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 순간 선택이 곧 나입니다
질문자1: 삶의 방향성과 즐거움을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정화스님: 삶은 이뤄가는 게 아니에요. 삶은 이뤄가는 게 아니고 지금 여기서 사는 것만이 자기 삶이에요. 내가 매 순간 선택을 하는 게 삶인 거예요. 이리 갈까, 저리 갈까 선택할 때 그 고민하는 것이 자기 삶이죠. 그 선택을 자기 삶의 힘으로 여기는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가 자신의 삶을 살기가 수월해지는 것이죠. 만약 그 선택이 자기 삶의 힘이 되지 않으면 또다시 선택해서 가는 거예요. 다시 선택해서 가는 건 별로 큰 문제는 아니에요. 하지만 선택을 받아들이는 건 큰 문제예요. 어떤 선택을 하든지 간에 ‘선택한 것을 내가 어떻게 볼 것인가’라고 하는 내면의 자기 힘을 기르지 않으면 항상 무엇을 선택해놓고도 선택하지 않은 다른 삶이 좋을 것처럼 착각해요. “이것이 좋을까?”하고 착각하는 순간 지금 내 삶은 바라는 내 삶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러면 자기 삶이 없어져요. 그럼 인생이 어떻게 됩니까? 그럼 우울하겠죠? 그래서 내가 지금 사는 것이 내 삶인 줄 봐야 해요. 또는 “모든 생명체는 그 자체로 가장 존귀하다.”라고 하는 명제를 가지고 있지 않고, “예쁘고 잘생긴 얼굴을 가져야만 존귀한 얼굴이 된다.”고 생각한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모든 사람은 거의 “당신이 생각하는 그 얼굴은 존귀한 얼굴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어렸을 때 다들 완벽한 얼굴에 대한 추상이 있지만 그 순간에 자신이 생각하는 완벽한 얼굴에 자기가 들어맞는 사람은 없어요. 그것은 추상의 영역에만 머물러 있기 때문이죠.
김아타라는 사진작가가 있어요. 이분은 나와 타자가 공존하는 그런 사진을 찍는데 하나의 판에는 여러 남성을 다른 하나의 판에는 여러 여성을 전부 다 계속해서 포개 찍어요. 그러면 묘하게 다 비슷비슷해져요. 모두 다른 얼굴로 태어났는데 삶 속에서 나는 다른 얼굴들이 중첩된 거예요. 또는 미국 뉴욕에 있는 아주 복잡한 거리 한쪽에다 사진기를 거치대에 걸쳐 놓고 하루 24시간 그냥 셔터를 다 틀어놔요. 사람들이 계속 움직이는 공간에다 셔터를 계속 틀어 놓으면 공간이 텅 비어버려요. 사진은 멈춰 있는 것을 찍어요. 즉 우리 생각도 내면에 멈춰 있으면 마치 찍힌 사진과 같아요. 마음속에 찍힌 사진은 움직임을 뜻하는 것이 아닌 거죠. 그래서 우리가 움직이고 있는 것하고 움직임 그 자체가 드러난 것하고 차이가 있더라고요. 움직인다고 하는 말은 내 생각을 사진을 찍듯이 멈춰 놓고 그것을 삶에 어떤 장면인 것처럼 바라보지 않는 것이에요. 다만 우리는 동물이고 생각을 사진을 찍듯이 하는 것뿐인 거예요.
그래서 선택은 하시되 하고 난 이후에는 그것만이 내 삶인 것처럼 살다가 또 아닌 것 같으면 다른 선택을 하고 그 다른 선택만 있는 것처럼 살아야 해요. 그래서 자기가 선택한 삶을 스스로 좋아하는 힘을 기르지 않는 사람은 마치 인생을 잘 살아놓고도 잘못 산 것처럼 자기를 볼 확률이 높아져요. 다른 사람이 나의 삶을 보고 “너 왜 그런 걸 선택을 했어?”라고 말해도 “난 이게 좋아. 이것만이 내 삶이야.”라고 자기를 볼 줄 아는 사람은 자기 삶을 항상 잘 살았다고 말을 해요. 이렇게 보는 심리적 기제를 만들면 삶의 방향성과 즐거움은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질문자 2: 니체를 책을 읽으면 불교와 연관되어있는 것 같은데 니체가 너무 잘난 척하는 거 같아서 공부하기가 힘듭니다.
정화스님: 니체든 불교든 그냥 하고 싶은 거 하면 돼요. 그런데 우리가 그냥 니체에 대해서만 듣는 것을 바로 니힐리즘이라고 하죠. 여기서 니힐은 허무입니다. 니힐의 허무는 무엇이냐면 우리가 만드는 내부의 이미지가 허망하다는 거예요.
우리가 무언가를 이야기할 때 거기다 각각의 개념규정을 만들어서 이야기하지요. 그 각각의 개념규정은 언어화시켜서 이야기를 이어가는 것들이거든요. 그런데 “이것은 컵이다.”라고 하면 언어적 컵하고 내가 경험하는 컵하고는 어떤 차이가 있어요. 내가 실제로 보고 만지는 것은 눈에서 보내준 시각 정보와 손에서 보내준 촉각 정보인데 이 감각정보를 뇌에서 번역을 해줘요. 그럼 우리는 ‘이것’이라는 감각정보를 ‘컵’이라고 보는 거예요. 언어는 그저 ‘이거’에다가 이름을 붙일 뿐이죠. 내가 컵을 지금 보이는 것처럼 보는데 실제로는 외부의 정보를 내부의 이미지로 전환해서 내가 그것을 외부라고 보고 있는 거예요. 만일 내부에서 이러한 외부의 정보를 해석하는 기제를 다 내려놔 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면 갑자기 여기 있는 모든 영상이 사라져 버려요. 지금 이야기를 하는 게 너무 현실적인데 내 안에서 이 현실에 대한 해석·번역·인지 시스템을 잠깐 스위치를 `딱` 꺼버린다면 그 순간 아무것도 없겠죠? 다시 말하면 지금 제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우리는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것을 언어화 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누구’라고 해석하는 부위의 스위치를 `딱` 꺼버리면 이야기하는 상황만 남고 이야기하는 ‘누구’들은 사라져 버려요. 이야기하는 ‘누구’라는 것이 분명히 존재했잖아요. 그런데 이 스위치만 꺼지면 ‘누구’가 사라져 버려요. 더 깊이 생각하면 ‘누구’만 사라지는 게 아니고 인지 시스템에 변화가 오면 갑자기 아무런 이미지가 만들어지지 않는 상황이 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내부의 구조는 분별하는 이미지와 무분별이라고 불리는 부분. 한편으로는 아예 존재라고 하는 언어를 끄집어낼 수 있는 것이 아주 작아져서 존재하지 않는 상황의 나. 이 세 개가 우리의 내부 안에서 돌아가면서 작동을 하고 있어요. 자신이 실제를 경험했다고 하면 자신 안에서 모든 심상이 사라진 상황을 직접적 경험을 한 거예요. 그전엔 분별 된 이미지로써 이것이 사실인 줄 알았더니 경험으로 실천했더니 아무것도 없네? 그때부터는 세상이 허무한 거예요. 내가 보는 모든 사건이. 그래서 불교에 가면 “시비 가리지 마라. 선악 가리지 마라.” 이런 말을 해요. 물론 선악과 시비도 중요해요. 이것도 세상과 접속하는 극히 작은 부분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지요. 다만 질문자가 너무 수업을 많이 들어서 내부에서 선악, 시비를 분별하는 게 강해지죠. 여기서 다시 이 분별 하는 마음을 내려놓으면 서양종교에서 말하는 자기 존재적 가치를 온전히 신과 합일된 상태, 의식상태, 이런 것들을 경험하는 힘이 줄어들기 시작해요. 그담에 불교에서 공(空)이라는 말 많이 들어 보셨지요. 공(空)이란 완전히 텅 빈 마음 상태로 돼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신과 합일된 상태를 불교에서는 무분별하다고 말해요.
이렇듯 니체는 논리적으로 분별의 이미지와 무분별. 그리고 텅 빈 마음을 설명하는 거예요. 니체는 서양의 실체론적 사유에다가 정말 큰 구멍을 뚫었어요. 그래서 자부심을 가질 만해요. 더군다나 온갖 사람들에 대한 전부다가 헛짓거리한다고 하고 있잖아요. 제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어 봤는데 거기에 보면 차라투스트라가 가장 좋아하는 친구가 있어요. 독수리하고 뱀이에요. 독수리는 높은 곳에서 통찰 있게 전체를 관망하는 거예요. 우리 뇌 중에서 주로 우뇌가 그렇게 해요. 그다음에 뱀이 있어요. 뱀은 지상에서 돌아다니며 사건들을 낱낱이 잘 알아요. 그건 주로 언어를 중심으로 하는 좌뇌가 그렇게 해요. 이 두 개를 잘해서 왔다 갔다 하면은 갑자기 어느 순간 마음도 텅 빈 상태가 되고 통일된 마음의 상태도 되기 때문에, 자신을 더 직접 경험하려면 이처럼 자기를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눈과 내 안에서 일어나는 세밀한 자기감정, 인지 상태를 세밀하게 살피는 뱀과 같은 두 눈을 가져야만 니힐을 경험할 것으로 봐요.
무분별, 우리한테는 이 전체적인 통찰능력은 별로 관심이 없어요. 이 순간에도 전체적인 통찰능력과 분별능력이 같이 작동하고 있는데 주로 작용하고 있는 건 낱낱의 사건들이에요. 그래서 항상 이 좌뇌와 우뇌의 중심을 잡아야 해요. 절에 가면은 지금은 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스님들이 경전을 배우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큰스님들이 “그런 경전은 다 쓸데없는 소리!”라고 자주 이야기하곤 했어요. 이렇듯 니체를 배우면서 자기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지켜보는 일을 하루에 15분 정도 훈련을 쭉 하다가 책과 인연이 닿아서 갑자기 세 가지 영역의 인지 구조가 자기에게 확 다가오면 니체를 읽기가 훨씬 수월할 거예요.
정리_화요대중지성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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