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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하고 인사하실래요 ▽/이우의 다락방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하여 - 『낭송 이옥』을 읽고

by 북드라망 2021. 8. 23.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하여 
『낭송 이옥』을 읽고

 


내가 뽑은 이옥의 베스트 문장들

이상하구나! 먹은 누룩이 아니고, 책에는 술그릇이 담겨 있지 않은데 글이 어찌 나를 취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장차 항아리 덮개나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글을 읽고 또 다시 읽어, 읽기를 사흘간 했더니 눈에서 꽃이 피어나고 입에서 향기가 풍겨 나와, 위장 속에 있는 비릿한 피를 맑게 하고 마음속의 쌓인 때를 씻어내니, 정신을 즐겁게 하고 몸을 편안하게 하여 자신도 모르게 장자가 말한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에 들어가게 한다.

이걸 읽으니 왠지 따라해야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이틀 동안 조금씩 책을 낭송해 보았다. 계속 낭송을 하다가 목에 침이 마르기만 하고 비록 이옥이 말한 상쾌한 기분은 느끼지는 못했지만, 그의 표현에 나도 모르게 끌려간 것이었다. 아주 가끔 너무 흥미진진한 책을 보면 절대 놓지 못하는 책들이 종종 있었다. 예전에 10권으로 엮은 오승은의 <서유기>를 정말 좋아했는데, 짜증이 나거나 할 일이 없으면 10권 중 눈에 보이는 걸 아무거나 잡아서 읽곤 했다. 하도 많이 읽어서 나중에는 챕터 이름만 말해주면 줄줄이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이런 식으로 자신한테 꼭 맞는 인생의 책이 한 권은 있는 것 같다. 나중에라도 이옥이 말하는 이 진정한 낭송이나 독서, 글을 쓰는 일을 느낄 수 있게 된다면 좋을 것 같다. 무언가에 의해서 억지로 쓰거나 읽는 것이 아닌, 어쩔 수 없이 터져 나오듯이 읽고 쓰는 일을 나도 언젠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아! 천지간에 생명을 지니고 움직이는 것은 모두 벌레다. 날개 있는 벌레, 털 있는 벌레, 비늘 있는 벌레, 딱딱한 껍데기가 있는 벌레가 있고, 나충이라는 벌레도 있다. 상서로운 기린과 봉황, 커다란 곤과 붕새, 신이한 거북과 용도 하늘에서 보면 모두 벌레다. (...) 바야흐로 훨훨 휙휙 어지러이 너울너울 움직이면서도, 천지 사이에서 벌레는 어떤 사물인지, 또 나는 어떤 벌레인지 스스로 알지 못한다. 지위가 높고 재능이 많고 덕이 갖추어지고 권세가 큰 자도 이와 같거늘, 쌔근쌔근 숨쉬고 꼼틀꼼틀 움직이는 일개 하루살이나 등에 같은 우리는 오죽 하겠는가? 몸뚱이가 조금 더 크고 지각이 조금 더 지혜롭다 하여, 어찌 여러 종류들의 벌레를 비웃겠는가. (135~136쪽)

이옥은 우리가 일개 벌레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하찮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결국엔 다 같은 것이니 너무 차이를 두고 뭐라고 하지 말라고 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모두 같은 인간이고, 위에서 보면 더욱 작은 벌레이다. 하늘에 계신 위대한 분이 보기에는 모두 같은 벌레일 뿐인데, 우리는 뭣 하러 흑인, 백인, 황인 등을 나누며 싸우는 것일까? 그저 외관이 조금 다를 뿐이고, 살아가는 방식이 서로 다른 것이다. 정작 나 자신에게 큰 문제가 생겨도, 나와 다른 사람을 비교하기 바쁘다. 그것이 좋은 일이건 아니건 간에 말이다. 나도 내가 어떤 것을 아무리 잘하더라도 나와 같이 잘한 사람이 있으면, 나와 그 사람 모두에게 잘했다고 말하지는 못할망정 혼자서 ‘왜 내가 이정도 밖에 못하나. 난 바보인가?’하면서 나 자신을 계속 더 잘한 사람과 비교하고 깎아내린다. 인간은 서로를 깎아내리면서도 빗대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인 걸까?

 

크도다, 물이여! 물은 하지 않음도 없고 주장함도 없고, 부러워함도 없고 업신여김도 없지만, 천지의 장부요 만물의 젖줄이다. (...) 물은 아무 기술이 없지만, 결국 장인의 구실을 하는 것은 바로 물이다. 물은 세상의 오물을 받아들이지만 자신은 더럽혀지지 않고, 세상의 갈림길을 가지만 자신은 번민하지 않는다.(25~26쪽)

이렇게 읽으니 물이란 것이 신비한 무언가로 느껴졌다. 흘러가면서도 모든 것에 스며들어 있는 것, 그것이 이옥이 말하는 물이 아닐까 싶다. 끝없이 받아들임에도 정작 자신은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솔직히 그냥은 불가능한 것 같다. 어쩌면 무심한 것이지만 또 그만큼 많이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정작 자신은 포함되지 않으니 무심한 것이고, 하지만 끊임 없이 받아들이기도 하니 그만큼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물은 한 곳에 멈추어 있지 않고 계속해서 흘러가니까 한 곳에 멈춰 있는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저기 흘러 다니며 여러 가지를 경험할 수 있고, 하나의 무언가로 굳어 있지 않을 수 있는 것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러지 못하는 걸까? 할 수 있어도 하려고 시도조차 하려 하지 않는 것 같다. 적어도 나는 내가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서는 것을 할 수 없다고 믿고 싶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서게 되는 순간 내가 탓한 그 모든 사람들도 자신의 입장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다른 사람들의 입장까지 살펴볼 수 있게 되기 때문에 좋은 것 같지만, 그러고 싶지 않다. 이기적이게 되고 싶은 것이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나의 모든 입장들이 무너질까봐.

선비가 가을을 슬퍼하는 것은 서리 내리는 것을 슬퍼하는 것인가? 선비는 초목이 아니다. 그렇다면 장차 추워짐을 슬퍼하는 것인가? 선비는 기러기나 벌레가 아니다. 때를 만나지 못한 방랑객이나 고향을 떠나는 나그네라면 어찌 꼭 가을을 기다려 슬퍼하겠는가? 이상하구나! 바람을 맞아 흐느껴 홀로 즐기지 못하고, 달을 보면 우울하여 눈물을 쏟을 지경이 된다. 저들이 슬퍼하는 것은 대체 무엇 때문인가? 슬퍼하는 자 역시 슬퍼하는 것만 알 뿐 왜 그것이 슬픈지는 알지 못한다. 아, 나는 알겠다! 하늘은 남자요, 땅은 여자라, 여자는 음의 기운이요 남자는 양의 기운이다. 양기는 자월에 생겨나 진월과 사월에 왕성한 까닭에 사월은 서늘한 양의 기운이 된다. 그러나 천도는 상하면 쇠하는 법이니, 사월 이후로는 음이 생겨나고 양은 점차 쇠한다. (61쪽)

나도 슬픈 일이 있으면 그저 내가 슬프다는 것만 알지 정작 왜 슬퍼하는지는 모른다. 예전에 한 번 내가 왜 슬프다는 것만 알고 정작 어쩌다가 슬프게 되었는지를 몰라서 내가 왜 슬퍼했는지 꽉 붙잡고 생각해 보았지만, 이내 그저 내가 슬프다는 상태에 있다는 것만 알 뿐, 정작 왜 그러한 상태가 되었는지는 모른다는 것이다. 이옥은 선비들이 특히 가을에 슬퍼하는데, 이는 음과 양의 기운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사월 이후로는 양의 기운이 쇠하고 음의 기운이 생겨나니 선비들이 천지의 기운에 따라 슬퍼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천지의 기운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슬픈 일이 있으면 이유 없고 하릴 없이 슬프다. 그래서 더 슬픈 것 같다.

 

“아, 거울이여!” 사람들은 자기 얼굴을 알지 못해 반드시 너를 통해 얼굴을 보게 되니, 네가 내 얼굴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네가 내 얼굴을 보여주는 것에 다름이 있음을 너는 어찌 모르는 것이냐. 나는 모르겠구나. 네가 보여준 얼굴이 예전에는 가을물처럼 가볍고 훤했는데 어찌하여 지금은 마른 나무처럼 축 처졌으며, 예전에는 연꽃이 비치고 노을이 빛나듯 하던 것이 어찌하여 돌이끼의 검푸른 빛이 되었는가.(...)(78쪽)

이 문장을 보고, 같은 물건을 보아도 사람들은 모두 다른 시선으로 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거울을 볼 때면 거울이 보여주는 나 자신을 믿지 못하는데, ‘만약 저게 나의 진짜 모습이 아니면 어쩌지’ 하는 걱정 때문이다. ‘만약에 내가 정말로 못 봐줄 정도로 이상하게 생겼다면?’이라는 생각이 거울을 보면 가끔 나기 때문이다. 나 자신은 오직 거울을 통해서만 볼 수 있고, 다른 사람이 말해주는 대로 믿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람마다 보는 시선이 또 다르니 나의 진짜 모습이라는 것이 있기는 한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나는 누구에겐 괜찮아 보일지 몰라도, 다른 누구에겐 추해보일지도 모른다. 과연 어떤 내가 진짜일까? 나의 ‘본 모습’이라는 것은 과연 있을까? 정해진 ‘나’라는 어떠한 특정한 존재가 없으니, 나의 ‘원래의’ 본모습이라는 것도 없을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해

이옥(李鈺, 1760~ 1815)은 1760년에 태어난 시인으로, 정조 시대의 사람이다. 30대에 성균관의 유생으로 있었지만, 그가 성균관의 유생으로 지내는 동안 쓴 소설문체로 다른 선비들이 답습하여 폐해가 심했다. 그는 자신만의 글쓰기 방식을 가지고 있었기에 정조에게 문체가 이상하다는 지적을 몇 차례 받게 된다. 그러나 계속해서 문체가 고쳐지지 않자 결국 군대(?)에도 들어갔지만, 그 후에도 그의 문체는 고쳐지지 않는다. 결국 그는 과거를 포기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조용히 글을 쓰며, 친구 김려의 도움으로 자신이 쓴 글을 문집에 싣는다. 그는 그렇게 고향에서 조용히 글을 쓰며 살다가 생을 마감한다.

 


이 책에는 다른 책들처럼 파란만장한 스토리도 없고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시대의 영웅도 나오지 않지만 내가 읽은 책 중 열 손가락에 들 정도로 재미있었다. 그는 딱히 특별한 주제를 다루지도 않았지만 읽으며 속이 시원해지는 느낌이었다. 이옥의 글 쓰는 방식이 도대체 무엇이 길래 내가 그렇게 흥미진진하게 읽었던 것일까? 그냥 소소한 일상을 깊이 파고 들어가는 점이 재미있었던 것 같다. 공감되는 부분도 많았고, 가끔씩 생각할거리가 나오면 생각을 더 뻗쳐나가는 것도 재밌었다.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는 일을 하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이옥은 사람들이 자신의 글을 알아봐주지도 않는데 계속해서 글을 썼다. 나도 그렇고 내 친구들은 주로 일명 ‘관종(=관심 종자)’이다. 모두가 나를 봐주기를 원하고, 내가 특별한 사람이기를 바라는 것이, 나에게 이제는 너무 당연해졌다. 그래서 누군가의 인정이 없으면, 하나를 이루어서 그에 합당하게 대가를 받지 않는다면 시도조차 하려 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니 정말 오만한데,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만약에 아무도 나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는데 계속 한다면, 정말로 그것에 진심을 쏟을 수 있는 사람만이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아마 이옥이 이런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다. 자신을 알아주는 곳이 없다고 한탄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글을 쓰는 것을 관두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만약에 이옥이 자신의 팬을 원했더라면 여기 한 명 생긴 것 같다.><)

그런데 우리는 왜 글을 쓰는 것일까? 나는 왜 지금 이렇게 읽고 쓰고 있을까? 예전에 인터넷 강의 중에 ‘쓰기 위해서 읽는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읽은 것은 금세 까먹지만 쓰면 분명 남는 것이 있다. ‘읽으면서 배우고 쓰면서 복습한다.’ 같은 느낌이랄까? 하지만 글을 쓰는 건 어렵다. 그 이유는 나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여태껏 글을 쓰며 ‘나’의 시선을 벗어나지 못했다. 나의 관점에서만 책을 읽었고, 나의 시선에서 글을 썼다. 하나의 고정된 시선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내가 내가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글을 쓰는 것이 아마 가장 좋은 것이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이런 일이 가능한 사람은 거의 없다. 내가 글을 쓰는데 어떻게 나를 벗어나서 나의 소속감을 없애고 글을 쓸 수가 있겠는가? 내게는 가능할 것 같지는 않지만, 이옥은 실천한 것 같았다. 그는 한가지의 ‘나’라는 시선에 머무르지 않고 사물 하나하나의 삶을 본 것 같았다. 예를 들자면 이옥은 잡초도 그저 잡초가 아니라 하나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풀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알고 있지만, 딱히 알아봤자 별 쓸모가 없다는 것처럼 행동한다. 하지만 이옥은 그렇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이옥은 정말 대단하다. 글을 쓰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글을 쓰며 나를 지우지 못하기 때문인데, 이건 정말 배우고 싶은 부분이었다. 일상에서도 가끔 다른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내 마음대로 해석할 때가 있는데, 글에서도 나의 주장만을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다 쓰고 나서 읽으면 너무 이기적인 것 같은 글들이 있는데, 이옥은 그런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며 그가 정말로 읽고 쓰는 것을 즐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요즘 책이나 글을 읽으면 글을 쓰기 위해 자신의 이야기를 억지로 끌어내는 듯한 느낌이 있는 글들도 몇 개 있었는데, 이옥의 글쓰기는 그냥 써지는 것 같았다. 딱히 독자를 생각하며 쓴 것도 아닌데, 읽는데 막힘이 없었고, 머리보다 눈이 빨리 읽게 되는 글이었다.

비록 글을 쓰는 것이 어렵고 짜증이 날 때가 있긴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이 글로 정리가 될 때는 기분이 좋다. 생각으로 하면 괜찮았던 것들이 글로 표현되면 말도 안 되게 변할 때가 있긴 하지만 말이다. 예전에 학원이나 규문에 가지 않던 주말에는 집 근처에 있는 도서관에서 가서 오전 내내 책을 읽고 아빠와 밖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책을 읽거나 집에 돌아가는 것이 주말 일과였다. 그 때는 내가 글을 써야 하기 때문에 읽어야 한다는 생각은 없었지만 어떤 장르든 책을 읽으면 정말 내 안에 무언가가 꽉 차는 기분이었다. 비록 그 때 읽었던 책들은 모두 쉬운 책들이었지만 내가 지금 이렇게 책을 읽고 쓸 수 있게 해준 가장 큰 계기인 것 같다.

 


사실 글을 쓰면 정말 헤어나올 수 없는 늪에 빠진 듯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냥 늪도 아니고 하필이면 나무 뿌리에 다리까지 걸렸을 때 느낄법한 짜증나는 기분 말이다. 그 때는 내가 무얼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 순간은 정말 다 때려 치고 치고 아예 새롭게 시작하고 싶지만, 사실 다시 시작할 만한 동기도 없고 하기도 싫기 때문에 정작 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계속해서 생각을 하다가 나중에 답을 알게 된다면 끙끙대고 풀지 못하던 수학 문제를 풀어서 답을 알게 되었을 때처럼 하이텐션이 된다. 사실 글쓰기에 답이란 없겠지만, 나의 질문에 대한 최선의 답이 나올 때가 있다. 정말 짧은 순간이지만 그 순간이 오면 갑자기 머리가 폭발하면서 타자를 우다다 치기 시작한다. 머릿속에 막이 쳐져서 나오지 못하고 빙글빙글 돌고 있던 생각들이 그걸 어느 순간 갑자기 뽁 뚫고 나오는 느낌 같다. 이상하기도 하지만 그런 기분을 한 번 느끼면 계속 쓰고 싶어진다.

내가 만약에 글을 잘 쓸 수 있게 된다면 시를 잘 쓰고 싶다. 요즘 새로운 취미가 하나 생겼는데, 규문 오는 길에 지하철역에 있는 시들을 읽는 것이다. 지하철역에는 각 정류장의 한 칸마다 시가 붙어 있다. 비록 그 내용을 모두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모두 멋진 시 같았다. 시집에 있는 시들은 왠지 집어 들면 다 읽어야 될 것 같아서 차마 다가가기가 힘들었는데 지하철역에 있는 것은 부담스럽지도 않으니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하나하나 읽는다는 성취감도 들고(쓴 사람도 아닌 내가 왜 성취감이 드는지는 모르겠지만), 많이 읽으면 시가 뭔지 좀 알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싶어서 그냥 계속 읽는다.

 

글_이우(고전비평 공간 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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