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이렇게 재미없는 남자가 되었을까
대략 5년 전, 남산강학원에서 글쓰기 공부를 시작한 첫 프로그램에서 같은 조의 한 학인이 내게 뜬금없이 ‘선생님은 왜 그렇게 재미가 없으세요?’라고 말했다. 그때는 특별히 대응할 필요를 못 느꼈고, 공부하는 데 와서 ‘무슨 재미 타령?’이라 속으로 생각하며, 그냥 웃으며 넘어갔다. 그러나 이 말은 늘 나를 떠나지 않았다. 그 후 5년의 세월이 흘렀고, 남산강학원과 감이당을 오가며 나름 재미있게 공부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재미없는 남자’라는 말을 듣고 있다. 나는 왜, 그리고 언제까지 이 말을 들어야 하나? 한 번씩 답답했다. 그리고 최근에는 나의 이 ‘재미없음’을 해결하지 못하면 그동안 재미있게 해왔던 공부는 더 이상 진척이 없을 수도 있으며, 그렇게 되면 결국은 지금의 공부를 그만두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그동안 이렇게 답답했지만, 답을 찾지 못했던 나에게 니체는 이렇게 말을 걸어온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덕을 선하다고 부를 때, 이는 그것이 그 사람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 덕을 칭송하는 것은 그 개인에게 해로운 어떤 것을 칭송하는 것이고, 인간에게서 가장 고귀한 자기애와 자신을 지키는 최상의 능력을 빼앗아가는 충동들을 칭송하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즐거운 학문』, 「사심 없기를 가르치는 설교자들에게」, 책세상, 91~92쪽)
나는 어릴 때부터 ‘선하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집과 학교에서 늘 그래야 한다고 배웠고, 주변의 다른 아이들에 비해 이런 말을 좀 더 자주 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이 평판은 집안의 어른들과 학교 선생님들의 자랑거리였고, 내심 스스로도 이런 평판을 좋아했다. 그리고 나는 이 평판을 지속시키기 위해 나름 애썼다. 가끔 마음속에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것은 당연히 억눌러야 하는 것으로 배웠다. 나는 그렇게 순순히 주변의 평판을 받아들였고, 때론 그 평판을 즐기면서 살았다. 사람은 역시 선한 것이 제일 좋다고 생각하면서, 나도 남도 모두 그렇게 배우고 살아가는 것이 옳다고 믿었다.
그런데 니체는 이런 나에게 그동안 내가 생각해오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말한다. 지금까지 사람들이 나를 ‘선하다!’고 부른 것이 나를 위한 것이 아니었고, 이 말은 내가 믿었듯이 내게 그렇게 좋은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나를 ‘선하다!’고 불렀던 것은 나에게 미치는 영향 때문이 아니라, 나를 그렇게 부른 그들에 미치는 영향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뭐지? 그동안 나를 칭찬했던 많은 선생님들과 어른들은 나에게 무슨 일을 한 것이지? 나는 이들에게서 ‘선하게 사는 것’이 내가 한평생 살아가면서 배우고 실천해야 할 가장 중요한 덕으로 배웠고, 나름 그렇게 살려고 애썼다. 그런데 니체에 따르면 그동안 내가 자주 들었던 ‘선하다!’는 칭송은 나에게 해로운 것이었고, 심지어 나의 최상의 능력을 빼앗아가는 것이었다니! 도대체 칭찬이 왜 나쁜 것이고, 내게서 어떤 것을 빼앗아간다는 말인가? 그동안 내가 받은 칭찬으로 인해 나는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었단 말인가? 니체는 말한다.
“나는 맹목적인 근면이 비록 부와 명예를 가져다주기는 했지만 그 부와 명예를 누릴 수 있도록 하는 섬세함을 신체 기관에서 빼앗아 가버려, 질투와 열정에 대한 이 특효약이 새로운 자극에 대한 감각을 무디게 하고 정신을 완고하게 만드는 경우를 얼마나 자주 보았는지 모른다.”
(위와 같은 글, 93쪽)
‘선하다’는 칭찬을 많이 받고 자란 사람들. 이러한 칭찬아래에서 근면하게 살아온 사람들. 이들은 결국 어떤 삶으로 귀결되었나? 예전에 내가 들은 칭찬 중에 이런 것도 있다. “쟤는 믿을 만하고 늘 성실하다!”, “그래서 쟤는 뭘 맡겨도 믿을 수 있어!” 나는 선하다는 말을 자주 들음과 함께 늘 근면하고 성실하게 살려 했다. 그 근면과 성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 결과 나는 먹고살만한 약간의 부와 세상의 호의적인 평판을 얻었다. 그러면 된 것 아닌가?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이루기 위해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니체는 내가 누리는 약간의 부와 세상의 칭찬은 나의 몸에서 ‘섬세함’을 다 빼앗긴 대가라고 말한다. 실제로 우리들 대부분은 근면과 성실이라는 ‘도덕’으로 길러지는 동안, 그리고 이렇게 길러진 도덕을 믿고 살아가는 동안, 스스로 주변의 자극에 대한 감각이 무뎌지고 정신까지 완고하게 된다. 그동안 내가 노력해 이룬 부와 명예가 있다면 그것들은 내 삶을 위해 지혜롭게 활용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나와 내 주변의 삶을 관찰할 수 있는 섬세한 감각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삶에 대한 섬세함이 있어야 할 자리에 ‘그동안 나는 가족과 사회를 위해 헌신했다!’는 이상한 자긍심으로 가득 채우게 된다. 나뿐만 아니라, 주변에 쉽게 관찰할 수 있는 사례들이다. 이는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한평생 선하고, 성실하며, 칭찬받았던 사람들에게서 더욱 쉽게 관찰될 수 있다. 착하고 성실하게 살았던 중년들이 갑자기 자신의 삶에 대해 허전해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이렇게 갑작스런 허무함을 느낀 중년들은 “그동안 나는 너무 세상과 가족들을 위해 살았어, 이제 내 삶을 찾아야지!”라는 각오를 한다. 그리고 친구들도 다시 찾고, 등산도 자주 가고, 악기도 배우고, 시골에 가서 농사도 짓고, 산에서 버섯도 키우고, 때론 인문학 공부도 하고, 때론 글쓰기도 하고, 특히 끝까지 성실한 사람들은 에세이집 한 권 정도는 내고 등등. 그런데 이렇게 하면 그동안 잃어버렸던 나를 다시 찾을 수 있을까? 니체의 답은? 한마디로 아니다. 이러한 활동을 한다고 재미없게 무뎌진 나를 찾을 수 없다. 잠시 활력을 찾는 듯하지만, 결국은 예전의 나로 다시 돌아가 버린다. 대부분의 중년들이 겪는 삶의 패턴이다. 그 후 이어지는 체념. “세상은 원래 다 이런 거지!”, “사는 게 뭐 별거 있나!”, “이제 다 내려놓고 절에나 다니면서 봉사나 해야지” 등등으로 결론 난다. 이렇게 우리는 선하게 길러진 삶에서, 자신이 주도하는 삶으로 잠깐, 그러다 다시 체념하는 삶으로 ‘왔다 갔다’하는 인생을 살아간다. 아님 평생 남에 의해 길러진 삶으로 마감하든가. 이것이 니체의 눈에 관찰된 현대인들의 삶의 모습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이렇게 너무나 가족적으로, 학교적으로, 사회적으로, 국가적으로, 글로벌하게 생각하고 실천하는 것을 배웠다. 이것이 지금껏 내가 살아온 길이었고, 재미없는 남자가 된 과정이었다.
니체는 현대인들이 살아가는 삶의 과정은 자기 삶에 대한 섬세함을 키워가는 과정이라기보다 오히려 그것을 잃어가는 과정으로 읽고 있다. 우리 또한 세상에서 잘 배우고 잘 살아갈수록 자기 자신에 대한 섬세함과 내 삶의 주변에 대한 섬세함은 그만큼 무뎌져 가는 경우를 자주 본다. 하지만 모두가 바라는 것이겠지만 나 또한 이렇게 삶을 마감하고 싶지는 않다. 특히 나의 이 ‘재미없음’ 때문에 지난 5년 동안 나름 재미있게 해온 공부를 여기서 멈추고 싶지도 않다. 다행히 니체를 통해 나의 이 ‘재미없음’의 원인을 이제 알았으니, 앞으로 남은 일은 이를 하나씩 스스로 치료해 가는 것이다. 하여 나는 당분간 니체를 읽고 쓰며, 내 몸에서 빼앗긴 삶에 대한 섬세한 감각을 회복하고자 한다. 니체와 함께한다면, 나의 이 지긋지긋한 ‘재미없음’이 조금은 해결될 것이라 기대하며!
글_안상헌 (감이당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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