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력’ 가능한 신체-되기
水地比(수지비) ䷇
比 吉 原筮 元永貞 无咎. 不寧 方來 後 夫 凶.
비괘는 길하니 근원을 잘 살피되, 성숙한 지도력과 일관성, 그리고 도덕적인 확고함을 갖추었다면 허물이 없다. 편안하지 않아야 비로소 올 것이니, 뒤처진다면 강한 사내일지라도 흉하리라.
初六 有孚比之 无咎. 有孚盈缶 終 來有他吉.
초육효, 진실한 믿음을 가지고 사람과 가까이 지내며 도와야 허물이 없다. 내면의 믿음이 질그릇에 가득 차듯이 하면, 결국에는 뜻하지 않은 길함이 온다.
六二 比之自內 貞 吉.
육이효,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며 돕기를 내면으로부터 함이니, 올바름을 지켜서 길하다.
六三 比之匪人.
육삼효, 인간 같지 않은 자와 가까이 지내며 돕는 것이다.
六四 外比之 貞 吉.
육사효, 밖으로 가까이 지내며 돕는 것이니, 바르게 행하여서 길하다.
九五 顯比 王用三驅 失前禽 邑人不誡 吉.
구오효, 가까이 지내며 돕는 것을 드러냄이다. 왕이 세 방향으로 몰아가면서 앞서 도망가는 짐승을 잡지 않으며 자신이 직접 다스리는 곳의 사람들에게만 약속하지 않으면 길하다.
上六 比之无首 凶.
상육효,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며 돕는데 처음부터 믿음이 없으니, 흉하다.
나는 오랫동안 서양철학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공부해 왔다. 그런데, 최근 문제가 있다고 느끼게 된 계기가 있었다. 감이당에서는 매년 공부 계획을 세우는데, 나는 작년(2020년)에도 어김없이 서양철학을 선택했다. 그런데, 일 년 내내 사유가 잘 진행되지 않은 채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답답함은 공부하는 내내 지속됐다. 꾸역꾸역 일 년 과정을 마치기는 했는데, 다음 공부에 대한 계획을 세우기가 막막했다. 서양철학을 계속 공부하자니 달라질 게 없을 것 같고, 그렇다고 서양철학을 포기하자니 아쉬움과 미련이 남았던 것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갈등과 번민이 커지고만 있었다. 이런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나는 은둔하여 혼자 끙끙대는 경향이 있다. 평소에도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편인데, 그 경향이 더욱 강화되는 것이다. 고민을 한다고 집에 틀어박혀 있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영화와 드라마에 흠뻑 빠져 있는 그런 상황이었다.
이 상황을 ‘수지비(水地比)괘’로 설명할 수 있겠다. 비(比)는 ‘친밀한 보좌’ 혹은 ‘협력’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사람이 무엇과 협력해야 하는지에 대한 길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지비(水地比)괘는 지수사(地水師)괘 다음에 위치하는데, 전쟁이 끝난 뒤에 서로 협력하여 안정을 취하는 방법과 태도에 대해 말하고 있다. 안정을 취한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이정표를 새롭게 세우는 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전쟁이나 병, 죽음, 사고 등 큰 사건을 겪고 나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하지 않나. 공부를 할 때도 그렇다. 계획했던 공부나 프로젝트가 끝나면 다음 공부 방향에 대해 고민한다. 그렇기에 수지비괘에 이어 풍천소축(風天小畜)괘가 나오는 것은 자연스럽다. 방향을 정한 이후에야 조금씩 쌓아나가기 시작하는 것이니까. 그렇다면, 이정표를 새롭게 세우는 시기에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가, 어떤 마음을 쓰는가가 굉장히 중요할 것이다.
이때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협력’이다. 사람이라는 부류는 반드시 서로 친밀하게 도움을 주고받은 다음에야 안정을 이룰 수 있기(정이천, 『주역』, 글항아리, 217쪽) 때문이다. 비괘에서는 안정을 도모할 수 있는 대표적인 효로 구오효를 꼽는다. 구오효가 중정한 자리에서 성숙한 지도력과 일관성, 그리고 도덕적인 확고함을 갖추고(같은 책, 218쪽) 있기에 그렇다. 이러한 구오효에 협력해야 하는 각 효들은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을까? 내면에 믿음을 쌓는 자, 내공을 쌓으면서 협력의 뜻을 비추는 자, 다른 것과 협력하는 자, 오효의 뜻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자, 사사로움을 취하여 당파를 만드는 자 등 가지각색이다. 나는 그중에서도 육삼효의 태도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육삼효 역시 협력의 뜻을 가지고 있기는 하다. 그런데, 엉뚱한 것과 협력하고 있는 모습을 보인다. ‘인간 같지 않은 자와 가까이 지내며 돕는다(比之匪人)’고 했는데, 이는 적절하지 않은 것과 친하게 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육삼효는 중정(中正)을 이루지 못한 자리다. 하괘의 맨 위에 있으니 ‘뭘 좀 안다’고 착각하기 쉬운 자리이고, 유순한 효임에도 불구하고 강한 자리에 있어 오효의 뜻에 순응하지 못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래서 육삼효를 보고 이렇게 충고한다. 사람이 서로 친밀하게 협력하는 것은 안정과 길함을 구하기 위해서인데, 적절하지 않은 사람과 친밀하게 협력하면 반드시 후회하고 궁색하게 될 것이라고(같은 책, 228쪽). 적절하지 않은 협력을 고집하다가 도리어 친밀하게 협력해야 할 사람을 잃게 됨을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상황이 딱 이와 같았다. 일 년의 과정이 끝나고 나면 2개월 정도의 휴식 기간이 생긴다. 이 시간에 우리는 쉬기도 하고, 여행을 다녀오기도 하지만, 가장 중점을 두는 것은 한 해의 공부를 점검하고 다음 공부를 설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나처럼 공부 방향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이 들었다면 이 시기는 더욱 중요한 때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러한 때에 나는 영화와 드라마에 빠져 있었다. 어릴 때부터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의미를 찾아내고, 그것에 관해 글을 쓰는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공부를 하면서 이것들에 할애하는 시간이 대폭 줄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시간도 많았고, 코로나 때문에 집에서 나가지도 못했다. 평소에 공부와 연계할만한 영화 리스트를 만들어두었는데, 이것들과 접속할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한 달, 두 달 시간을 보내다 보니, 공부에 대한 고민도 그렇고, 함께 공부했던 도반들과도 서서히 틈이 벌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라마나 영화에 빠져있다 보니 복잡한 상황은 서서히 잊혀져 갔고, 도반들과 함께 공부하며 느꼈던 긴장과 즐거움도 멀게만 느껴졌다. 이 중요한 시기에 나는 ‘적절하지 않은 것’들과 친하게 지내며, 도리어 협력해야 할 공부와 사람들과는 멀어지고 있었던 거다.
이와 같이 육삼효의 ‘인간 같지 않은 자와 가까이 지내며 돕는다(比之匪人)’고 하는 것은 엄밀히 말해 협력이 될 수 없다. 현실과의 틈을 점점 벌리는 친함일 뿐이다. 비(比)괘에서 말하는 것은 ‘원영정(元永貞)한 협력’을 말한다. 원(元)이란, 지도자의 선함, 덕, 리더십과 같은 덕목을 말한다. 이 덕목을 일관성 있게(永) 굳세게 지켜낼(貞) 수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협력하려는 자들은, 자신이 협력하려는 대상이 일관성을 가지고 굳세게 지켜낼만한 덕목을 가졌는가를 판단하는 게 중요하다. 그런데, 그 덕목이 원(元)하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상전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비괘(比掛)는 땅 위에 물이 있는 상이다. 사물이 서로 친밀하게 협력해서 틈이 벌어지지 않는 모습으로 물이 땅 위에 있는 것만한 게 없으니, 이를 친밀한 협력의 모습(같은 책, 224쪽)이라고 봤다. 협력에는 틈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땅에 물이 적절하게 스며들어 있어야 만물이 자라날 수 있고, 그래야 곤괘가 그 미덕을 발휘할 수 있다. 그렇기에 ‘틈이 없다’는 것의 증거는 ‘만물이 자라날 수 있다’는 것에 있다. 만물이 자라나듯 존재는 살아나야 하는 것이다.
내가 고민했던 문제는 예기치 않은 부분에서 풀렸다. 다름 아닌, 도반들과의 소통이었다. 공부 현장에 나와 부딪치고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행위만으로도 문제가 풀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삶의 현장이 살아나니, 그간 벌어졌던 틈이 조금씩 메꿔지는 느낌이 들었다. 사실, 어떤 어려움이 생겼을 때 혼자 생각할 시간을 갖겠다고 하는 것은, 그것을 풀겠다는 의지가 약하다는 증거다. 어려움에 정면돌파하지 않는 습관을 들이면, 삶의 현장은 힘을 잃게 된다. 그리고 ‘나’라는 존재 역시 고립되어 메말라갈 수밖에 없다. 상전에서 말했듯, 존재가 살아나려면 땅과 물의 관계가 중요하다. 아래 곤괘는 땅을 의미한다. 땅(地)은 이질적인 것들의 집합체이다. 그 위에 놓여있는 감괘는 물(水)인데, ‘어려움’이나 ‘위험’을 의미한다. 땅은 위험이 도사리는 물과도 틈 없이 협력하는 존재다. ‘무엇이라도 받아들이겠다’고 하는 것이 곤괘의 신체성인 것이다. 그래야 만물이 자라날 수 있다. 자꾸 혼자 있으려고 하고, 좋아하는 것만 받아들이려고 하는 토양에서는 만물이 자라나기 어렵다. 무엇이든, 어떤 상황이든 품을 수 있는 땅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야말로, 수지비괘가 제시하는 원영정한 협력의 조건인 것이다. 이렇게 되면, 내가 쉬는 동안 가까이 했던 영화나 드라마도 ‘비지비인(比之匪人)’에서 벗어나 다른 관계성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사실, 영화나 드라마가 무슨 문제이겠는가. 그 안에는 삶의 이야기가 생생하게 담겨있다. 다만, 그 속에 담긴 이야기들을 살아 움직이게 할 수 있는가는 신체적 역량의 문제일 것이다. 이야기들에 생동감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나의 신체를 바꾸는 것이 급선무다. 그것이 ‘비지비인’한 것도 ‘원영정’한 협력으로 바꿀 수 있는 길이다.
글_성승현(감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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