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적 수다'는 이제 그만!
사람은 누구나 말을 하고 싶어 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말은 곧 그 사람이고, 다른 사람과의 소통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존재감을 나타내는 핵심이기 때문이다. 가정이든, 학교든, 사회조직이든 오고 가는 말이 건강하면 거기에 속해 있는 사람들의 일상 또한 건강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를 돌아볼 때도 내가 하는 말을 먼저 살피게 되고, 주변의 다른 사람들을 관찰할 때도 그 사람의 말을 귀담아 들어보려 한다. 사람에게 말은 그 사람, 혹은 그가 속한 조직의 건강함을 재는 척도라 해도 되지 않을까. 이런 맥락에서 우리가 숙고해 보아야 할 몇 가지 대화 장면이 떠오른다.
<장면 1>
아들 : 아빠, 나 시골 할아버지 집에 안 갈래.
아빠 : 왜?
아들 : 할아버진 자꾸 뭘 가르치려고 해. 지난번에도 천자문 외우라고 했잖아~
<장면 2>
아빠 : 넌 왜 그렇게 말이 없니? 그렇게 해서 학교생활은 잘하는지 모르겠네.
아들 : 아닌데. 나 학교 가면 말 많이 해. 친구들하고는. 나 친구들이랑 개콘 따라하는 장기 자랑도 했어.
<장면 3>
(몇 년 만에 만난 자리. 서로 인사를 주고받고, 안부를 물은 후 이어지는 대화)
선배 혹은 스승 : 우리 때는 말이야~ (일이면 일, 일상이면 일상, 그 무엇에 대해서든 언제나 대화를 주도한다.)
후배 혹은 제자들 : 아, 네~네~ (선배 혹은 스승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다. 그리고 모두 동의(?)하고 또 존경하는(?) 분위기.)
<장면 1>에서 할아버지가 손자의 장래를 걱정하는 마음은 간절했을 것이다. 손자 역시 할아버지의 마음을 몰랐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할아버지의 정이 느껴지니까. 그럼에도 왜 손자는 할아버지 집에 가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것일까. <장면 2>에서 아빠는 자식의 학교생활이 궁금했을 것이다. 공부는 잘하는지, 친구들은 잘 사귀는지, 선생님의 말씀은 잘 듣고 있는지, 학교 급식은 맛이 있는지 등등. 근데 아들은 학교생활에 대해 통 말을 하지 않는다. 아빠는 이놈이 혹시 학교에서도 이러고 살지는 않는지, 걱정이 된다. 그래서 넌지시 말을 걸어 본 결과, 아들의 답은 의외다. “아빠~, 난 엄마, 아빠, 선생님과 이야기할 때와 친구들이랑 이야기할 때는 달라.”, “나만 그런 게 아니고, 친구들이 다 그래.”, “나 친구랑 셋이서 장기자랑에 나가서 박수치면서 ‘감사합니다~^’도 했어.” 웃기기도 했고, 약간은 당황스럽기도 했다. 내 아들이 남들 앞에서 이런 짓(?)도 하다니! <장면 3>은 지금도 가끔 경험하는 장면들이다. 특히 주로 예전에 함께 공부했거나 일했던 사람들의 모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은 그분 앞이나 바로 옆자리에 앉기를 주저한다. 다만 술을 주고받을 때만 사람들이 잠시 왔다 갈 뿐!
이 대화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보시다시피, 대화를 시작하는 사람, 혹은 그 대화를 주도하는 사람의 마음과는 달리 상대는 마음을 열지 않고 있다. 이들은 그 대화가 지속되고 반복되는 것을 싫어하며, 가급적 그 대화에 깊이 참여하지 않으려 한다. 한마디로 주고받는 말은 많지만 정작 소통은 되지 않는 상황! 때론 난감하기도 하고, 때론 답답하기도 하다. 중요한 건 말을 통해 소중한 사람들과 돈독해지기는커녕 자칫 멀어지거나 부담스러운 관계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 하여, 니체가 진단한 ‘도덕적 수다’로 이 장면들이 가지는 문제는 무엇인지 알아보고 극복 방안도 함께 찾아보자.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늘어놓은 도덕적 수다는 이 시대에는 구역질이 나게 한다. 도덕적으로 식탁에 앉아 있는 것은 우리의 취미에 맞지 않는다! 이 수다, 이 고약한 취미는 지난 시대를 이 시대에도 얼마 동안이나마 질질 끌고 다니는 것 외에는 아무런 일이 없는 사람들, 결코 현재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요컨대 무수히 많은 절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넘겨주도록 하자!
(프리드리히 니체, 『즐거운 학문』, 「물리학이여 영원하라!」, 책세상, 306~307쪽)
손자의 장래를 생각하는 할아버지의 마음이 아무리 간절했어도, 아들의 일상이 몹시 궁금했던 아빠의 순수한 마음도, 후배 혹은 제자들을 독려해 주고 싶었던 선배 혹은 스승의 마음도 잘 전달되지 않았다. 손자를 생각함에 있어 할아버지만큼 사심 없이 애틋한 마음이 어디에 있으며, 자식을 생각함에 있어 아빠만큼 깊은 정이 또 어디 있겠는가? 물론 각종 사회조직의 선배, 혹은 학교에서의 스승과 제자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이들만큼 서로가 서로에게 호의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경우도 드물지 않은가? 하지만 니체는 냉정하게 말한다. 여기서 상상해 볼 수 있는 대화의 패턴은 그것이 무엇이든 ‘자신의 시대를 연장하려는 고약한 취미’일 뿐이라고. 요즘 말로 하면 이들은 “라떼”를 연발하는 사람들이다. 자신이 살아보니 안타깝고, 후회스러운 과거를 너희들은 되풀이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의 표현이라고 그들은 자신 있게 말할 것이다. 하지만 니체의 눈에 그것은 자신의 시대를 연장하려는 ‘도덕적 수다’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 알지 못하고 당신이 앞서 언급했던 장면에서 볼 수 있는 방식으로 말한다면 당신은 이제 ‘수다쟁이’를 넘어 ‘꼰대’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입을 다물어야 하나? 아니다. 니체는 이런 ‘도덕적 수다’는 변화하는 현재의 삶을 보려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넘겨주라고 말한다. 니체는 대신 “자기 스스로를 창조하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위와 같은 책, 307쪽)”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동안 나의 대화 상대들에게 향했던 마음을 먼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들을 위한다는 나의 마음이 과연 청정했던가? 니체는 이들을 위한다는 명분에는 각자에게 익숙한, 혹은 각자가 이상으로 그리는 시대를 조금이라도 연장하려는 마음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렇다! 우리는 이들을 위한다는 명분에 눈이 멀어, 현재 나의 변화를 민감하게 보는 감각을 잃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이 무뎌진 감각에서 나온 말들을 고집한다면 그 말은 장마철 습기 많은 공기처럼 칙칙한 것이 될 것이다.
그러니 이제 나의 말로 다른 사람을 바꾸려는 마음은 그만두자. 대신 오늘 나의 삶에서 새롭게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보고, 그것을 표현할 새로운 말을 하나씩 만들어 보자. 우리가 공부를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거기에는 ‘나의 변화’가 아닌 ‘남의 변화’에 방점이 찍혀서는 안 된다. 나의 공부가 손자와 아들과 후배와 제자를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들은 그들의 공부를 통해 바뀌면 된다. 나의 공부는 나를 바꾸는 것으로 충분하다. 말이 곧 그 사람이라면 나는 나의 삶을 창조하는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내 삶을 창조적으로 만들어가지 못하면, 나에게서 새로운 말은 나오지 않는다. 세상은 결코 현재의 자신을 연장하려는 사람에게 말을 걸어오지 않는다. 세상은 새로운 말을 하는 사람에게 귀를 기울이고 말을 걸어온다.
글_안상헌 (감이당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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