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同學), ‘쿨’ 할 수 없는 친구
공부 좀 했다
나는 공부 ‘좀’ 하는 학생이었다. 우리 집에서 사남매 중에 내가 상장을 제일 많이 받았다. 조회시간에 교단 앞에 불려 나가 상도 받아서 동네에서도 소문 좀 났었다. 그래서인가 살면서 내가 공부를 좀 한다는 자신감을 잃은 적이 거의 없었다. 중학교 때부터 성적은 점점 하향곡선을 그렸고 당시에 학력고사 점수로 응시한 대학은 모두 떨어졌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1년짜리 기획 세미나 ‘내공프로젝트’ 모집 공지가 올라왔을 때 은근 두근거렸다. 기왕 공동체로 출근까지 하게 된 마당에 강도 높은 공부로 내공을 키울 수 있다니 출근길이 새삼 보람차게 느껴질 정도였다.
내공 프로젝트는 이문서당과 학이당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문서당에서는 원문강독으로 『논어』를 읽고 학이당은 중국고대사상사 세미나와 글쓰기였다. 일주일에 이틀을 꼬박 공부하는데 활용해야 했다. 『논어』를 원전으로 강독해주시는 우샘의 음성은 무거운 경전의 말씀도 편안하게 들리는 힘이 있었다. 강독을 하시다 “우리 아들 키울 때” 라시며 교육에 유용한 꿀팁이라도 전수해주시면 동학들의 호응이 급상승하기도 했다. 하지만 원전을 강독하시면서 우리가 샛길로 빠지지 않도록 꼼꼼하게 주석을 짚어 주실 때는 오랜 경륜의 내공이 느껴졌다.
학이당은 1년 동안 고대의 중국 사상 중 유학을 중심으로 천 년 간의 사유를 다루는 커리큘럼으로 짜져 있었다. 천년이라는 시간 감각이 없어서인지 처음에는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하지만 첫 책을 펼치는 순간부터 난관이 시작되었다. 읽는다고 읽는데 안 읽혔다. 우리가 너무 난감해하자 문탁샘은 배경지식을 부족한가 싶어서 『십팔사략』을 봐라, 『사기』를 읽자며 계속 참고 도서를 제시했다. 세미나 텍스트도 버거운 데 참고자료까지 그야말로 설상가상이었다. 공부 좀 하는 줄 알았던 자신감에 금이 가는 소리가 저 아래에서부터 들려오기 시작했다.
관성의 법칙
성적은 아랑곳 않고 공부에 대한 자신감을 유지할 수 있었던 데는 독서도 한 몫을 했다. 교과서는 점점 내 손에서 멀어지는 대신 다른 책은 나름 끼고 살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책이 흔치 않은 그 환경에서도 읽는데 편식을 했다. 재밌는 이야기만 골라서 읽었다. 국어 교과서에서 이야기만 읽다가 동화책으로 세계 문학전집으로 옮겨갔다. 고등학교 때는 하라고 시키는 공부는 안 하고 밤새 소설책을 끼고 살았다. 교과서나 읽기에는 너무 심심했던 시절이었다. 너무 심심해서 흥미진진한 소설로라도 재미를 찾았다고나 할까.
하지만 학이당에서 읽게 된 책은 한 줄을 넘기기가 어려웠다. 스토리가 없는 것은 그렇다하더라도 저자의 논리적 맥락을 좇아가기가 너무 힘들었다. 인문학텍스트라고 해봐야 가벼운 에세이류 읽은 것이 전부인 나에게는 학이당의 모든 텍스트가 허들이었다. 한 줄을 넘기지 못하고 읽고 또 읽다가 지치는가 하면 여지없이 딴 생각으로 빠져서 책장이 넘어가지 않기 일쑤였다.
『논어』에 나오는 원문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공자의 제자 중에 자로라는 제자가 있다. 자로가 공자님께 군대를 통솔하게 되면 누구와 함께 하겠느냐고 물었다. 공자님은 ‘맨 손으로 호랑이를 때려잡으려 하고 황하를 걸어서 건너려는’ 놈하고는 함께 하지 않겠다고 했다. 나는 ‘포호빙하(暴虎馮河)’의 스케일에 꽂혔다. 침을 튀기며 자로를 옹호했다. 문답의 맥락은 안중에 들어오지 않았다. 스토리에 꽂혀 읽는 관성이 작동한 것이다. 새로운 앎으로 진입할 수 없었다.
오후 수업이었던 글쓰기는 더 심각했다. 써 온 글을 피드백 받고 나면 다음 주에는 다른 글을 써갔다. 알아들을 수 없는 글이라기에 나름대로 알아들을 수 있도록 다른 내용을 썼는데, 왜 지난 글을 수정하는데 집중하지 않고 갈아엎느냐는 지적을 계속 받았다. 억울했다. 『논어』에서 읽게 된 원문들은 어디선가 익히 들어본 익숙한 문장이 수두룩했다. 부모님에 대한 효라든가 연장자에 대한 공경이라든가. 그러다보니 너무 ‘마땅해서’ 궁금한 것이 없었다. 효도해야 하는데 효도하지 못하는 나를 자책하는 회로가 작동했다. 저절로 반성문이 써졌다. 반성이 아니라 연구를 하라는 지적을 받아도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반성이 뭐가 나쁜가.
인문학 공부를 하는 공간이라서 그런가 이곳에는 소싯적에 공부 ‘잘’했던 이들이 수두룩했다. 이게 뭔 뜻이냐 물었는데 교과서에서 배웠잖아 라고 말은 하지 않지만 표정에 다 드러날 때가 있다. 그럴 때 나는 시크하게 말했다. 나의 과학지식은 초등학교 때 배운 자연에서 끝났고, 영어는 단어 100개 정도나 알까 수학은 중2에서 끝냈다니까. 그래도 난 좀 읽고 쓸 수 있으니까 괜찮아 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착각도 이 정도면 훈장감이다. 학교 공부는 하라고 시켰으니까 하기 싫었다는 핑계라도 있지, 이곳은 내 발로 찾아왔다. 공부해서 내공 좀 쌓아보겠다고. 책은 엉덩이 힘으로 읽는 것이다. 쓰고 고치고 쓰고 고치고가 있을 뿐이다. 너무나 평범한 저 말들이 이 착각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도라니. 말이 쉽지 실천은 너무 어려웠다. 그럴 때마다 함께 부대껴준 동학(同學)들이 있었다. 그들이 없었다면 진즉에 그만두었을 지도 모른다.
디어 마이 프렌즈, 학이당편
문탁샘과의 인연은 학이당에서 튜터로 만나는 것으로 계속 이어졌다. 문탁샘은 학이당 세미나 첫 시간을 보낸 후 후기에 이렇게 댓글을 달았다. “난 튜터다. 동시에 난 연구자다.” 튜터로써 우리가 어디서 헤매고 있는지 살펴서 조목조목 정리를 해 주었다. 또 연구자로써 세미나 때마다 새로운 질문을 구성하는가 하면 우리가 해답을 찾느라 우물쭈물하는 사이 다른 질문으로 옮겨갔다. 결과적으로 학이당에서 가장 열심히 공부하는 동학의 자리를 한 번도 놓친 적이 없었다. 문탁샘은 그 와중에도 공부는 밥심으로 하는 거라며 학이당 멤버들을 집으로 초대해서 손수 밥을 차려주기도 했다. 우리가 전전긍긍 써온 에세이를 향해 “난 니가 뭘 쓰고 싶었는지 알 수가 없다. 이렇게 쓰고 있는 니 욕망을 들여다 봐!” 라고 피드백을 할 때는 목소리가 쨍해지셨다. 덩달아 우리도 긴장하게 되었다. 그런 긴장감 속에서 에세이 발표를 마치고 나면 후련하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통과의례처럼 그 시간을 보내도 전원이 어김없이 새로운 시즌을 맞이했던 걸 보면 문탁샘은 영락없는 우리의 스승이셨다.
학이당 첫해에 같이 출발한 동학은 총 10명이었다. 각자의 조건도 다 달라서 나처럼 싱글이 있는가 하면 아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도 있었다. 그 와중에 풍경은 유치원에 다니는 딸아이를 끼고 공부를 하러 온 ‘늙은’ 엄마였다. 당시 세미나에 결석을 하게 되면 홈피에 결석계를 냈다. 풍경이 낸 결석계는 “시어머님 병원 오신다고 전화하셨습니다. 딸도 있고 아들도 있는데 '네가 가야겠구나' 하시네요. 불끈했지만 돈 못 벌고 공부만하며 노는 며느리.”의 사정이 줄줄이 적혀 있었다. 손맛 또한 일품이어서 문탁에서 풍경이 만든 음식은 매번 완판이었다. 한창 손이 가는 유치원생 엄마에 고분고분한 며느리, 맛집 쉐프까지 겸하면서 공부를 하자니 풍경의 일상이 잠잠한 날이 드물었다. 공부가 늘지 않는다고 하소연을 일삼더니 학이당 3년차엔가는 공부방 총무를 자청하고 나섰다. 번다한 일상의 잔가지를 치고 공부방 붙박이로 거듭나겠다는 출사표를 던지면서. 그러나 여전히 풍경을 찾는 곳이 너무 많았다. 결국 남편의 직장이 있는 지방으로 이사를 가면서 문탁에서 함께 공부하는 시절을 마감했다. (그 후 전주에 있는 고전번역원에 입학하여 만학에 반장 활동까지 한다는 근황을 전해 와서 우리를 기쁘게 했다.)
『논어』 원문을 배웠으니 그걸로 밥도 벌자는 취지로 어린이 이문서당을 열었다. 느티나무와 초록이 훈장으로 나섰다. 매주 『논어』 한 구절을 읽고 쓰고 암송하는 아이들이 주는 감흥에 우리까지 덩달아 보람찼다. 그 와중에 초록은 남편의 경제활동이 여의치 않아 직업을 구해야 하나 고민이 깊어졌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어떻게든 공동체에서 밥을 벌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고 했다. 하지만 서당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초록은 학이당을 접고 결혼 전 경력을 살려 직장을 구했다. 초록을 떠나보내면서 우리의 공부가 당장의 고민을 해결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못 되는 것 같아 마음이 착잡했다.
우리는 함께 공부하면서 ‘내공’을 키우고 싶었다. 전문가 없이도 아마추어의 지성으로 연구하는 연합체 되기, 가족의 자장안에서도 끄달리지 않기, 돈에 연루되어서도 기죽지 않기. 하지만 현실은 늘 우리의 내공을 능가했다. 학이당의 연수가 쌓여가도 우리의 연구력은 좀처럼 늘지 못했고, 가족이 당기는 중력은 그 무엇보다도 힘이 셌다. 돈만 벌면서 사는 것도 불행했지만, 돈 없이는 살 수 없는 현실을 언제까지 외면할 수도 없었다. 나는 그렇게 같이 공부를 시작했던 친구들이 하나 둘 학이당을 떠나는 것을 무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마냥 책만 읽고 있을 수는 없었다. 작년에는 학이당에서 공부했던 여울아와 진달래와 함께 『낭송 논어』를 출간했다. 육 개월이 넘는 시간을 매주 모여서 『논어』의 문장을 해석하고 낭송하기에 적합하도록 다듬었다. 셋이 모이니 문장 하나를 읽어내는 데도 생각이 다 달랐다. 진달래는 주자의 주석에 근거해 정확하게 뜻을 밝히자고 하면, 여울아는 낭송할 때 의미가 잘 전달되려면 좀 더 유연한 해석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나는 때로는 진달래의 해석에 동의했다가 여울아가 직접 읽어보라며 낭송용이 아니라고 들이대면 꼬리를 내렸다. 출판사에 넘기기 전 마지막 수정원고는 인디언네 집에서 1박2일 숙식을 제공받으면서 검토했다. 인디언은 삼시 세끼를 차려 먹이며 허리에 복대 투혼까지 발휘하여 사백 구십 여개의 문장을 끝까지 함께 읽었다. 시간이 갈수록 주석이고 낭송이고 그저 끝내자에 대동단결했다. 마지막 문장을 다듬고 원고를 넘기고 나니 몽롱하게 온 몸이 나른해지던 느낌이 아직도 선하다. 물론 교정지가 나왔을 때 우샘의 감수(監修)를 받아서 또 다시 수정을 감수(感受)해야 했지만^^.
학이당에서 고전공방으로
학이당에서 공부했던 사년 동안 세미나 했던 책들을 쌓아보면 아마도 내 키는 훌쩍 넘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만큼 아는 것이 많다고 착각하지 않는다. 자료가 필요해서 다시 그 때의 책을 꺼내보면, 처음 같은 낯선 내용이 새록새록 읽히기 때문이다. 저자들의 빛나는 사유는 세미나가 끝나면 저절로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친구들은 남았다. 학창시절을 함께 보낸 동창(同窓)들과도 다르고 직장에서 만났던 동료(同僚)들과도 다른 동학(同學)이었다.
공동체 안에서 함께 공부하다보니 동창이나 동료처럼 ‘쿨’하게 관계를 맺을 수 없었다. 세미나를 하고 에세이를 쓰고 공간을 청소하고 밥당번을 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공부거리가 아닌 것이 없었다. 처음에는 나의 말과 글과 행동에 대해 지적하는 친구의 말이 불편해서 마음이 부대꼈다. 하지만 점점 나의 문제를 인정하고 고치려고 애쓰게 되었다. 함께 공부했던 시간이 적당히 ‘쿨’하게 선을 긋지 않고 어떻게든 서로에게 개입하려는 마음을 쓰게 만들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민낯을 보이면서도 떠나지 않고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함께 공부하는 동학(同學), 특출한 스타플레이어는 없지만 함께 모여서는 무엇인가 해낼 수 있는 팀이 되었다.
저간의 사정으로 떠나는 동학의 자리에 새로운 동학들이 합류했다. 초록도 돌아왔다. 출근을 하지 않는 주말에 다시 공부를 하러 나왔다. 회사에서 시도 때도 없이 벌어지는 비인간적 처사에 분노하다가, 문탁은 딴 세상 같다며 성토하다가, 여기라도 나와야 정신줄을 잡을 수 있지 않겠냐고 하소연하기도 했다. 그런 초록을 보며 생각했다. 그가 지금 집안의 경제를 책임지는 가장 노릇에 충실하듯이, 나는 지금 여기서 공부가 밥이 되는 일에 충실해야겠다고. 그리고 초록에게 말했다. “초록, 지금 잘하고 있어.”
학이당을 거치면서 새롭게 합류한 동학들과 함께 고전공방으로 다시 뭉쳤다. 고전으로 글도 쓰고 강의도 하면서 적극적으로 우리의 공부를 생산하자는 뜻을 밝혔다. 요즘은 연구자의 포스가 남다른 자누리의 지휘 아래 최근의 트랜드를 반영하여, 고전 원문과 그와 관련한 에세이를 담은 영상을 만들고 유투브에 올리는 일이 한창이다. 세상의 변화에는 민감하게 그러나 속도를 낼 때는 느긋하고 싶지만 어느 것도 만만치는 않다. 변화는 너무 빠르고 우리만의 속도를 터득하자니 살펴야 할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내고 도모하고 실행하는 동학들과 함께 길을 내 볼 작정이다.
글_기린(에코n양생실험실 인문약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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