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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하고 인사하실래요 ▽/니체사용설명서

[니체사용설명서] 창조적인 삶, 새로운 이름 붙이기에서 시작된다

by 북드라망 2021. 4. 6.

창조적인 삶, 새로운 이름 붙이기에서 시작된다


삶의 무덤이 된 학교와 가족


삶은 생생(生生)한 것, 즉 창조적인 것이다. 그런데 이 삶이 많이 훼손되었다. 특히 학교와 가정에서의 관계가 삶을 크게 훼손하고 있다. 학교에서 교사와 학생의 관계와 가정에서의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창조적인 삶이 가능한 관계가 아니라고 아우성이다. 그 속에서 모두들 힘들어한다. 학교가 힘들어 떠나는 아이뿐만 아니라, 학교가 힘들어 떠나는 교사들도 많다. ‘근대 학교’와 ‘근대 가족’이란 것의 태생이 원래 창조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으니 이곳으로부터 빨리 탈출하는 것이 생생하고 창조적인 삶을 위해 더 낫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한마디로 학교와 가정이 삶의 무덤이 되어 버린 것이다. 학교와 가정은 정말 답이 없는 곳인가? 그러니 학교와 가정에서 하루 빨리 도망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인가?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것에 쉽게 동의할 수 없다. 학교라는 곳이 어떻게 불리든 간에 우리 삶에서 배움의 공간 없이는 창조적인 삶이란 있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가정이라는 곳이 어떻게 불리든 간에 생명의 탄생과 양육의 공간 없이 생생(生生)하는 삶은 가능하지 않다. 결국 학교와 가정은 생각처럼 쉽게 버리거나 떠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공간을 창조적인 삶의 공간으로 만들 수는 없을까?

 

 

‘학교’라는 실재도 ‘가정’이라는 실재도 없다


니체는 학교나 가정이 삶의 무덤이 되어 버린 현대인들을 향해 그들 스스로가 실재론자가 되어버렸다고 비판한다. 니체가 진단하는 현대인들은 스스로에게서 끓어오르는 정열과 환상을 억누르는 냉철한 인간들이다.

 

실재론자들에게.―그대들 냉철한 인간들이여, 그대들은 정열과 환상에 대항할 수 있는 갑옷을 입고 있다고 느끼고, 그대들의 공허함으로부터 자랑거리와 장신구를 만들어내려 한다. 그대들은 스스로를 실재론자라 부르면서 세계가 그대들에게 보이는 그대로 만들어져 있다고, 오로지 그대들 앞에서만 실재 세계가 베일을 벗고 모습을 드러내며, 그대들 자신이야말로 그것의 최고의 부분이라고 암시한다.

(프리드리히 니체, 『즐거운 학문』, 책세상, 127)

 

현대인들은 ‘큰 이성’(신체 이성)은 경멸하면서 자신들의 ‘작은 이성’(도구적 이성)으로 그릴 수 있는 세계를 ‘실재’라 믿고 있다. 그리고 자신들이 이러한 실재를 가장 잘 실현하고 있는 존재라 생각한다. 물론 자신을 최고라고 억지로 믿고 있는 현대인들은 스스로 공허함을 느낄 수밖에 없으며, 이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학교와 가정에서 자신의 자랑거리와 장신구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이 설정해 놓은 목표 달성을 위해 어떠한 희생도 감수한다. 아이들의 성적 향상을 위해서는 아동과 청소년기의 다른 특성들은 기꺼이 무시할 수 있으며, ‘가족 삼각형’의 완성을 위해서는 우리 가족 이외의 그 어떠한 것도 여기에 끼어들 수 없으며, 그 어떤 것도 결여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각자의 역할은 완벽하게 실천되어야 한다. 학교는 공부 잘하고 문제 일으키지 않는 아이들로 가득 차 있어야 한다. 가정은 그 어떤 면에서든 만능이고 유능한 아빠, 아이 잘 키우는 엄마(요즘은 돈도 벌면서^), 공부 잘하고 착하고 말 잘 듣고 무럭무럭 잘 자라는 아이들만이 있어야 하는 공간이다. 이러한 요건들을 충족하면 이들은 자랑거리이고 장신구이며, 그렇지 못하면 이들은 문제아가 된다.

뿐만 아니라, 교사라면 당연히 이 일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모든 아이들을 이 길을 향해 달려가도록 몰아붙일 수 있어야 유능한 교사이다. 한편 아빠라면 세상에서 멋진 일을 하며 돈도 잘 벌고, 엄마에게도 자상하고, 아이들하고 잘 놀아 줄 수 있는 ‘슈퍼맨’이 되어야 하고, 엄마라면 예쁘고 날씬하며 요리도 잘하고 아이들도 잘 키우며 어른들에게도 잘하는 ‘슈퍼우먼’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우리는 모두가 최고의 학교와 행복한 가정을 노래하고 있다.

 


하지만 세상 그 어디에도 이러한 학교와 가정의 ‘실재’는 없다. 이 모든 것은 학교와 가정의 ‘실재’가 아니다. 모두가 우리가 만들어낸 환상이고 첨가물이다. 우리가 일상을 살면서 구체적으로 경험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 속에서 창조적인 삶을 생각하는 것 자체가 사치가 되었다. 숨 막혀 죽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새로운 이름 붙이기


니체는 우리의 삶이 무덤이 되지 않고 거기에서 숨 막혀 죽지 않으려면 그것을 새로운 이름으로 불러볼 것을 제안한다.

 

오랜 시간 동안 새로운 “사물”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이름과 평가, 개연성을 창조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위와 같은 책, 128)

 

나에게 가족이란 무엇일까? 가족은 나를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고, 키워주는 고마운 관계이자 공간이었다. 내가 어른이 되면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자식을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키우는 역할을 하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여기에 조금 더 좋고 덜 좋은 것이야 있겠지만 그리 특별할 것은 없었다. 우리는 이것을 일러 흔히 ‘삶의 짐’라 부른다. 나에게도 이러한 삶의 짐이 당연히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나는 이런 말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 가족은 친구다!” 정확한 시기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아이가 태어나고 자라 초등학교 고학년이 될 시기쯤으로 기억한다. 나에게도 언제나 승승장구하는 아빠, 아이에게 자랑스러운 아빠, 아내에게 자상하고 건강하게 오래 안정적으로 돈 잘 벌어주는 아빠 등등의 요구가 있었다. 동시에 돈도 벌고 살림도 잘하고 아이도 잘 키우는 엄마도 있어야 한다. 아이도 이젠 건강하고 잘 노는 것만이 아니라, 공부도 잘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갖추어져야 온전한 가정이라고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나를 압박하고 있을 때였다. 그때 나는 가정이라는 것을 다시 정의하고 싶었고, 그래서 ‘가족은 친구’라는 새로운 이름 붙이기를 시도했다.

요즘 나는 전통적으로 학교라 불리는 공간에서 배우고 가르치지는 않는다. 대신 새로운 공간에서 배우고 글을 쓰고 때론 가르치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청년들을 만날 기회가 많다. 어느 날 이 친구들과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나는 너희들과 평등한 관계가 되고 싶다!”고 얘기를 했다. 사실 요즘 나의 고민을 드러낸 것이다. 그랬더니 누가 나에게 말했다. “왜요? 선생님! 우리 아빠 나이에다 주역도 가르치시는데…!” 라고 말했다. 그 때 나는 대답했다. “아니, 난 청년들에게 어른이나 선생 대접 받고 싶지 않아. 왜냐면 이런 대접 받으면 난 너희들에게 줄 것도 받을 것도 별로 없거든! 대신 내가 청년들과 평등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면 나는 청년들과 함께 공부하며 대화하고 소통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고, 그러면 그것이 나의 삶에 활력을 줄 것이다!”고 말했다. 새로운 공간에서 ‘선생’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한 때, 나는 ‘평등한 관계’라는 이름 붙이기를 시도했다.

 


그렇다. 대략 10년 전에 “우리 가족은 친구다!”라고 말했고, 최근 “청년들에게 대접받는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라고 말했다. 두 경우 모두 일반적이지 않은 새로운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 말을 한 이후 나의 삶은 어떻게 변했을까? 새로운 이름을 붙인 후, 내가 지는 삶의 짐은 오로지 나만이 느끼는 삶의 짐이 되었다. 그리고 그 무게는 늘 다르고 새롭다. 나는 ‘행복한 가족’이라는 ‘실재’도 없는 삶의 짐을 지고 살지 않는다. 나는 ‘만능 아빠’라는 실재도 없는 무게를 느끼며 살지 않는다. 나는 아이가 곧 나라는 환상으로 살아가지도 않는다. 나는 ‘나’고 아이는 ‘아이’일 뿐이다. 아내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고 우리의 가족관계가 나쁜 게 아니다. 우리 가족은 각자의 삶의 짐을 지고 살아갈 뿐이다. 우리 부부는 그것이 삶이라 배웠고, 이제 성인이 된 아이에게도 다시 그렇게 말했다. 모든 학인들과의 관계도 나는 똑같다고 생각한다. 배움의 길에 있는 우리들 모두는 각자의 삶에 대한 고유한 짐을 질 수 있어야 하고, 그 고유한 무게를 감각할 수 있어야 한다. 하여 배움의 과정에서 오고가는 대화는 각자가 느끼는 그 고유한 무게감을 나누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 이상의 창조적인 활동은 없다. 이것이 니체가 말하는 앎의 과정이고, 곧 삶의 과정이다.

 

글_안상헌(감이당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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