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어냄의 도리에서 본 ‘착함’과 ‘자비심’
山澤 損 ䷨
損, 有孚, 元吉, 无咎, 可貞, 利有攸往. 曷之用? 二簋可用享.
손괘는 진실한 믿음이 있으면 크게 길하고 허물이 없어서 올바르게 할 수 있으니 나아가는 것이 이롭다. 어떻게 쓰겠는가? 대그릇 두 개만으로도 제사를 받들 수 있다.
初九, 已事遄往, 无咎, 酌損之.
초구효, 일을 마치거든 빨리 떠나가야 허물이 없으니 적절히 헤아려서 덜어 내야 한다.
九二, 利貞, 征凶, 弗損益之.
구이효, 올바름을 굳게 지키는 것이 이롭고 함부로 나아가면 흉하니 (자신의 중도를) 덜어 내지 않아야 (육오의 군주에게) 더해 줄 수 있다.
六三, 三人行, 則損一人, 一人行, 則得其友.
육삼효, 세 사람이 갈 때에는 한 사람을 덜어 내고 한 사람이 갈 때에는 그 벗을 얻는다.
六四, 損其疾, 使遄有喜, 无咎.
육사효, 그 병을 덜어 내되 신속하게 하면 기쁨이 있고 허물이 없게 된다.
六五, 或益之, 十朋之, 龜, 弗克違, 元吉.
육오효, 혹 더할 일이 있으면 열 명의 벗이 도와준다. 거북점일지라도 이를 어길 수 없으니 크게 길하다.
上九, 弗損益之, 无咎, 貞吉, 利有攸往, 得臣无家.
상구, 덜어내지 않고서 더해 주면 허물이 없고 올바름을 지켜서 길하다. 나아가면 이로우니 신하를 얻는 것이 집안에 국한되지 않으리라.
나는 ‘착하다’ ‘배려심 많다’라는 말을 많이 들어왔다. 결코 수긍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는 말이지만 과거 나의 자아상의 일면이었던 건 맞다. 그런데 이곳 감이당 연구실에 와서는 반대로 ‘자비심 좀 가지라’는 말을 듣는다. 언젠가 함께 공부하는 동료 C가 다른 동료 J에게 신랄하게 잘못을 지적하는 것을 보고 스승이신 ‘곰샘’께서는 C더러 가장 J를 사랑하고 자비심이 많다고 하셨다. 별 말을 안 하거나, 해도 완곡하게 돌려 말하는 난 자비심이 그만큼 부족하고 이기적인 사람이다. 공부공동체인 연구실에선 끊임없이 관계와 소통의 문제가 일어난다. 그럴 때마다 옳고 그름을 제대로 분별하는 것과 더불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의 문제에 당면하곤 한다. 이번에 들여다 본 손괘에서 그 해답의 일단을 발견했다.
보통 착하다는 소리를 듣는 사람은 자신이 바라는 걸 줄이고 상대방의 바람에 맞춘다. 자신의 욕망보다는 타인의 욕망에 맞추는 것이다. 자기 견해와 맞지 않아도 적극적으로 자기주장을 하지 않는다. 당장 관계가 어색해지고 그로 인해 오는 불편함이 싫기 때문이다. 그래서 싫은 소리를 잘 하지 않는다. 혹 생각이 달라도 침묵하거나 때론 관계를 불편하지 않게 하기 위해 맘에 없는 말을 하기도 한다. 이런 처사는 겉으로 보기엔 예의를 갖추고 자신을 낮추는 행위이기 때문에 언뜻 내 것을 덜어내는 것처럼 보인다. 보통 보다 착한 사람이 더 손해보고 희생하고 더 덜어낸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러나 과연 그럴까. 손괘에서 말하고 있는 덜어냄(損)의 의미를 보자.
“‘손損’이란 덜어내어 줄이는 것이다. (…) 덜어낸다는 것은 과도한 것을 덜어내어서 중도를 취하고, 헛된 것과 지엽적인 것을 덜어내서 근본적인 것과 실질적인 것을 취하는 것이다. 성인은 차라리 검소한 것을 예의 근본으로 삼았다. (…) 덜어내는 것의 뜻은 인욕을 덜어서 천리로 돌아감일 뿐이다.”(정이천, 『주역』, 815쪽) 덜어냄이란 과도함도 모자람도 아닌 중도를 취하고 헛되고 지엽적인 걸 덜어내 근본과 실질로 돌아가는 것. 그래서 정성과 진실함이 근본이라 한다. 간소한 두 대그릇의 제사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는 정성과 진실된 마음. 이에 비추어 보면 소위 ‘착하다’는 말에 들어있는 덜어냄이란 그저 또 하나의 인욕임을 알 수 있다. 사람과 관계에 대한 정성과 진실함보다는 당장의 표면적인 관계에서 오는 편안함이 우선하고, 사실이건 아니건 ‘착하고 좋은 사람’이라는 자기 이미지를 보존하려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이는 인욕을 덜어서 천리로 돌아간다는 손괘의 덜어냄의 도리와는 거리가 멀다고 하겠다.
덜어냄(損)이 있으면 반드시 보탬(益)이 있다. 누군가의 손해가 누군가에게는 이익이 되고 어떤 죽음이 있어 어떤 삶이 있는 이치다. 그래서 소동파는 “손損은 일찍이 익益이 아닌 적이 없고, 익益도 일찍이 손損이 아닌 적이 없다”(『동파역전』, 331쪽)고 했다. 손괘는 내괘인 아래를 덜어 외괘인 위를 두텁게 하는 괘이다. 안으로부터 덜어내 바깥을 이롭게 한다는 것. 이는 자신의 내면의 덕으로서 타인과 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손괘의 아래 세 효는 모두 위의 세 효와 기쁨으로 덜어내고 호응하며 보탬이 된다.
이는 손괘의 형상에서도 그대로 나타나 있다. 손괘는 산 아래 연못이 있는 형상이다. 아래에 있는 연못의 물이 위에 있는 산에 있는 풀과 나무 온갖 것들에 물을 대주어 자라게 한다. 연못이 깊으면 깊을수록 산세 또한 높고 수려하듯이, 내면의 덕이 깊을수록 세상을 이롭게 할 수 있다. 물은 그 자체로서 풀과 나무에 보탬이 된다. 일부러 덜어내려는 것이 아니다. 존재자체로서 누군가를 살리고 보탬이 되는 것. 그러나 인간은 물과 같은 무심한 존재가 아니라 탐진치에 휘둘리는 존재다. 공자가 이 괘상을 보고 “산 아래에 연못이 있는 것이 손괘의 모습이니, 군자는 이것을 본받아 분노를 억제하고 욕심을 막는다.(象曰, 山下有澤, 損, 君子以懲忿窒欲)”(정이천, 『주역』, 819쪽)라고 푼 이유이다. 인욕을 덜어내고 천지자연의 이치를 본받아 세상을 유익하게 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라는 말이다.
괘상에 부합하여 최상의 덜어냄의 도리를 말해주는 것이 바로 구이효다. “올바름을 굳게 지키는 것이 이롭고 함부로 나아가면 흉하니 자신의 중도를 덜어 내지 않아야 육오의 군주에게 더해 줄 수 있다.(九二, 利貞, 征凶, 弗損益之.)” 불손익지(弗損益之)! 덜어내지 않는 것이 보태주는 것이라니! 아니 덜어내지 않아야 더해 줄 수 있다니! 이는 자신의 것을 덜어내지 않고도 보태줄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덜어내지 않아야 할 것은 ‘중도’를 따르는 마음이다. 구이의 올바름은 중도를 뜻으로 삼은 것(象曰, 九二利貞, 中以爲志也)에서 온다. 중도란 천리를 따르는 마음이다. 이 마음은 덜어낼 어떤 것이 아니라 지켜야할 마음이다. 이렇게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마음은 존재하는 자체만으로도 만물을 살리니 덜어낼 것도 더할 것도 없는 것이다. 이는 곧 구이가 ‘지혜’를 가진 자로서(『동파역전』, 338쪽) 세상에 보탬이 된다는 말이다.
당장 관계가 불편해지는 게 싫다고 습관적으로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은 아무에게도 보탬이 되지 않는 행위다. 이는 “강직하게 올바름을 지키는 태도를 잃고 유순하게 상대를 기쁘게만”하는 태도다. “단지 자신을 덜어내기만 할 뿐 상대방을 증진시키는 것이 아니다.”(정이천, 『주역』, 822쪽) 그러니 계속 그렇게 나아가면 흉하다고 했다. ‘착함과 배려’라는 협소하고 사사로운 마음의 경계에서 벗어나 강직하게 중도의 올바름을 지켜야 타인을 증진시킬 수 있다는 것.
그래서 구이효와 응하고 있는 육오효는 구이효의 중도, 곧 지혜에 힘입어 얻는 바가 말할 수 없이 크다. “열 명의 벗이 도와주고 신령하고 귀중한 거북일지라도 어길 수 없으니 크게 길하다.(或益之, 十朋之, 龜, 弗克違, 元吉.)” 육오의 큰 길함은 구이를 만났기 때문이다. 마치 하늘이 도와주는 것과 같다고 했다. 지혜로운 자를 만난다는 게 바로 이러한 것이다. 구하지 않아도 스스로 찾아와 돕는 지혜로운 벗을 얻는 것보다 길하고 귀한 일은 없다. 그러니 또한 누군가에게 이런 길한 벗이 되는 것보다 더 소중한 일은 없을 터이다.
천리를 따르고 천심에 부합하는 마음을 지닌 자, 지혜를 터득한 자에게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이 바로 만물에 대한 ‘자비심’이다. 소동파는 구이의 ‘불손익지’를 이렇게 멋지게 표현했다. “군자가 남을 이익되게 하는 것은 역시 무無로써 줌이 있기 때문이다.”(『동파역전』, 334쪽)라고. ‘무無로써 준다니!’ 덜어냄의 최상의 도리는 이렇게 아무것도 덜어낼 것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덜어낼 어떤 과도함도 헛됨도 사욕도 없는 존재. 그럴 때 가장 크고 귀하게 세상에 보탬이 된다. 그것이 중도를 지키는 군자의 도리이자 공부하는 자의 도리임을 말한다. 천심에 부합한 마음 어디에 ‘고정된 자아’가 자리할 수 있을까. 천리의 어디에 고수해야할 ‘착한 자아’의 이미지 따위가 있겠는가. 물처럼 존재 그 자체로 누군가를 살리고 세상에 유익한 존재되기! 그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덜어냄의 도리이자, 자아의 경계를 벗어난 ‘자비심’이라 말하고 있다.
글_안혜숙 (감이당 금요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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