 바바리코트 입은 추남(秋男)?ㅋㅋ 한로의 15일 정도에만 볼 수 있는 풍경들이니 미루지 말고 봐놓자.
가을 풍경들을 구경하다가 문득 질문 하나가 생긴다. 왜 한로에 이르러야 오곡백과에 맛이 알맞게 들고, 추수도 이때 하는 걸까? 찬 이슬이 맺힌다는 것과 어떤 관계가 있는 거지?
글 처음에 등장했던 사기꾼 아저씨가 두고 간 씨앗을 보자. 이 조그만 것에서 그것의 몇 십 배가 되는 게 만들어진다면 놀랍기 그지없다. 그 씨앗엔 엄청난 양의 양기가 엄청난 양의 음기 안에 가두어져 있을 거다. 탁!하고 틔워줄 조건만 기다리며 스프링처럼 움츠리고 있을 것이다. 양기가 천지를 지휘하는 봄과 여름에 씨의 껍질을 뚫고 나와 싹이 트고 무럭무럭 자란다. 이제 음기에게 어렵사리 지휘권을 넘겨주자 성장은 멈춘다. 이제 음기의 리듬에 맞춰 안으로 성숙한다. 양과 음을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양은 무형, 음은 유형의 기운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음이 대세를 이루는 가을, 특히 가을의 절정인 한로에 이르면 과일과 곡식이 알맞게 익어있다. 더 기다리면 안 되냐고? 그러면 음기가 더 세지는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더 안쪽에 있는 씨앗으로 모든 기운이 몰려 정작 과육은 흐믈흐믈해져서 못쓴다. 결국 너무 양(陽)하지도 않고 너무 음(陰)하지도 않으면서, 음기로 적절한 형상이 빚어지는 절묘한 타이밍이 바로 한로인 것이다. 요고요고 아주 중요한 진리다. 무언가가 만들어 지기 위해서는 마음이 너무 뜨겁게 앞서도 안 되고, 마음이 너무 차갑게 식어도 안 되는 법! 뜨겁게 향하던 마음이 약간 식은 뒤에야 길(道)이 열리는 기적이 생기는 거 아닐까? 그렇다면 한로에 주어지는 오곡백과야 말로 기적이 현현한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한번쯤 기적을 경험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기적은 외부에서 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부딪히는 것들이 낯설게 되는 경험이 기적이 아닐지.
이 때 농부들은 손이 열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바쁘지만 마음만은 풍성하다. 물론 그동안 때맞춰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받게 되는 댓가지만, 일 년치 먹을거리와 생활의 기반이 한꺼번에 생겨 곳간에 차곡차곡 채워진다면 기적이 일어난 듯 기쁘지 않겠는가? 생각해보라. 일 년치 봉급이 한꺼번에 통장에 들어온다고! 할렐루야! $_$ 그렇다고 이 일 년치를 한 방에 탕진해버리면 다음 추수 때까지 손가락만 빨고 있어야 한다. 그렇다. 기적이란 어쩌면 바다가 갈라지고, 없던 게 갑자기 생기는 마법 같은 게 아닐지도 모른다. 처음과 끝을 지켜봤음에도 뒤돌아 생각하면 놀라운 것, 작은 거라도 시간의 굴곡을 지나 변신했다면 그거야 말로 기적이다. 자, 그럼 우리도 배워보자. 이 기적을 잇기 위해, 넘치다 못해 터지는 기쁨 안에서 농부들이 다음을 준비하는 자세를!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사실 가을걷이를 할 때 오곡백과만 수확하는 것이 아니다. 농부들이 생존을 걸고 하는 게 있다. 바로 씨앗 갈무리다. 똘똘한 놈은 잘 골라 놓아야 내년에 그놈 닮은 것을 수확할 수 있으니 말이다. 황당한 소리하는 친구에게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하네.”라고 핀잔을 줄 때가 있다. ‘씨나락’이라는 것은 올해 추수한 것에서 가장 먼저 골라놓을 정도로 애지중지하는 좋은 종자다. 거기엔 농부의 한 해 희망이 다 들어 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절대로 먹지 않고 지키는데, 그걸 건드릴 수 있는 놈은 귀신밖에는 없을 거다. 뭐, 이 정도로 농부들에게 씨앗 갈무리는 생사가 걸린 문제다. 그래서 아까 말했듯이 제일 잘 생기고 맛있게 생긴 오이, 가지, 호박은 수확하지 않고 열매가 무를 때까지 놔둔다고 한다. 그래야 과육의 영양이 음의 기운이 치성해져가는 가운데 씨앗에 응축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씨앗은 내년 농사의 모든 것이 된다. 사실 식물들이나 농부들만 이렇게 겨울 혹은 내년을 준비하는 것은 아니다. 한로에는 겨울잠 자는 동물들도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 마지막 영양분을 비축해 둔다.
옳거니! 목화토금수의 오행의 흐름 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생물은 예외 없이 같은 리듬을 타야만 살아갈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함께 얽혀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거기엔 주체와 객체의 경계가 흐릿하며 누구하나 영향주지 않는 것은 없다. 먹는 것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기러기가 오는 것, 참새가 줄고 조개가 많아지는 것, 국화가 피는 것이 음양의 리드미컬한 운동의 산물이다. 또 반대로 우리가 하는 가을걷이로 참새를 줄일 수도 있다. 이렇게 어우러지는 가운데 각자 다음해를 준비한다. 다음 해에 다시 기적이 연출되어야 우리가 살아남을 것 아닌가. 그렇다면 삶은 기적이 멈추지 않는 것을 말한다. 기적이 계속 되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 할렐루야!^^
다들 올해 어떤 농사들을 지으셨는지? 나는 이번 해에는 글을 열심히 쓰겠다고 입춘에 선언했던 희미한 기억이 있다.^^;; 입춘 때와 지금의 글을 비교해보면, 그 때와 지금 사유의 길을 비교해보면……, 문장을 끝맺고 싶어지지 않는다.ㅋㅋ 잘 했든 잘 못했든 나는 변했다. 입춘에는 지금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내 삶에도 많은 굴곡이 지나갔다. 그 흔적들이 고스란히 내가 쓴 글에 남아있다. 그것 그대로 좋다. 이제 들쭉날쭉 키워놓은 작물 중에서 아주 신중하게 내년 즉 2013년을 지탱해 줄 씨앗을 찾아야 한다. 내년에도 삶은, 기적은 계속 되어야 하므로!
* 독자 여러분들에게
역시 추분이 지나니까 일교차가 더 뚜렷해졌어요. 낮에는 해가 들어
따뜻하지만, 밤이 되면 창문 꽁꽁 닫고 두꺼운 이불을 코밑까지 당겨서 덮지 않으면 감기 들기 딱 좋아요. 저는 추위를 좀 타는
편이라 요즘 방한용 스카프를 가방에 넣고 다닙니다. 남은 시간은 음기가 세질 일밖에는 남지 않은지라, 독자 여러분들도 한사(寒邪)
입지 않도록 주의하시길!
참, 추분에 들었던 한가위에 보름달도 구경하셨나요? 저는 오렌지 빛의 커다랗고 둥근 달을
중국에서 감상했습니다.^^v 동철이 글에서 말했던 것처럼, 달이 야생성을 일깨워 기존의 저를 찢고 새로운 제가 튀어나오게
했을까요? 중국에서 음식을 가리지 않고 식신 들린 듯 먹어댄 게 야생성이라면, 충분히 그러고 왔습니다.ㅋㅋ 여러분도 한국에서
그러고들 계셨다는 거 다 알아요. 그럼, 우리…… 변신 성공한 건가요?^//////^
※ 임진년 한로의 절입시각은 10월 8일 오전 6시 11분입니다.
※ 갑오년 한로의 절입시각은 10월 8일 오후 5시 47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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